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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벙어리를 고치신 예수님 (마 9: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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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를 고치신 예수님 (마 9:32~34)


(32)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를 믿고 변화된 현상 중에 하나는 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예수쟁이는 말쟁이들입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리에 눈이 뜨였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진리에 대해 눈 감고 귀를 닫고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진리를 경험하고 나니 그것을 가슴에 담고는 견딜 수 없는 법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에 3천명, 5천명이 듣고 회개하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행:13)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계집종 앞에서도 두려워 거짓말하고 얼버무리던 베드로가 갑자기 유식한 자처럼 그 입에서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진리의 뜨거움을 경험한 것입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이 성령의 불이 얼어있던 우리 마음속을 녹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임하기전 우리 마음은 마치 동토와 같습니다. 우리 안에는 온갖 진기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담겨 있지만 냉동된 채 그러합니다. 그러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자 녹기 시작하고 죽었던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못지않게 말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든 만나서 자기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고는 못 견디는 법입니다. 사랑의 불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35장 5절입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벙어리는 말을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그 혀가 풀려 말을 할 뿐만 아니라 노래까지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현상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 메시야 시대의 이상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은 예수님의 열 가지 기적을 모아놓았는데 그중에 열 번째 기적입니다. 단지 이 말씀은 예수님이 행하신 특수한 한 가지 기적의 사례만이 아닙니다. 실은 우리가 영적인 벙어리들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만남으로 혀가 풀려 노래를 하게 된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 보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귀머거리

사람들이 한 벙어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말씀에 의하면 이 벙어리는 귀신에 들려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사람은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된 데다가 귀신이 들려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려옵니다. 어눌한 자 또한 벙어리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귀에 손가락을 대고 침을 묻혀 혀에 손을 대면서 “에바다” 곧 열려라 하니까 귀가 열리고 말을 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땅을 구르고 발광을 하며 입에서 거품을 내며, 또 불이나 물에 자주 뛰어들어 자기를 학대하는 전형적인 간질 현상을 보이는 아들을 그 아비가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막9:25) 하며 그 아들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종합해 볼 때 벙어리된 것은 귀신의 현상에 의해서 된 것만은 아닙니다. 벙어리 된 육체적인 질병과 이 때문에 발생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하게 되거나 귀신이 들린 영적 질병이 함께 겹친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그 모두를 다 귀신들렸다고 했으니까요. 이 때문에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 마음이 꼬여 있는 자들에게는 어떤 일도 좋게 해석이 안 됩니다. 실은 이들이야말로 자기 편견과 무정함이라는 귀신에 들린 자들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귀신들린 현상에 대한 것보다 벙어리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더 중점을 두어 묵상하려 합니다. 흔히 벙어리는 귀머거리가 함께 동반됩니다. 아니 귀에 이상이 생겨 말도 못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듣지 못하니 남의 소리뿐만 아니라 자기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상한 소리나 고음을 내기 일쑤고, 말을 못 알아들으니 결국 말할 필요가 없게 되어 벙어리가 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벙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쁨이나 감사도 전혀 표현하지 못하고, 기도도 못하고, 복음도 전혀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영적인 벙어리가 되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영적인 귀머거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듣지 못합니까?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인 귀가 죄로 말미암아 둔감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 생각이나 욕심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대화를 하더라도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할 때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들아”(사43:8)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을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일부러 듣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귀에 대고 소리쳐도 변하지 않는 그들의 완고함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저도 설교를 하면서 가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하는 것이 마치 벽을 향하여 하는 것같이 느껴질 때입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외쳐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설교의 한계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긴 자기 자신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가끔 보면 설교자가 언성을 높이며 화난 것처럼 설교할 때가 있습니다. 십중팔구 설교를 통해서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을 때입니다. 한쪽은 언성이 자꾸 높아지고 듣는 쪽은 어디 마음껏 소리쳐봐라 내가 변하나 하고 마음을 굳게 닫습니다. 이런 지경까지 가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이라 할 수 없고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귀머거리들의 대화를 들어보셨습니까? 가는 귀를 먹은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한 귀머거리가 친구에게 “자네 식사했나?”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귀머거리가 “아니 식사했네.” 하고 답합니다. 그러자 처음 귀머거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난 또 식사한 줄 알고......” 자기 말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화가 그렇지 않습니까? 동문서답, 우이독경, 마이동풍. 말을 듣지 않으면 말하는 자는 답답해지고, 듣지 않는 자는 완악해집니다. 요즘 한국사회가 그렇습니다. 국민과 정부의 관계가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으니까 국민들이 잔뜩 화가 나있습니다. 자기를 낮추어 국민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정부가 신뢰받는 정부이고, 신뢰를 받아야 어려움의 때를 함께 이겨낼 수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듣는 귀가 예민하신 분이십니다. 들판에서 비밀리에 죽은 아벨의 핏소리도 들으시는 분이요, 광야에서 외치는 하갈의 소리도 듣고 반응하시는 분이시요,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남 몰래 뒤로 돌아와 옷깃을 만졌던 혈루증 앓는 여인이 흘렸던 한숨 소리를 들으셨던 분이며, 부자집 대문 앞에서 홀로 끙끙대던 거지 나사로의 신음소리를 들으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소리에 예민하듯 우리도 하나님의 소리에 예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온 땅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방면으로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성경을 통하여 큰소리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설교자의 설교를 통하여서 대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하여서도 말씀하시며 여러 사건이나 자연을 통하여서도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체면이나 편견으로 귀를 닫고 있다면 우리는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일화 중에 주기철 목사님과 조만식 장로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주기철 목사의 오산학교 스승벌이 되고 또 주기철 목사님을 산정현 교회로 청빙하신 분입니다.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조만식 장로님이 조금 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신발을 들고 들어서려는데 예배를 인도하시던 주 목사님이 조 장로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늦게 오셨군요. 그 자리에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조 장로님은 신발을 든 채 뻘쭘하게 서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주기철 목사님이 조 장로님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조 장로님은 예배 시간에 자신이 늦은 것에 대해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목사님에 그 장로라 할 것입니다.

어떤 젊은 목사가 이 예화에 감동을 받고 자신이 부임한 교회에서 이 예화대로 행하였습니다. 한 장로님이 예배 시간에 늦자 그 자리에 서서 예배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장로님은 화가 나서 교회당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고 내내 앙심을 품다 결국 그 목사는 그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들을 귀 있는 자에게 해야 할 것을 함부로 하다 망한 것입니다. 요즘 세대가 그렇습니다. 강단에서는 진리의 소리를 과감히 선포하는 자가 없고 회중들은 자기 좋은 말만 들으려 하지 싫은 말은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벙어리요, 영적인 귀머거리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광풍이 몰아칠 때 강단에서 ‘집 한 채로 만족하십시오. 투기는 죄입니다.' 하고 외치는 목회자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요즘같이 부자와 가난한 자, 강남과 비강남 사이에 갈등이 심할 때 교회 또한 똑같이 물질의 논리를 좇아갔습니다. 종합부동산세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부유한 크리스찬들이 ‘우리는 종합부동산세 폐지에 반대합니다’는 운동을 벌였다면 한국사회에 주는 충격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빌게이츠를 비롯한 미국의 100대 부자들은 부시 정부의 상속세 감세안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당하지 못한 부의 대물림이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자녀들을 병들게 한다는 점에서였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유리하고 복이 되는 소리만 들으려하지 하나님의 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막으니까 한국교회가 진리를 외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라고 하면서 떠드는데 세상 사람들은 우리 소리가 마치 벙어리가 ‘어버버’ 하는 소리로 들려 듣지 못하거나 오히려 비웃고 있습니다.    


벙어리가 노래하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 귀가 열리고 그래서 우리 혀 또한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혀를 풀어 벙어리들로 노래하게 만드십니다. 가끔 간증집회에서 예수님 시대처럼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간증을 가끔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기적과 같은 예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만 바라고 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벙어리 된 자가 예수라는 진리를 만남으로 진리의 세계에 눈이 뜨이고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진리의 소리를 외치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용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도 주님처럼 기적을 우리 손으로 재현할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와 그의 선생 설리반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2살에 시력과 청력과 언어구사 능력을 다 잃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막힌 것입니다. 이런 헬렌 켈러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말하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설리반 선생입니다. 헬렌 켈러에게 남아 있는 감각은 만지고 느끼는 감각뿐이었습니다. 이런 헬렌 켈러에게 설리반 선생은 7살 때부터 말과 글들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한 손에 물건을 쥐어 주고 다른 쪽 손바닥에 그 글자를 써줍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단어가 ‘인형’이고 ‘물’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감각할 수 있는 명사는 그런대로 가르칠 수 있었지만 추상명사는 대단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단어는 비바람이 몰아친 후에 따뜻한 태양이 비추는 것을 보고서야 사랑이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헬렌 켈러는 말하는 법도 배웠는데 후두의 떨림이나 입모양이나 혀를 만져가며 말하기 연습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발음은 유창하지 못하지만 대중 강연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벙어리가 대중연설가가 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헬렌 켈러가 육체적인 장애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장애도 극복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헬렌 켈러의 말들 중에는 명언이 많습니다. 한 번 들어보십시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똑바로 정면으로 바라보십시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은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헬렌 켈러는 또한 진리의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녀가 장애를 극복한 것만 알고 있지 그 이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1930년대 이후 사회운동가로 변신하여 불의에 맞서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헬렌 켈러가 가난한 노동자를 지지하여 사회당에 입당하여 파업 현장에 가고 투쟁했던 것은 미국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그 외에도 인종철폐운동, 아동 차별 금지, 사형제 폐지 운동 등을 벌였습니다. 헬렌 켈러는 귀먹고 말 못하는 벙어리였지만 그 장애를 극복하고 벙어리가 노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할 것입니다. 헬렌 켈러의 기적은 오늘날에도 우리 손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처음에는 말을 잘 못하는 어눌한 자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자 달변가가 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대표적입니다. 

예레미야 1장 6절에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레미야는 무엇을 외쳐야 할 지도 모르는 무지한 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에 대해서 확고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이어서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7-9)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달변가가 됩니다. 말을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모세도 그렇습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를 때 모세 또한 말이 어눌한 자였습니다. 모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이는 단순히 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설득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그런데도 모세가 완강히 저항합니다.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 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고 화를 내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머에 이런 게 있습니다. “모세가 말을 더듬어서 좋았던 것은?” 답은 “율법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모세 오경만큼 권위 있는 성경이 어디 있습니까? 모세만큼 하나님 말씀을 많이 대언하고 기록한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이렇게 놀랍게 변화된 것입니다.


영적 벙어리들

우리들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될 영적 벙어리들입니다. 아니 실제 벙어리들입니다. 현대인들 중에 벙어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을 못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심한 충격이나 두려움으로 실어증에 걸린 사람, 자기라는 세계 속에 갇혀 세상과의 대화를 단절한 자폐증 아이들, 사람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더듬거나 대인공포증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들이 모두 벙어리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입니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거인의 정원』처럼 이곳에는 찬바람만 불고 꽃 하나 피지 않는 동토의 땅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어린 아이들이 들어가자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담장을 허물어버리자 비로소 봄이 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거인과 같은 존재인데 자기라는 세계에 갇혀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따뜻한 바람이 불자 베드로를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듯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대한 사람들로 만듭니다. 

오래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적인 벙어리가 되어 있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이들은 마음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믿다가 우리 안에 있는 바위 덩어리 때문에 또는 세상의 염려, 욕심과 같은 가시떨기 때문에 성장이 정체된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토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혀가 풀립니다.   

기도의 벙어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대화하지 않는 자가 기도의 벙어리입니다. 감사의 벙어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주셨는데 그에 대해서 전혀 감사하다는 말이나 표현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찬양의 벙어리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임하면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노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무지 그 입에서 흥얼거리는 찬양이 나오지 않는 자가 찬양의 벙어리입니다. 

누가복음을 보세요. 아이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소식을 들었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믿지 않다가 10개월 동안 벙어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반면에 처녀의 몸이었던 자신에게 구세주가 탄생할 것이라는 기가 막힌 소식을 들었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세에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진리의 벙어리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전도의 벙어리도 있습니다.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게 일어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벌리지 않습니다. 저와 우리 교회의 모습 같다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최권능 목사라고 알려진 최봉석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최 목사님이 한번은 기차를 타고 앞 칸부터 외치면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천당, 예수 믿으시오. 예수 천당, 예수 믿으시오”  그러다 우연히 그 기차 안에서 신학교 동기 동창인 채필근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 목사님은 아는 채하지 않고 채필근 목사님 앞에서 동일하게 “예수 천당, 예수 믿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채 목사님은 깜짝 놀라며 “여보게, 봉석이, 날세. 나 채 목사야” 하고 반색을 했습니다.  그러자 최 목사님은 더 큰 목소리로 “예수 천당, 예수 믿으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채 목사님이 자신을 못 알아본다고 생각하고 “나, 채 목사라니까!”라고 다시 한 번 말했습니다. 그러자 최 목사님은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녀석, 벙어리아냐? 목사가 여기 입 다물고 앉아 있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옆에 수많은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렇게 멍청히 앉아 있어!”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영적인 벙어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때 그분이 우리의 굳은 혀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 감사의 사람, 찬양의 사람, 진리의 사람, 전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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