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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중에 발견한 은혜 (시 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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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중에 발견한 은혜 (시 121:1~6)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한 해가 벌써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온 나라가 경제 한파와 예년에 없던 강추위로 움츠려서 체감온도는 곱절이 되어 온 나라를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떨고 있습니다. 미래가 지극히 불투명합니다. 

오늘을 가리켜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빼놓고는 모두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과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추위와 더위와 한파와 고난과 무섭게 변화하는 기류가 상존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인도하셨고 섭리하셨고 운행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 시편 121편은 작자미상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순례자 중 한사람이 순례길을 지켜주심을 감사해서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잠깐 동안의 순례의 길에서 느낀 감동 차원이 아닌 그 이상입니다. 그래서 다음의 해석에 무게가 실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쓴 시라는 것입니다. 

본 시편의 내용을 보면 후자의 해석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갑니다. BC 598년에 1차로, 587년에 2차로, 582년에 3차로 잡혀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70여 년 동안 그들은 피눈물 나는 포로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BC 538년에 해방령이 떨어져 모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갈 때 고국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희망은 전무했습니다. 미래가 암담하고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포로 중 일부는 바벨론에서 현지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정착하여 바벨론 우상을 섬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지 않고 언젠가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미정착자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고난의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시 137편을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어느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여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그들에게 어느 날 해방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기쁨으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꿈만 같은 일입니다. 시 126편을 보면 “그때 우리는 꿈꾸는 같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8•15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15때 우리나라도 광복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어느 독립운동가는 해방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8•15 광복절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70여년 만에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하여 오는 동안 저 멀리 시온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그 감회가 얼마나 강렬했겠습니까. 고속도로를 달리다 충청도 간판이 보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그리고 고향에 가까이 가서 고향의 뒷동산이 눈에 들어오면 또 감정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70여년 만에 고국에 돌아오는 길에 멀리 예루살렘 성이 보이고 그 성을 둘러싸고 있는 시온산이 보일 때 백성들은 감격했을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생활을 통해서 몇 가지 재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시온산 재발견 

이 귀환자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왔을 때 눈앞에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고 말합니다. 그 산은 “시온산”입니다. 시온산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고 장차 메시야가 도래할 산이며 메시야가 재림하실 산이기도 합니다. 이 산을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오늘 그 산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흥분했을 것입니다. 떨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물로 그 산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 때의 감회를 무슨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시온산”이나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어느 재미교포는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지금 나이가 칠순을 넘겼으니 그 정도면 이제는 미국사람이 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해가 갈수록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더 진해진다고 합니다. 정원에 심겨진 나무도 자동차도 보기도 싫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년 한차례씩 고국에 돌아와 공기를 마시고 가야 비로소 1년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내 나라는 좋든 싫든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의 고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저녁이면 누구든지 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도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한사코 고향에 가려고 애를 쓰고 죽어서도 고향에 묻히고 싶어 합니다. 성전도 마음의 고향입니다. 영적인 고향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몸이 아플 때마다 성전을 찾아가게 됩니다. 

어느 중풍병자는 수년 동안 자리에 누워 살아가다가 한숨을 쉬며 “단 한번만이라도 내 발로 걸어서 성전에 찾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성전이 곧 마음과 영혼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고향을 떠나 70여 년간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포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그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이 백성들이 아주 소중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들은 그 마음을 가지고 오늘 귀환하는 길에서 마침내 멀리 보이는 시온산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개무량했겠습니까. 그래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그들은 시온산의 존재에 대해서 재발견을 한 것입니다. 


도우심 발견 

그들은 돌아오는 동안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귀환은 있을 수 없는데 우리는 지금 분명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어떻게 이 귀환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같이 이 귀환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된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출애굽한 것도, 여리고 성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것도, 광야 40년의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였습니다.  오늘 귀국하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100% 하나님의 은혜였고 돌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2).” 

그 백성들은 비로소 오늘 하나님을 재발견했습니다. 죄를 지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잊고 무시하며 살아갈 때 선지자들을 통해서 돌아오라고 그렇게 촉구해도 거부하던 백성들이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포로로 잡혀가 오랫동안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고국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 어떤 가능성도 희망도 전무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70여 년 동안을 피눈물을 흘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꿈같이 귀환하여 이제 멀리 예루살렘과 시온산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들은 비로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받아보아야 잃은 것을 되찾게 되고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님의 소중함을 생존 시에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불효도 합니다. 무시하기도 합니다. 건강이 소중하지만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만용하기도 하고 학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소중함도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별소리를 다 하고 잊고 우상도 섬깁니다. 그런데 그 소중함을 알고 진가를 알려면 포로생활을 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탕자가 되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 후로는 시온산을 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게 되고 감격할 수 있게 됩니다. 

엊그제 어느 신문을 보니까 이제 미국교회는 의자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민들이 9•11 테러가 일어나고 나서 교회마다 줄지어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갑자기 의자 준비를 하느라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다가 위기의식이 사라지자 교회가 다시 썰렁했는데 이제 다시 위기가 찾아왔으니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해 보아야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잊고 살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잊을 만하면 고난을 주십니다. 시편의 시인은 “내가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119:71)”고 고백하였습니다. 고난 때의 때가 은혜를 체험하는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때입니다. 


보호하심 발견 

이 백성들이 70여 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고 그동안의 삶을 회고할 때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그동안 별 위험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고난도 수난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다가 그들은 오늘 마침내 모든 풍상을 다 경험하고 무사히 귀국행렬에 끼어 귀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지금 이 길을 가고 있는가를 그들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고 우리를 보호하셨구나”하는 결론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었습니다. 그 말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졸지도 아니하시고 항상 지키셨다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밤낮 쉬지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 주셨습니다. 생각하면 은혜이고 분에 넘치는 축복입니다.  

이 항상 지키신다는 말씀에서 두 가지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여러분 “누가 항상 나를 살피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오늘은 가는 곳 마다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나를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은 누군가가 나를 24시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터넷을 보면 나의 모든 언행이 그대로 기록되어 공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꾸어 생각해 보면 이것은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항상 지키신다” 이것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사탄이 나를 살피고 있다면 섬뜩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고 했으니 뭐가 두렵습니까. 

여기 시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70여 년 동안 포로생활 하면서도 무사히 지내다가 오늘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가 하면 순전히 100%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입니다. 신앙의 삶에서 중요한 덕목은 생각하는 삶입니다. 사람이 생각이 없으면 이런 깊이 있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루터는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나의 삶 중간 중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지나온 한해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러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 확신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한 가지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고 밤의 달도 낮의 해도 너를 해치지 않게 하시고 너를 지키시는 자가 네 영혼을 지키시고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실 것이라(5-8)”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미래를 확실하게 내다보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은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나라의 여름은 중동에 비하면 더위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뉴월 더위는 암소 뿔을 물러 빠지게 한다는 속담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오뉴월에는 솔개의 그림자도 반갑다는 말도 만들어 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중동의 낮의 해는 50도가 넘는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밤의 달도 사람들을 해칩니다. 낮 더위와 밤의 냉기, 여기에 어두운 밤에 내리 비추이는 달빛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기증을 유발하고 미치게 합니다. 

정신 이상자를 영어로 “루나틱”(lunatic)입니다. 그 말은 로마시대의 “루나”라는 “달신”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도중에 야영을 하게 되면 내리 비추는 달빛이 사람들을 미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않고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큰소리를 치고 별소리를 다 하고 나는 무신론자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결국 갈 곳은 하나 뿐입니다. 길도 하나 뿐입니다. 그곳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그 온 데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결국 하나님께로 가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야할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마침내 포로생활을 통해서 고난을 겪는 동안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내 고국의 소중함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그들은 오늘 비로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오늘 길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길이고 궁극이고 목적이십니다. 오늘은 우리민족이 처한 가장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모두 떨고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이런 걱정과 불안함과 풍파와 고난이 상존해 왔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섭리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재발견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한 대기업 사장이 모교 졸업식에서 이례적인 치사를 하였습니다. “제가 사회로 나가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실패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일에 실패하시기 바랍니다.”하고 치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큰 실패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실패를 거울삼아 후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사람이 실패하여 힘을 소진하여 기진맥진 할 때 그때가 가장 경이로운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때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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