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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이긴 사람들 (요 1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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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긴 사람들 (요 16:25~33)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 16:25]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요 16:26]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 16:27]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요 16:28]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요 16:29]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요 16: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요 16:31]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우리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의 기록 의도를 충분히 이해해야 할 줄 압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33년이요 또 공생애가 3년이지만 성경의 기록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에 된 일들을 성경 기록의 1/3이나 할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에 가장 강력한 포커스를 맞추어 예수님에 대해 집중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보았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집중적으로 기록된 일주일간의 예수님의 생애는 주님이 가장 큰 고난을 당하신 날들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작은 주님의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일로 시작을 하여 고난을 당하셨으나 부활의 승리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승리로 시작이 되었으나 고난을 당하시고 더 큰 승리를 얻으시므로 완전 승리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이 점에 포인트를 맞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이렇게 기록을 한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시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승리를 한 것이며 세상살이에 고생이 많아도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요 성경이 말씀하신 가장 핵심적인 교훈이며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받을 수 있는 큰 은혜 가운데 큰 은혜입니다.

심리학에는 ‘학습된 무력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도나 태국에서 아주 몸집이 큰 코끼리를 길들려 집안의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코끼리를 길들이기 위해 야생 코끼리를 잡아 마당 가운데 말뚝을 박고 발목을 묶어 둡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도망을 치려고 발목에서 피가 나도록 몸부림을 칩니다. 얼마 후 발목에 매인 쇠사슬을 풀어 줍니다. 그러나 코끼리는 자기 발목에 체였던 쇠사슬이 풀린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도망할 것을 체념하고 사람이 하자는 데로 하게 됩니다. 

사람도 이렇게 패배와 무기력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승리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되는 데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운명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패배를 자인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적당 주의로 살아갑니다.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식의 만사 태평 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 보람과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놓고 많은 저항이 와도 승리를 위해 도전적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전혀 승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 승리를 상상도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개척과 승리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승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성공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무기력 증에 든 사람, 너무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 자기는 고생하고 살게끔 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체념적인 인생살이에 무슨 승리가 있으며 성공이 있으며 행복이 있으며, 성취감이 있겠습니까?

방탕과 타락은 절망의 부작용입니다. 완전히 절망한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손을 쓰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낙심하고 절망하더라도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는 힘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는 지금 역경이 있습니다. 절망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음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배신이 있습니다. 비웃음이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성공을 말씀하시고 승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성공하시고 승리를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이 승리가 우리 것이 되도록 하고, 이 성공이 우리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역사적 승리를 보고, 내적인 승리를 보고, 외적으로 나타난 승리를 보고, 우리도 그렇게 승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주적인 승리를 재현하십니다. 패배자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위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요 16:33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신 말씀에 대하여 루터는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두릅을 끓으며, 기어가면서 운반할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다와 노인으로 유명한 헤밍웨이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대 문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잃었습니다. 그의 유서에는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결국 바다와 노인에서는 승리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실제적 인생에서는 패배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바로 십자가를 저야 하는 그날 전 밤에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면서 마지막 길고 긴 고별의 설교와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 복음 14,15,16,17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이 확실한데도 주님은 초조하거나 염려하시는 기색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죽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십니다. 죽음과 고난 앞에서의 용기, 그것이야말로 참 용기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 이것입니다. 이것은 승리의 선포요, 믿음의 확신이요, 체험의 간증이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이 귀한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우리들의 영혼에, 우리들의 생활에서 이 말씀을 체험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들의 자신에게서, 구리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 말씀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승리의 선포가 먼저 있고서야 승리의 실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승리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승리는 영원히 승리하신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확신이 실제적인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정신적인 패배, 영적인 패배감은 결코 통쾌한 승리를 우리들에게 가져오지 못합니다.

주님은 세상을 이기였노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7장에 보면 세상이라는 말이 열 아홉 번이나 쓰입니다. 세상은, 세상은--- 
하나님의 귀하신 뜻이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를 거절한 세상입니다. 까닭 없이 우리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받아 드리지 않는 인간들의 무리입니다. 주님과 성도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는 사단의 무리들입니다. 주님께서 선하시고 착한 일을 많이 하셨어도 오히려 그것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음모와 배신과 오해뿐인 곳입니다. 핍박과 환난과 고통을 주면서 괴로움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극도의 이기심과 거짓과 불신과 허위로 가득한 곳입니다.  고독하고, 모든 가능성이 없어져 버린 곳입니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흩어질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제자들마저도 주님을 떠납니다. 배반입니다. 불신입니다. 비겁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세상을 “이겼노라”

요한 복음에 한번, 요한 일 서에 여섯 번, 계시록에 일곱 번 나오는 “이겼노라”라는 말씀은 이런 악한 세상에서 승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승리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승리는 망각이 아닙니다. 해탈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이야기가 아닙니다. 양보가 아닙니다. 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건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분명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아시고 그를 찌른 자들도 알고, 그 때 살던 사람도 알고, 그 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던 자들도 아는 그런 사건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승리입니다. 승리는 생명입니다. 살아 남아야 승리의 의미가 있습니다. 승리는 영생이요, 영원한 축복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신 승리입니다. 승리는 영광입니다. 얻었다고, 복수를 했다고, 빼앗았다고 승리가 아닙니다. 얻었어도, 빼앗았어도 두려움이 있으면 승리가 아닙니다. 명예와 지위를 얻었어도 두려움이 있으면 승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신 승리는 무엇을 얻고 빼앗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냐, 영광된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의로운 것이냐,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의와 선은 영광을 수반합니다.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것입니다. 자랑스럽지 못한 것은 패배입니다.  또한 승리는 자유입니다. 근심, 걱정, 어두움, 불가피한 것들에게 매이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되었을 때 비로소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승리는 참 자유요, 화평입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서 얻는 것과 다른 평화를 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권투 장에서 한 선수가 다른 선수를 캐오 시키고 심판이 승리한 사람의 손을 번쩍 들어주는 것이 승리가 아닙니다. 그저 얻어맞고 쓸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일어났다가 쓸어지는 반복 운동입니다. 스포츠의 모든 승리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승리에는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입니다. 

참 승리라는 것은 평안입니다. 화평입니다. 샬롬입니다. 총소리가 없는 승리가 진짜 승리입니다. 쓸어진 상대를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참 승리입니다. 싸우다가 다 죽고 한 사람이 남았는데 무엇이 승리입니까? 그것은 참패입니다. 평화가 승리요, 고요함이 승리요, 싸움이 없는 승리가 참 승리입니다.

승리는 영적인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신 것은 싸우지 않는 승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적들이 강하게 도전해 왔을 때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참 승리를 바라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승자는 눈을 밝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승자는 거친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을 돛을 위한 에너지로 생각을 하고, 패자는 바람이 불 때 돛을 내린다’ 여러분 참 승자는 거친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으로 더 빨리 목적지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승자는 눈이 왔을 때 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실업가들이 입버릇처럼 외우는 좌우명이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을 하려면 3C (Change, Choice, Challenge)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포착하는 것, 선택  을 바로 하는 것, 도전하는 것, 도전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향해 도전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도전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게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을 당하던, 어떤 어려움이 있던 그 고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모르고 하는 일은 확신도 없고 그 고난을 이길 내적인 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어려운 일들의 의미, 즉 구속 사적인 의미도 알고, 선교 적 의미도 알고, 지금 당하는 고난이 장차 우리들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인지도 알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고난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줄 것인지를 알고 고난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갈릴리 목수의 아들로 살았으면 십자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왕자로 살았으면  우리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모세가 아니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을 바로의 아들로서 영광보다 더 중히 여겼기 때문에 우리들의 모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평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승리 없는 평안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란 선한 투쟁이 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멀리 앞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장래와 교회의 미래와 그리고 우리 자식들의 평생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의 자식을 보고 무엇인가 영원한 승리를 위한 고난을 당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진통을 겪으면서도 그 고통을 즐거운 마음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은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고 오늘의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내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선한 경주를 인내로서 경주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부활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영광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죄를 용사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16장에 이 말씀을 다시 반복하십니다. “잠깐 있으면 못 보겠고, 잠깐 있으면 볼 것이다. 잠깐 있으면 죽을 것이요, 잠깐 있으면 부활을 할 것이다” 잡다한 현실에서 영광된 미래를 보고 계십니다.

또한 초연한 사랑과 믿음으로 미래를 보십니다. 승리를 확신하십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조금 있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을 할 것입니다.  이 일들을 다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경고도 하시고 예언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경망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의 그런 배신적 행위가 그들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들이 나를 떠나도 결국 다시 돌아 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음도 당하리라. 그러나 영원히 승리를 할 것이다. 나와 같이” 이렇게 생각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중심에 있는 사랑과 믿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믿음으로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 때문에 당신의 소신을 굽히시지 않습니다. 승리자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소신이 뚜렷해야 합니다. 소신이 없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하는 것에 따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이 될 우려가 많습니다. 본래의 목적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28절)라고 하십니다. 왔다가 가는 인생 길에 소신을 가지고 사십니다.  인생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시다가 가십니다.  그런 과정에서 좀 복잡한 일이 있고 사람들의 말들이 있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사시고 가시는 길을 방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복잡한 일들 때문에 주님은 더욱 돋보이는 인생을 사십니다. 핍박을 받으실 때 참는 예수님은 핍박이 없이 평화롭게 사시는 예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입니다.

또 주님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결코 나 홀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영원한 승리자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계십니다. 어느 누구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주님이 승리하신다 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승리는 바로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 대장 예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군의 승리는 우리 민족의 승리가 되는 것처럼 우리 주님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가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승리를 위해 이미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 예수님을 따라가면 승리를 합니다.                            
6.25 당시에 우리 나라에 미 해군들이 가져와 우리 국군에게 인수 인계한 군함은 아주 적은 것이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목선인데다 대포라는 것을 수류탄을 던지는 정도의 것이어서 그것으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지를 않았습니다. 그 배를 방문한 사람이 해군들에게 물었습니다. ' 이 배는 어디에서 만들었습니까?' '미국에서 만들었지요' '아니 이 작은 배로 태평양을 건너 왔다는 것입니까?' '그럼요. 큰 군함의 뒤를 쫄쫄 따라 왔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장 되시는 우리 주님을 따라가면 승리를 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가는데 파리 한 마리가 비행기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파리를 죽이려고 하니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여보시오. 파리를 죽이지 마시오. 적어도 그 파리는 국산이고. 미국까지 온 수출품이요.’하드랍니다. 여러분 하찮은 파리도 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미국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가벼이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 하십니다.

리빙스턴은 식인종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에서 16년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영국의 런던에 돌아 와 선교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보고를 들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나이 어린 청년이 그런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서슴지 않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성경 구절 두절을 외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요 14:1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두 말씀을 확실히 민도 승리할 수 있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약속 받은 승리, 그 승리를 약속 받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다 이루는 승리자가 된다는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절대적 승리입니다. 패배의 가능성은 1000만 분의 1도 없는 확실한 승리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승리요. 믿음의 승리요, 생명의 승리입니다.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며,  증오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절망에 대한 소망의 승리며, 불신에 대한 믿음의 승리입니다.  인천에 있는 맥아더의 동상에는 “승리를 대신할 아무 것도 없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승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승리만 생각하십시오. 꿈에도 실망이나 낙심, 실패라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르고, 승리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승리하신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얻으시면 됩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지금도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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