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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일조가 복이 되게 하라 (마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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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가 복이 되게 하라 (마 23:23)


목사가 하기 힘든 설교가 십일조 설교입니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설교가 십일조 설교입니다. 피영민 목사님은 십일조를 해야 하는 이유를 일곱 가지로 설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군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 18:20, 21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일조를 성전일을 하는 레위인들에게 기업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행위가 십일조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입은 하나님이 주실 때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 24:1에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내게 있는 것이 모두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라고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셋째, 십일조는 탐심을 경계하는 방편입니다. 골 3:5에서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씀합니다. 십일조는 정상적인 소유욕과 탐심을 구별하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넷째, 십일조는 물질의 복을 주시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십일조에 대해서는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십일조는 믿음을 강화하는 방편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여섯째, 십일조는 예배를 풍성하게 하는 재원입니다. 구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레위인들의 생계수단이 되는 주의 십일조(Lord's tithe)이고, 또 하나는 절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는 절기 십일조(Festival tithe)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절기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세 번은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때 함께 모인 사람들이 먹고 예배드리기 위해 필요한 경비가 바로 절기 십일조입니다. 

일곱 번째, 십일조는 구제와 선교의 재원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세 가시 십일조 중에 마지막 하나가 구제 십일조(poor tithe)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먹이기 위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가 중요한 이유는 신자가 하나님에게 돌아왔느냐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았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질문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고 질문하자 하나님께서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나온다고 꼭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해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하는 사람에게 넘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 3:10-12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온전한 십일조 생활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일조를 시작하자마자 당장에 경제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랜 세월동안 점점 풍성해지는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로 축복 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로 록펠러를 꼽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믿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일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이런 것들을 좋아하시겠구나 생각해서 아들에게 열 가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①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②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③ 네 오른쪽 호주머니는 십일조 호주머니가 되게 하라. ④ 주일은 반드시 본 교회에서 지켜라. ⑤ 어떤 일로도 원수 맺지 말아라. ⑥ 반드시 아침에 하루 일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 부탁해라. ⑦ 하루 일을 마치거든 소상히 하나님께 기도로 보고 드려라. ⑧ 신문을 읽기 전에 성경부터 읽어라. ⑨ 선한 일을 할 기회가 있을 때 적게 하지 말고 크게 하라. ⑩ 예배 시간에는 맨 앞자리에 앉아라.” 

록펠러는 자신의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을 했고 그 결과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다 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주변에 보면 열심히 십일조를 하지만 복은 고사하고 어렵기만 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목사인 저는 성도들 중에 열심히 십일조를 하지만 물질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굉장히 마음이 아픕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다가도 때로는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열심히 십일조 생활을 하는데도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저는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연단과정 중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큰 것을 맡기기 위하여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우리가 연단을 잘 통과하게 되면 정금처럼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욥은 욥 23:10에서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가지의 이유는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복음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던 바리새인들에게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버렸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십일조는 끝났고 율법의 더 중한 것 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만을 행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두 가지 모두 다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철두철미했는지 심지어 자신들의 정원에서 자라나고 있는 박하나 회향이나 근채와 같이 향기 나는 작은 풀들의 십일조까지도 철저하게 계산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실 자기 집 정원에서 얻게된 아주 조그마한 것까지 십일조를 드릴정도였다면 얼마나 십일조 생활에 철저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화초를 많이 가꾸는 집에 가보면 베란다나 혹은 거실에서 방울토마토가 달린 화분을 가끔 발견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상용으로 그냥 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몇 개 되지도 않는 것 다 따서 한 입에 쏙 넣어 버릴 것입니다. 누가 방울토마토가 열 개 열렸다고 그 중에 하나를 떼어서 십의 일조로 바치겠습니까? 만약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기 집에서 화분에 방울토마토를 길렀다면 이 방울토마토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그 숫자를 정확하게 세어 열 개가 열렸으면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누가 과일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러면 그 과일을 어떻게 합니까? 몇 개가 들었는지 세어서 그 중에 십분의 일을 떼어 하나님께 바치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 중에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이웃과 나누어 먹을 수는 있어도 계산해서 ‘한 상자에 40개 들었으니까 4개는 하나님께 바쳐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그 중에 십일조를 계산해서 드렸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하고 철두철미한 십일조 생활입니다. 어느 글을 읽어보니까 조 농사를 지어서 추수를 하면 사람들을 사서 조의 숫자를 세면서 십일조를 드렸다고 하던데 그렇게까지 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십일조를 잘하고도 저주 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일조 잘 하고도 화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말아합니다. 우리의 십일조 생활이 말라기 3장대로 복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해답은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에서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는 성도가 됩시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서 십일조 생활이 자신에게 복이 되게 합시다.
그럼 주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에서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십일조를 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가집시다. 

한글 사전에서는 ‘정의’를 ‘올바른 도리’라고 말합니다. 원문에는 헬라어 ‘크리시스’가 쓰였는데 그 말의 의미는 ‘올바른 판단’ 혹은 ‘올바른 결정’을 말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정의를 버렸다는 말은 무슨 판단과 결정을 할 때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과 결정은 하나님이 주신 기준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아닌 다른 것으로 판단하고 경정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림줄을 아실 것입니다. 요즘은 건물을 세울 때 수평과 수직을 잡아주는 기계가 나와서 편리합니다. 기계를 세워놓고 작동시키면 레이저광선이 나와서 수평과 수직을 잡아줍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다림줄을 사용했습니다. 줄에 추를 달아서 매달아 놓으면 좀 흔들리다가 멈추게 됩니다. 이 때 추를 달고 있는 줄은 정확하게 수직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 줄에 맞춰서 벽을 세우면 그 벽은 똑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주님의 손에는 다림줄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쌓은 담 곁에 서셨습니다. 그 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담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암 7:8,9)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황폐하게 되고 파괴되고 칼로 치겠다는 말씀은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했던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생활은 잘했지만 주님의 다림줄로 재어보니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정의는 주로 돈이나 명예였습니다.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것들이 그들의 정의였습니다. 그들의 판단과 졀정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의한 판단과 결정이었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이 비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 16:14에서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심판을 내린 빌라도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그는 주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을 씻기도 했지만 결국은 주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빌라도가 가진 잘못된 정의 때문입니다. 그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그의 정의는 정치적 생명이었습니다. 

다림줄의 수직과 맞지 않게 기울어지게 건물을 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그 건물은 기울어지다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짓고 있는 신앙과 생활의 집은 어떻습니까? 십일조는 잘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는 판단과 결정을 하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나름대로의 다림줄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하와가 따먹고 그 후에 아담에게 줬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아담과 하와의 실패 속에서 다림줄 즉 하나님의 정의와 관련된 두 가지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첫째는 명확한 말씀을 갖자는 것입니다. 하와는 말씀이 흐릿했기 때문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하나님께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아담을 통해서 들었고 아마 그 말씀을 들을 때에도 집중해서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뱀의 유혹이 있을 때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답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에 변함없는 다림줄입니다. 다림줄이 흐릿하게 보이면 안 됩니다. 다림줄이 흔들리고 둘이나 셋으로 보이면 안 됩니다. 시력에 이상이 있어서 똑 바로 서 있는 다림줄을 기울어지게 보면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 속에서 다림줄과 관련된 두 번째 도전은 다림줄 보다 더 판단과 결정을 하는데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와는 말씀이 흐릿해서 실패했지만 아담은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아담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각종 들짐승과 각종 새의 이름을 지었으나 하나도 겹치지 않게 지은 천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흐릿하게 알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다림줄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까? 아담은 하나님보다 하와를 더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와를 선택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정의를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판단과 결정의 다림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다른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다림줄, 하나님의 정의를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십일조가 말 3:10대로 복이 될 것입니다. 


2. 십일조를 하며 이웃을 긍휼히 여깁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종교적이었지만 사랑을 실천할 줄 몰랐습니다. 주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사랑이 부족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비유를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거반 죽게 되어 쓰러져 있는데 한 제사장이 보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또 성전에서 일하던 레위인도 강도만난 자를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나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도 드리고 사람을 긍휼히 여길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 없어서 형님의 아들인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잘 정착을 해서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카 롯이 성장을 하면서 집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의 양도 많고 롯의 양도 많아져서 함께 있을 수가 없어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땅의 선택권을 맡겼습니다. 

창 13:9에 보면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롯이 욕심이 생겨서 그 동안 잘 키워준 삼촌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재산 증식에 눈이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을 배반하여 자신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아브라함을 사막으로 내쫓는 그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얼마 후에 그 땅에 분쟁이 일어나서 이 롯이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롯은 그돌라오멜이라는 왕에게 가진 것을 다 뺏기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조카 롯이 잡혀갔다고 소식을 들으니까 이 조카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집 종들과 자기를 따르는 318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전쟁을 해서 조카 롯을 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배반하고 상처를 주고 떠난 롯이 어려움을 당하자 긍휼히 여기고 롯을 구출했던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한 아브라함이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에게 긍휼히 있는가를 점검합시다. 어려움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까? 
저는 진짜 사랑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참 가엾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죽으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는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참으로 가엾습니다.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도 잠시잠깐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거지 나사로는 영원한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병든 사람을 돌아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은 그 일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한번 결정되면 영원한 것입니다. 한번 결정되면 천국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영혼 사랑입니다. 가장 큰 가족사랑, 가장 큰 이웃사랑은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합시다.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의 위로자가 됩시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 앞에 인도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그래서 여러분의 십일조가 말 3:10대로 큰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십일조를 하며 믿음을 가집시다.

그들은 십일조는 하는데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십일조를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고 십일조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마23장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7대화가 나오는데 반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성장 시키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몇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롬 10:17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는 습관을 드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여러분을 믿음의 사람들로 만들 것입니다. 제가 간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의정부에 사시는 은사 받은 권사님이 녹즙을 만드셨는데 그 녹즙을 먹고 간이 좋아졌습니다. 간에 좋은 녹즙이 제 속에 들어가니 제 간이 좋아졌던 것처럼 믿음에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좋은 역사를 기대하고 바라보십시오. 

히 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기대하는 것 소원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바라봐야 합니까? 물론 좋은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나쁜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고, 좋은 것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네 종류의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히 11:6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은 당연히 믿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좋은 상을 주신다는 사실가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말씀대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쌓을 것이 없도록 부어주시겠다고 했으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자기 것을 하나님께 빼앗긴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늘 창고에 저축한다고 믿으십시오. 성경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20)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행은 세상에 있는 어떤 은행보다 이율이 높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은 나의 재정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셋째,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열심히 감당하시고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십시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시고는 밭 가는 종의 예화를 드십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할지니라”(눅 17:7-10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종이 되십시오. 종으로 충성한 후에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라고 말하십시오. 종이 하루 종일 일했다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집에 들어와서 주인의 식사를 챙겨야 하는 고단함에도 불평 없이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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