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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눅 20: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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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눅 20:19~40)


'궤변'이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구변' 혹은 '상대방의 사고를 혼란시키거나 판단을 흐리게 하여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며 대는 논법'을 가리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의 철학자 소피스트들이 바로 이런 논법을 사용하기를 즐겨했고, 그래서 이들을 '궤변론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은 진리로 인정받고 있는 문제들을 주로 '역설'이나 '딜레마'를 이용하여 공격함으로써 마치 '진리는 무용하고 불확실한 것'처럼 몰아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저 유명한 '제논의 역설'이 있습니다.
그는 "아킬레스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논증하기를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조금 더 앞에 있는 지점에서 둘이 동시에 출발을 하면 아킬레스가 그 거북이가 있던 지점에 도착했을 때에 거북이는 조금이라도 더 앞에 가 있다. 그리고 아킬레스가 그 거북이가 조금 더 앞에 가 있던 지점까지 따라가면 거북이는 또 조금이라도 더 앞에 가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역설은 그 결론이 틀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논증에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인 지식이 깊은 사람은 이러한 역설 속에 들어 있는 '잘못된 전제들과 가정, 비합리적인 논증'들을 찾아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궤변에 쉽게 속아 넘어가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도 바로 이런 궤변론자들이 있습니다.
즉 우리 기독신자들이 믿는 신앙 진리와 따르는 생활 원리에도 마치 엄청난 모순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엉터리 논리로써 공격해 오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처럼 도전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같은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궤변론자들이 자기네 딴에는 아주 복잡한 '딜레마'요 풀 길이 없는 '역설'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들을 예수님 앞에 제기하면서 논박해 왔던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런 궤변이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전지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따위의 얄팍한 논리에 당황하시거나 말문이 막히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 예수님의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도전해 오는 사단의 궤변들을 어떻게 파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은 '세상의 사회생활'과 결코 상반되지 않습니다. 

19절부터 26절에 "19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24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그 비유가 바로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알아챘습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 사회에서 상류계급층을 형성하면서 로마 제국의 비호 아래 특권적인 생활을 향유하고 있던 이들은, 예수님이 백성들로부터 점점 더 인기를 얻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민중혁명이라도 일으키게 되면 로마군이 개입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네들이 누리고 있는 안정되고 부유한 삶이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당장 체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노련한 정치꾼들답게 예수님을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즉 로마의 법에 걸려들도록 하기 위하여 권모술수를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정탐" 즉 자기네들의 앞잡이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즉 무슨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선한 의도에서 찾아온 척하면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책잡으려고" 올무를 던져 왔던 것이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질문하기에 앞서 예수님을 가리켜 '바른 말씀만 하시고, 사람을 겉으로만 보지 않으시며, 오직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이시라는 둥, 온갖 침 발린 칭찬들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네들이 원래 준비해 왔던 진짜 질문,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올무의 질문'을 예수님께 던졌던 것입니다.
"가이사"란 당시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였으며 "세"는 그 로마제국 산하에 있는 정복민들에게 부과되었던 인두세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하니이까"라는 말은, 로마법을 따져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옳은 일입니까?'라는 의미였습니다.
세금을 내는 것이 개인적으로 좋든지 싫든지 간에 로마법을 따져서 말할 때에는 그것이 필수의무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앞잡이들은 '그 납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 따져 볼 때 합법적인가 아닌가?'라고 매우 교묘하게 물어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일종의 딜레마를 함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하다'라고 대답하시면, 당시 이 세금 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혐오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당장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들고 일어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불가하다'고 대답하시면, 그것은 곧 로마법과 로마 황제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 행위가 되며, 결과적으로 원래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예수님을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일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간계"를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데나리온'이란 로마의 동전으로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낼 때에 반드시 사용하도록 정해져 있던 화폐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전에 "누구의 화상과 글이 있느냐"고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가이사 디베료의 얼굴과 함께 앞면에는 '존엄한 신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글이, 그리고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대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로마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는 이 세상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하늘나라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의무가 동시에 부여되어 있는 원칙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어쨌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종교의 자유를 누리도록 허용하고 있던 로마 정부의 관할 아래 있는 한, 그리고 그 정부의 법과 권력의 보호 아래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한, 국민으로서의 기본의무는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 역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굴복하라"고 이 땅의 주권자들에 대하여 복종해야 할 시민으로서의 의무가 기독신자에게도 역시 있음을 천명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가이사에 대한 의무'보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이사에 대한 의무가 상반되고 방해 요소가 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후자를 제쳐 놓고서라도 전자는 꼭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양자가 근본적으로 서로 상반되고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밝혀 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쪽으로 대답하시더라도 궁지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완벽한 함정에 빠뜨렸다고 기대하고 있던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이 명료하고도 완벽한 말씀 앞에 아무 것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서기관과 대제사장'의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를 너무 열심히 믿으면 내 인생의 자유를 잃는다.' - 많은 청년들이 이런 사단의 궤변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주중의 예배나 기도회나 성경공부에까지 열심히 참석하다 보면 이 사회에서 '젊은이의 특권적인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봉사나 헌금생활은 결혼을 하고 사회적인 기반을 완전히 갖춘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지만'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내 청춘은 그야말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고 즐겨야만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열심히 하면 가정이 망한다.' - 얼마나 많은 '신앙 약한 배우자'들이 이런 사단의 궤변에 넘어가고 있습니까?
주일성수 제대로 하다 보면 가족들끼리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지고, 아내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는 것만 해도 가계가 흔들리는데 무슨 특별헌금까지 바치면 정말 집안 망할 꼴이 훤히 내다보인다고 생각하면서 핍박하는 남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고등학교 입학하면 그때부터 만사 제쳐 놓고 대학입시 준비에만 몰두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식이 중학교만 졸업하면 아예 주일예배에도 참석시키지 않고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이, 명색이 교회의 집사요 권사라는 사람들 중에조차 심심치 않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사단의 궤변'에 놀아나고 있는 어리석은 자인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생활'을 하려다 보면 '사회생활'에서 뒤지게 된다고, 손해를 보게 된다고, 망하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기독신자의 '사고를 혼란시키고 판단을 흐리게 하여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며 대는' 사단의 교묘한 꾐수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런 '간계'를 이처럼 명쾌하게 타파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시간과 물질과 힘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할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과 결코 상반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속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무를 지키고 가사나 학업을 열심히 수행하는 것과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정말 신실한 기독신자는 이 양자를 동시에 잘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둘 다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다고 일깨워 주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꼭 깨닫고 순종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사람의 이성적 사고'와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27절 이하 40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27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37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40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사두개인"이란 앞의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역시 마찬가지로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의 상류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무리였습니다.
  
이들은 귀족적이고 세속적이며 정치적으로는 로마 정부와 가까운 보수파였고 종교적으로는 '부활과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번에는 신학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수혼법'이라는 제도를 인용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부활의 모순성'을 증명해 내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결혼한 후 자식 없이 죽으면 그 형의 이름으로 대를 잇기 위하여 그 동생이 자기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도록 하는 것이 바로 '수혼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당시 유대 사회에서 거의 실행되지는 않고 있었지만
  
여기서 사두개인들은 단순히 학술적인 논쟁거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수혼법에 의하여 일곱 명의 형제가 다 한 여자를 각각 한 번씩 자기 아내로 취하였다면 나중에 부활한 이후에는 도대체 누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겠느냐고 그들은 질문해 왔습니다.
  
이것은 역설의 일종이었습니다.
그 사두개인들의 저의는, 부활이 만일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런 곤란한 상황들이 끝없이 연출될 것이니 결국 부활이란 것은 자체 내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서 참된 진리일 수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가고자 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일견 대답하기 난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질문을 받으시고도 예수님께서는 즉석에서 명쾌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즉 사람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에서 부활한 사람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부활 이후의 세계는 이 세상의 혈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영생이란 것을 그저 '이 세상의 삶이 그대로 영원히 연장되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부활한 사람은 "천사와 동등한" 영적 세계에서 살게 될 뿐 아니라 그보다도 또 한 단계 더 높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가지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승격될 것이라고 깨우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그런 억측은 바로 성경 말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까닭에 나온 것이라고 정곡을 찔러 지적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에 대하여 "모세의 글"은 어떤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그 '부활'을 분명히 "보여 준" 즉 증거해 주는 말씀이라고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죽고 부활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셨을 것인데, "나는 지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결론적으로 그들은 그 당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지 않느냐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논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부활의 실존성과 확실성'이 증명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원래 사두개인들과 같은 통속인 "서기관들 중에 어떤 이들"조차 "선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 딴에는 상당히 논리적으로 성경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찾아 왔던 자들이, 그들의 궤변 속에 들어 있는 불신앙과 허구와 무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완전히 KO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어 보지도"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이모저모로 성경 말씀을 의심하면서 공박해 옵니다.
과학적인 증거가, 수학적인 수치가, 철학적인 논리가, 경험적인 상식이, 성경에 기록된 사실의 모순성을 지적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아주 큰소리를 치면서 덤벼들 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늪지' 같은 곳을 통과한 것을 과장한 것이라고 자기네들 딴에는 아주 합리적인 '가설'을 내세웁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라고 부정하면서,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온 도시락을 서로 곁의 사람들과 조금씩 나누어 먹은 일을 두고 나중에 소문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점점 더 부풀려져서 결국 기적처럼 되어 버린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두개인'들은 바로 그런 궤변들을 동원하여 '이런 현대사회에서 그처럼 구식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라고 교인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면서 '자존하시는 절대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 대신에 '종교의 차이를 초월하여 인간의 양심으로써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신' 따위의 인본주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냅니다.

'정확무오하면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서의 성경'을 비웃으면서 그 대신에 '현대과학과 합리주의의 검증을 통과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만을 성경에서 뽑아내려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가 사람의 지식이라는 칼 앞에서 난도질당할 수밖에 없는 허황된 비진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이 시대의 궤변가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도전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 진리'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이성적 판단이라는 것이 그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당장 드러내십니다.
아무리 사람이 더 똑똑해지고 아무리 인간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신앙의 세계가 사람의 이성적 사고에 의하여 모순으로 증명되는 일이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가 "십자가의 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오직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만 "하나님의 지혜"로 깨달아지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18-25).
  
다시 말해서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모순처럼 여기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신앙으로 완전타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은 물론 그 이성이라는 것도 이미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제 딴에는 '합리주의'라는 것을 동원해서 판단하더라도 성경의 말씀은 다 '어리석은 오류'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그 사람의 본성에 '이성'이라는 것을 넣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와 불신앙으로 오염되지 아니하고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작동되는 바른 이성은 곧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게 만들어 줍니다.
  
신앙을 통하여 원래 창조 시에 받았던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된 이성은 그야말로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속속들이 바로 깨닫게 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진리의 말씀과 그 기적의 능력을 믿는 신앙은 사람이 받은 이성을 활용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참된 지식을 쌓는 지적 활동과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믿음'으로써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깨닫는 온전한 영지(靈智)를 발휘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이성에 모순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 육신 생활에 거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하는 궤변가들이 이 세상 사회뿐 아니라 교회 안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순전히 사단이 만들어 낸 '딜레마'와 '역설'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런 얼토당토않은 궤변에 그토록 쉽게 말려드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가리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정확히 지적해 주셨습니다. 

아무 모순될 것도 딜레머라 할 것도 없고 도무지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궤변 앞에서 '정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구나.'라고 쉽게 미혹당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바로 여기에 진짜 이유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성경 말씀과 교회생활에 대하여 이러저리 따져들고 있는 이유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풀기에 난해하고 판단하기 복잡한 문제가 신앙생활에 실제로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바로 자신의 '불신앙'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 이것 하나만 확실히 믿고 있다면 도대체 복잡할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계시해 주신다.' - 이것만 확실히 붙잡으면 도대체 풀지 못할 신앙생활의 난제란 것이 무엇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 가진 바 지혜로 명성이 높았던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그리고 반면에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고 성령께서 감동시켜 주신 말씀을 남겼던 것입니다. 
하나님 살아 계심을 두려운 마음으로 믿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두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인격적 작용입니다.
  
아무리 상식이 많고 공부를 잘하고 학위가 높아도 성경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면 그는 가장 미련한 자가 될 뿐인 것입니다.

기독신자의 신앙은 결코 인간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섬기며 사는 생활은 결코 이 세상을 사는 사회생활에 '거치는 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말과 생각들은 '내가 곧 진리요'라고 선언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다시는 감히 더 물을 것도 없는' 헛된 궤변일 뿐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선포하신 말씀만을 듣는 이 참된 지혜를 통하여 자신의 순전한 신앙과 충성된 행실을 끝까지 지키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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