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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리는 사람들 (눅 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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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들 (눅 19:11~27)


초등학교 시절 저는 영등포역에서 인천 가는 경인대로변의 3층집에서 살았습니다. 2층에 미장원이 있었는데, 미장원 누나들이 불러서 미장원에서 놀 때가 많았습니다. 그 덕택에 1960년 로마 올림픽과 1964년 동경 올림픽을 연속으로 제패한 위대한 마라톤 선수인 에디오피아의 아베베가 맨 발로 달리는 것을 내려다보기도 했습니다. 그 때 1층, 2층, 3층은 모두 세를 주고, 우리 식구는 안채에 살았는데 어머니는 교회 일로 늘 바빴습니다. 어머니는 길가 집이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많이 온다고 하면서 방문을 잠그곤 했습니다. 실제로 도둑이 자주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잃어버린다고 열쇠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열쇠가 없는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툇마루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툇마루에서 숙제를 하고, 잠도 잤습니다. 그 때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오셨는데, 혼자 공부도 잘한다고 하면서 먹을 것을 사 주기도 했는데, 그 후 늘 저를 칭찬했습니다. 그 칭찬이 발전해서 나중에는 저를 사위 삼겠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결혼하기 원하면 툇마루에서 공부하십시오. 저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어둑해질 무렵 어머니가 맛있는 반찬거리를 사 가지고 오시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젠 역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저를 기다립니다. 제 전화를 기다립니다. 어쩌다 서울이라도 가게 되면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손자와 손녀를 기다립니다. 일전에 제 딸이 서울에 갔는데, 아버님이 지하철까지 나가서 기다리신다고 서로 길이 엇갈려 찾느라고 애를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기다림 그 자체입니다. 아이는 엄마를 기다립니다. 엄마도 학교에 간 자녀를 기다립니다. 늙어서는 자식이 오길 기다립니다. 모든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가게 주인은 손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대상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원서를 넣은 사람은 합격 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런가 하면 씨를 파종한 농부는 추수 때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가뭄 때는 비가 오길 기다립니다. 

인생이 기다림이라는 것은 그만큼 외롭고 힘들다는 반증입니다. 현재의 삶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면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의 삶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처절한 상태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기다림의 끝은 무엇일까요? 가장 불행한 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경우입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 발길을 돌릴 때의 그 축 늘어진 뒷모습처럼 쓸쓸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의 허무함을 잘 그려낸 희곡 작품이 있습니다. 

1952년에 나온 아일랜드 태생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것입니다. 이 작품은 2차 세계 대전 후의 황폐해진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데, 최초의 부조리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막의 내용을 보면 해질 무렵 어느 시골길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란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이들은 기다리는 동안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얼마 후 <포조>라는 사람이 노예인 <럭키>를 데리고 와서 두서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떠납니다. 그리고 심부름하는 양치기 소년이 와서 <고도는 내일 온다>고 알려 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계속 기다립니다. 

2막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이 되풀이됩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기다리고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연극은 끝이 납니다. 여기서 심각한 것은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오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리면서 애를 태우는 모습을 통하여 현대인의 불안과 허무를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 고도가 누구일까요? 사람마다 기다리는 고도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그 고도가 왔습니까?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지도 않을 대상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예가 누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시므온>이란 경건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반드시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라는 성령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탄생하신 주님께서 그가 기도하던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누가복음 2장 27절 이하에서 길게 말씀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할렐루야!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다림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결코 우리를 기다리다 돌아서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그 모습을 하박국서 2장 1-2절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박국은 기다렸고,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의 내용은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은 억누르던 영혼의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기쁨과 찬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 반드시 선하신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기다리면서 살 듯이 목사인 저도 많은 것을 기다립니다. 아들이 학기를 마치고 집에 오길 기다립니다. 딸 아이의 합격 소식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은총이 교우들에게 풍성하게 임해서 어려운 교우들의 삶의 그늘에 빛이 비치고, 그 얼굴에서 환한 웃음꽃이 피길 기다립니다. 사업을 시작한 분이 잘 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오길 기다립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했다는 소식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으로 화해했다는 소식을 기다립니다.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고 성장하여 이 지역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때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역을 마치고 은퇴하는 날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때를 기다립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이것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같이 기다려야 할 궁극적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합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개정된 사도신경에는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천사들이 한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시므온이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도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우리도 기다리는 사람인데, 그 기다림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것은 시므온이 처음 오실 메시아를 기다린 반면,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림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 세상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다음 세상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천국도, 지옥도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이 목표라면 교회에 올 시간에 기술을 하나 더 배우고, 영어 단어 하나 더 배우고, 친구를 한 사람 더 사귀고 즐기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의 지옥이 주어질 것입니다.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오늘 이 세상에서 잘 준비하여, 장래의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천국의 백성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다시 오십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을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 세상은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 화려한 모든 문명은 무너질 것입니다. 왕후장상의 모든 자랑거리가 빛을 잃을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사는 동안에 주님이 오시지 않아도 걱정 없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이 오시든지, 우리가 부름 받아 가든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은 <주님을 만날 때를 기다리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때를 기다라는 사람,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잘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날 때를 기다리다가 반드시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시길 기원합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우선 우리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방향성을 가집니다.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엄마는 아들이 올 방향을 쳐다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님께로 고개를 돌립니다. 

또 기다림은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아들을 기다리면서 길거리 약장사에게 정신을 팔고 있다면 아이가 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아이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기다리면서 세상의 부정한 욕망이나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만 우러러야 합니다. 그게 방향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거룩함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모든 사람이 잘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에는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이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첫째는 지루함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루합니다. 어서 빨리 뭔가 이루어지길 기다립니다. 어서 빨리 오길 기다립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참지 못하면 중간에 돌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렇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오셨으니, 금방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기만 하면, 자신들의 고생도 끝이 나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보람이 있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읽은 <열 므나의 비유>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떠나면서 종들에게 므나를 남겨주고 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귀인이 왕이 되어 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때까지 종들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쳤습니다. 참된 구원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바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후에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오랜 세월 후에 재림하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무엇인가를 추구할 때 그 일이 즉시 즉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아기를 낳아 그 다음날 대학생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란 평생 농사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 등록하고 오늘 바로 성숙한 신자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모든 기도가 즉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빗나간 아들 어거스틴이 돌아오길 그 어머니 모니카는 수십 년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교회가 좋은 교회로 부흥하고 비전을 이루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잘 기다리십시오. 인내하십시오.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조급해 하면 중간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주님은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두 번째 기다림의 위기는 기다림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의 여류 시인인 노천명 님의 <사슴>이란 유명한 시를 아시지요? 참 슬픈 시입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 슬픈 모가지를 하고 /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이 시는 가만히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또 먼 산을 바라보는 사슴을 통하여 조용하고 슬픈 동양적 기다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그런 조용한 슬픔이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정지 상태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고도를 기다리며>에 보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사람이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중에 할 일을 발견합니다. 2막에 보면 포조가 눈이 멀어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도와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 때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그를 도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블라디미르가 말합니다. <포조가 지금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이런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게 아니다. 지금 포조가 도와 달라는 것은 우리에게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인데, 지금 이 자리에는 우리 둘밖에 없으니, 더 늦기 전에 그들 도와야 한다. 우리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한 번만이라도 인간답게 온 인류의 대표가 되어 그를 도와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다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무언가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기다리고 있는 그 분이 기뻐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귀인이 종들에게 하나씩 므나를 나눠주고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13절을 보세요.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 후 종들에게는 기다리는 동안에 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런 내용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같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장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본문은 귀인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부름을 받아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가 죽는 그 날까지>입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면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장사는 무엇일까요? 복음을 파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게 성도의 사명이요, 교회의 사명입니다.

주인은 돌아온 후에 장사를 잘 한 종들에게 치하를 합니다. 17절을 보세요.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충성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들이 이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받은 므나를 땅에 파묻어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노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기다림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혹은 대강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탄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기다림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기다림은 무기력함과 다릅니다. 기다림은 소극적 대망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가장 적극적 행동입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신랑은 얼굴 화장을 하고, 몸단장을 하고,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고 신랑을 기다립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모든 일을 충성스럽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조용하게 있으면 안 됩니다. 날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펼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사역은 종말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위한 사역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백성으로, 주님 만날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언젠가 주님을 만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복된 기다림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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