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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갈 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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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갈 5:22~24)

     
11월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11개월을 눈 깜짝할 사이에 뒤로 보내고 이제 달랑 한 장만 남은 12월 달력을 앞에 두고 내년 2009년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지나온 한 해를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요?   힘들고 한숨 짓던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기쁘고 감사할 일 역시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을 또 헤아리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시간으로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돌아온 발자취를 회상하면서 주 안에서 지나온 금년 한 해 동안 나의 삶에 어떤 열매가 맺혔을까 살펴보는 것 또한 소홀히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육체에 매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삶의 모습들과 하나님의 영, 성령을 따라 살면서 주 안에서 맺혀가는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여 보았습니다. 백두산 정상 천지에 담긴 물이 호수를 벗어나 물길을 따라 강으로 흐르게 되는데 그 물방울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따르느냐 따라 두만강으로 흘러 동해의 물이 되기도 하고 압록강으로 흘러 서해의 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의 길이 있고 의인의 길이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삶이 있고 성령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육체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본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라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함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였을 때 나의 옛 사람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나의 죄가 거기 달려 죽임을 당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설명한 말처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나의 죄악 된 본성이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흉악한 죄수의 모습처럼 그렇게 추악하고 처참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내가 나의 죄를 거기 못 박은 이후로 다시는 그 추한 죄의 모습과 그 삶을 아쉬워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그 고통의 십자가 형틀에서 완전히 죽어 숨이 멎을 때까지 거기 버려두기로 한다는 단호한 결별선언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던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은 이제 다시 그리워하지 않을뿐더러 또 다시 반복하는 습관을 버리고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변화된 새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열매라고 할 수 없는 어두움의 일들은 잊어버리고 생명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생명이 있는 좋은 나무는 거기에서 좋은 열매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열매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처럼 아름다운 생활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주일 이 열매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된 사랑을 말씀드렸습니다.   아홉 가지의 요소들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째 그룹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맺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사랑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드러나는 가장 우선되고 으뜸이 되는 요소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열매 없는 육체의 욕망에 끌려 살지 않도록 사랑으로 부르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사랑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에 기초한 일이 아니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소중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희락 즉 기쁨이 따라나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라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뿐 아니라 사랑 받는 사람이 누리는 기쁨이 내 속에서 우러나옵니다. 사랑을 받는데 기쁨이 없다면 그것처럼 모순은 없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기쁨은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발산입니다.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육체의 일들을 살펴보십시오. 요란하고 어두운 세상이 손짓하는 온갖 험악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것 같지만 사실은 두려움과 죄책감 같은 썩어질 쾌락일 뿐 기쁨은 아닙니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거기에 생명을 주는 기쁨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내가 경험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 삶의 의미를 선물하고 주 안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지 고백하며 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자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하고 권하였습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은 또한 화평을 만들어냅니다. 이 화평은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전에는 죄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서먹한 관계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원수 지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과 단절된 평화를 만들어갈 능력도 방법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그 평화를 회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보내어주셨고 죄로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심으로 다시금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 평화를 맛보며 이 평화를 이웃과 나누는 특권 또한 가지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469장의 가사처럼,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이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 고 하신 주님의 평안, 그 평화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늘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맺는 성령의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이라는 요소들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든든하면 세상의 어떤 위협과 환란이 찾아와도 쉽게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표징은 오래 참음입니다.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사람들의 공격적 태도와 비난과 모함 등 갖은 비바람이 불어 닥칠 때 오래 참는 여유를 보입니다.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화를 아는 사람으로서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가볍게 반응하고 버럭 성을 내고 소리지르며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오래 참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저 화를 낼 줄 모르는 바보라기 보다는 내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 기쁨을 가진 넉넉함에서 나오는 여유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심의 본을 보이신 것처럼 그를 닮아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대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기 바랍니다. 

자비와 양선은 따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같은 범주에 묶어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자비는 이웃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면 어떨까요?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함께 느끼며 위로를 나눌 줄 아는 긍휼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마음만 아니라 친절이라는 실제적인 행동이 따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비심을 가지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양선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양선이란 착함이라는 뜻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 선한 마음을 실제적으로 나누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봉사와 섬김의 모습이 드러나고 이 선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증거됩니다. 자비와 양선 이처럼 신선하고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삶의 요소들이 우리에게서 풍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마지막 그룹은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향해 드러내는 요소들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으로 살도록 편안하게 두지 않고 끊임 없이 유혹하고 겁을 주며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부추깁니다.  이때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인도함을 받는 우리 속에 서서히 자라가는 것이 있으니 바로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떤 번역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신뢰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언제나 붙드시고 마지막 승리의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자신을 굳게 지키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육체를 못 박아버리고 세상의 유혹과 거짓된 삶에 맞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싸움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싸움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충성스런 자세를 견고히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든든한 신뢰감을 가지는 자세가 성령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온유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이라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이 온유함이 자연스럽지 않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라고 하면서 옛날에 부리던 고약한 성질 하나 제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오래 참음을 이야기 했지만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고 하면서 이웃에 대하여 오래 참는 법도 없고 자신에 대하여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는 기본적 훈련도 안 되었다면 무엇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라고 자신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 (마11:29) 하셨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고 줏대가 없는 무골호인 같은 바보스러움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죄와 불의에 대하여는 단호한 분이시지만 힘 없고 연약한 자들에 대하여는 한 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셨던 것처럼 불의에 대하여는 강직하게 대항하지만 진리와 사랑에 대하여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우리에게 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절제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하여 절제로 마치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아무리 많고 좋은 것을 가졌을지라도 절제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게 합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버린 후에도 아직 본성적인 욕구에 끌려 다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사람이라고 자칭하면서 남들이 보기에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때 모든 일에 절제하는 법을 배우는 훈련이 중요합니다.   과유불급이라고 합니다.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옛말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절제하는 법은 스스로 훈련해야 되는 모든 사람의 숙제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에서도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절제하지 못할 정도로 스포츠에 몰입하는 것은 정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건강을 위하는 것이 나중에는 일상 생활의 균형을 깨뜨리고 정작 중요한 일은 뒷전으로 두고 날마다 운동만 일삼으면 아예 직업을 프로 선수로 전향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지나친 쇼핑에 중독이 되고 알코올에 중독되며 먹는 것과 외모 가꾸기와 겉치장과 자기를 과시하는 일에도 절제하지 못합니다.   자기 절제가 없는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일 수 없고 결국 추함으로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에도 자기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성령의 운동이 펄펄 끓는데 억지로 끌어내려 냉랭한 신자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된 또 다른 요소들과 함께 균형이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펄펄 끓는데 오래 참지 못한다거나, 자비와 양선은 넘치는데 기쁨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순입니까?   이처럼 내 안에서 열매로 맺혀 자라가는 나의 생활이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건강하고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사람인가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9가지는 따로따로 분리된 열매로 이해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내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고 있는 열매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모양과 크기는 다르지만 한 가지 열매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듯 성령의 나무에 성령의 열매가 열립니다.  그 나무는 곧 나 자신이며 거기 열리는 열매는 앞에서 말한 아홉 가지의 성분을 고르게 갖춘 건강한 열매라고 보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좋아하는 사과 열매 속에는 다양한 성분과 영양분들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로 연합하여 사과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제가 사과 박사가 아니라 사과에 포함된 성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지만 누군가 쓴 글 일부를 참고하였습니다. 

“유럽에서는 하루에 사과를 한 개씩만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사과는 건강한 몸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과일입니다. 추운 지방에서 생산된 사과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혈액순환과 장기능을 좋게 해준다고 합니다.  병문안 갈 때 사과를 들고 가는 이유가 거기 있는가 봅니다. 특히 음식을 짜게 먹는 사람은 사과를 많이 먹는 것이 좋다는데요, 염분 과다섭취가 고혈압 또는 뇌졸증의 원인이 되지만 사과 속에 있는 칼륨이 체내에 있는 과잉 공급된 염분을 배출하는 효과가 있어 그 예방에 매우 효과가 높답니다. 또한 근육을 만드는 기능도 있으므로 성인은 물론 발육기의 어린이에게도 사과를 항상 먹이는 것이 좋답니다.  그리고 사과에 함유된 있는 헤모글로빈은 혈액순환을 높이는 작용이 있어 혈색이 좋은 예쁜 뺨, 사과 같은 뺨을 만드는 기능을 해준다고 하니 예쁜 뺨을 원하는 여성들은 필히 사과를 즐겨 먹어야겠습니다. 그 외에 비타민 A와 C도 함유하고 있어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성분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과 한 알을 이루듯 성령의 열매 속에도 다양한 성분이 있으니 곧 위의 아홉 가지 성분들입니다. 이것들이 서로 고르게 연합하여 건강한 성령의 열매가 되게 합니다.   어느 한 가지가 부족하고 과다할 수 있지만 그 열매가 매일매일 자라면서 균형을 이루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래 나의 나무는 마치 돌 감람나무처럼 내 스스로 좋은 열매 맺기에 합당한 좋은 나무가 못되었지만 참 감람나무이신 예수께 접붙임을 받아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그렇다면 나는 그분 안에 꼭 붙어 있는 사람입니까?   그래야 그분 안에서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내 안에서 성령의 열매가 열리기까지 처음에는 복음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싹이 나고 꽃이 피며 거기에 열매의 모양이 생기고 드디어 성숙한 열매로 자랍니다. 그래서 너무 성급하게 완숙한 열매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고 신혼 다음 날 아침 애를 낳으라고 재촉하는 시부모처럼 성미 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회심하는 것이 새로운 출생이라면 그 전에 먼저 복음의 씨앗이 그 사람 속에서 잉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태중에서 10달이 차도록 자라며 기다리듯 성령의 사람으로 태어남도 기다림의 시간이 있습니다. 잉태한 오늘 당장 태어나라고 재촉한다고 해서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잘못되면 미숙아, 조산아가 되어 인큐베이터 속으로 넣어 또 다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아기가 이제 막 출생하였는데 왜 빨리 걷지 못하고 글도 못 읽느냐, 엄마 아빠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할 줄 모르느냐 언제 사람 노릇을 할거냐고 보채는 부모가 있다면 이것도 참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부모가 서두른다고 아기가 갑자기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씨가 있어야 싹이 나고 싹이 터야 줄기가 나오고 꽃이 펴야 열매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열매도 시간이 흘러야 제대로 된 열매로 자랍니다. 

신앙성장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신앙 성장의 속도가 다를 수 있지만 그 과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미숙한 열매입니다. 떫고 맛이 지린 풋내 나는 열매일 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은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하였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던 무화과 나무처럼 아직 열매가 없는데 뭔가 있는 척 사람들 앞에 가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철이 아닌데 열매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착각하고 오해하도록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속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비로소 열매의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앗을 뿌린 후 새싹이 나고 날마다 자라는 광경을 보면서 벌써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꽃이 피면 열매를 기대하고 기쁨이 더하다가 드디어 열매가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면서 상품가치가 있는 성숙한 열매가 됩니다. 여름의 땡볕과 모진 비바람도 견뎌내야 합니다. 가을의 추수 때 농부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합니까? 기쁨의 극치는 바로 완성된 열매를 얻을 때입니다. 그때까지 농부는 오래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열매도 이렇게 주 안에서 자라갑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자라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훨씬 더 성숙될 것을 기대합니다. 언제까지요?  죽는 날까지입니다. 주 앞에 서는 그날까지 성령의 열매가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서두르지도 조급해하지도 맙시다.  내 기준, 내 생각만 가지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무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르지 맙시다. 우리 주께서도 나를 그렇게 오래 참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오직 원둥치인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어 날마다 그 생명을 공급받고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아름답게 열매 맺어가기 바랍니다.   

지금 나의 나무에 맺혀가고 있는 열매에 어떤 성분이 결핍되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사랑이 부족한지 아니면 오래 참음이 결핍되었는지 혹시 절제가 부족하지는 않는지 살펴봅시다. 내 육체를 그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인답게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에 순종하며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로부터 성숙한 열매를 원하시는 농부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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