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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곁에 서있는 사람들 (요 19: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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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곁에 서있는 사람들 (요 19:23~27)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때부터 숨을 거두시기 전까지 있었던 일 두 가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진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도록 부탁하신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23절부터 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예수님 당시 일반적으로 죄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때는 완전히 발가벗겨서 십자가에 매달곤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병사들에게는 십자가에 처형된 자가 남긴 옷가지를 나누곤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전투는 승전한 군사들에게 있어서는 전리품을 챙겨 부를 취득하는 기회였듯이 십자가 처형은 그 일을 맡은 로마 병사들에게는 일종의 수입 잡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었다는 것은 옷 하나를 네 조각으로 찢어 나눈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옷을 망치는 일이고 아무에게도 쓸 모 없는 노릇이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깃”이란 여러 뜻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옷깃”입니다. 옷깃을 줄여서 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깃이란 “나누는 물건의 한 몫”을 말합니다. “분깃”이라 할 때의 깃입니다. 옷가지에는 보통 겉옷과 허리띠와 샌들과 얼굴가리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네 가지 품목을 놓고 한 가지씩을 나누어 가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해일 것입니다. 왜 네 깃으로 나누었는가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병사가 네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군대에서는 보통 여덟 명의 병사가 한 천막을 숙소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 여덟 명의 병사는 자연 전투조직의 최소 단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군대로 말하면 일개 분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투가 아닌 보초를 서거나 죄수를 처형하거나 하는 일들은 흔히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어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행12:4에도 보면 베드로가 잡혀 옥에 갇혔을 때 그를 지키는 일도 넷씩 네 패의 군인들에게 맡겨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도 네 명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말고 두 강도가 같이 십자가에 달렸으니까 최소한 열두 명의 군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전체 사형집행을 감독하는 한 명의 지휘관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옷가지는 네 명의 군인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속옷이 남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호지 않았다는 것은 헝겊을 여러 겹 겹치고 성기게 꿰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통으로 짰다는 말은 어깨부분서부터 아래 부분 끝자락까지 한 가닥의 실로 끊어지지 않게 짜서 만든 옷이라는 뜻입니다. 

직접 몸에 닿는 속옷은 그렇게 만든 것이 천 조각들을 겹치게 꿰매서 만든 옷보다 입기 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갖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옷을 넷으로 찢어 나누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인 속옷은 아무 짝에 쓸 데 없는 천 조각이나 실타래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병사들은 그 속옷은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갖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한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가지를 나누어 가지고 또 제비도 뽑는 행동을 지켜보며 시편 22편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흔히 메시야시편이라고 부르는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으셨듯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로 시작되고 있고, 예수님께서 당하신 조롱과 모진 매질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8에서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합니다. 

마27:38-44는 이렇게 전합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시22:12-14절에서는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합니다. 이 구절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그에게 잔인하고 가혹한 채찍질을 가하는 우악스런 로마 병사들을 실감나게 상기시킬 것입니다.

시22:15-17을 봅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하셨다고 쓰고 있으며(19:28), 군인들 중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전합니다(19:34). 시 22편에서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한 말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채찍질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면 더 생생하게 우리 가슴에 박혀올 것입니다. 

로마의 형벌로서의 채찍질에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푸스티가치오(fustigatio)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적 가벼운 죄를 범했을 때 엄한 경고와 함께 가하는 채찍질입니다.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18:33) 물으며 일차로 심문한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 하고서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려 예수님을 방면하기 위해서 그를 데려다가 채찍질하게 했을 때의 채찍질은 이 푸스티가치오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플라젤라치오(flagellatio)입니다. 이것은 보다 중죄인이게 행하는 채찍질입니다. 

셋째가 베르베라치오(verberatio)라는 채찍질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십자가 같은 다른 형벌에 처할 자들에게 가해지는 채찍질입니다. 어차피 죽을 몸이기 때문에 아주 혹독하게 가하는 채찍질입니다. 이 채찍질을 받는 사람은 벌거벗겨지고 기둥에 그 몸이 고정된 상태에서 여러 병사가 지칠 때까지 혹은 지휘관이 그치라 할 때까지 번갈아 계속해서 맞습니다. 

그때 사용되는 채찍의 끄트머리에는 뼛조각이나 납덩어리나 기타 금속이 달려있습니다. 채찍질이 가해질 때마다 이 단단한 물질들이 몸에 들어가 박히고 채찍을 잡아당길 때마다 살점이 뜯겨져 나옵니다. 이 채찍질이 끝나면 죄수의 몸은 여기저기 뼈가 드러나고 창자가 튀어나오기까지 합니다. “질그릇 조각 같이 되고 죽음의 진토 속에서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다는” 말은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런 매질을 한 후 그를 십자가에 매단 로마 병사들은 그의 옷가지를 나누며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시22:18에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대로였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바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약성경에 이미 주어진 예언대로 되어가는 일임을 목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사람이 이런 치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요한은 이것이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일이며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그 예언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인류구원사역이라고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때부터 숨을 거두실 때 사이에 있었던 두 번째 일을 생각해봅니다. 우선 25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네 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 세 명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마리아인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또 한 명의 여인은 예수님의 이모라고 합니다. 즉 어머니 마리아의 여동생입니다. 이 여인은 살로메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세배대의 두 아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이 자기의 이름으로 된 복음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라고만 쓴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어머니 이름까지도 명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형제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서들이 전하는 몇 가지 사실의 이해를 한층 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왜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최측근에 두고 계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즉 예수님의 이모님이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서 청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21) 했던 것도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또한 왜 특히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도록 부탁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26-27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에게는 요한을 가리키시며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는 당신의 어머니를 가리키시며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당신 사후에 당신 대신 보살펴달라는 당부의 말씀이었던 것은 명백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도 다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친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맡기지 않으시고 요한에게 부탁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때까지는 아직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요7:5의 기록과 그 형제들은 예수님의 처형 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었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 천주교에는 십자가에서 어머니와 마리아와 요한 각각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요한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요한을 돌보는 일을 당신의 어머니에게 맡기셨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요한으로 대표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모든 제자들이 마리아의 품 안에 위탁되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공동대속자라고 주장해온 그들의 교리 즉 마리아론을 고수하기 위한 것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주장이고 우스꽝스러운 억지 해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24절 끝에서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하며 25절로 넘어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있던 예수님의 어머니와 몇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는 데서 로마 병정들과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 사이의 대비를 부각시키려 한 요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예수님의 옷가지 나누기에만 정신이 팔린 로마병사들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과 개인적이고 따뜻한 인간애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극명한 대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주위에 모여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한쪽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며 알지도 못하고 바로 알려는 관심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저 그 예수님 때문에 일거리를 갖게 되었고 거기서 어떤 이득을 취하는 일에만 혈안이 된 자들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조용히 탄식하고 있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억누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조건 없고 순수한 사랑 때문에 그 험악하고 끔찍한 십자가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지막 말씀까지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는지 진지하게 묻고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사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그 십자가 그늘 아래 머물며 어떤 이득이나 챙기려고 줄당기기나 제비뽑기 하고 있는 자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명예를 얻기 바라고 세도 부리고 싶어 하고 싸움질해서 남 이기는 쾌감을 맛보려 하고 세상에서 누리는 권력을 교회 안에서도 누리려 하고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권력을 교회 안에서라도 누려보려 하는 것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곁에서 옷 나누며 제비뽑는 로마 병정들의 일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발가벗김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과 체면까지 다 내놓으신 주님이십니다. 그의 옷가지마저 남김없이 병사들에게 나뉘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다 버리신 주님이십니다. 험악한 채찍질을 당하시고 만신창이가 되시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신 주님이십니다. 자신을 온전히 다 비우시고 철저히 부인하시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 그대로를 먼저 몸소 실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를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 제자는 되려하지 않고 자기부인은커녕 양보란 눈곱만큼도 하기 싫어하며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몫을 챙기는 일에만 골몰하는 로마 병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자존심이나 명예심이나 악감정이나 복수심 같은 것도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걸린 십자가는 은혜의 십자가가 아니라 저주의 십자가가 될 뿐입니다. 주일마다 십자가 아래 모이는 우리가 로마 병정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 날마다 여기에 모이고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울기도 하며 탄식하기도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는 주님의 참 제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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