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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삶에 가장 귀한 축복 (시 1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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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가장 귀한 축복 (시 137:1~9)

슬픈 얘기입니다만은 1980년 아웅산 묘역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들, 무려 방문단 17명이 순직한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수행원으로 참가했던 분이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지만은 
길이 막혀서 조금 늦게 간 것이 그 끔찍한 사건에서 면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참사 직후 부랴부랴 대통령과 같이 비상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시간이라서 비행장에 새벽 4시에 내렸는데 
         다 그냥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서로 인사도 안하고 흩어졌는데, 
이 분도 내리긴 했는데 깜깜한 밤에 이거 어떡하나? 
그래서 우선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기사가 물어봅니다. `어디로 갈까요?` 
그때 그는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꼭 죽어야 할 사람이 지금 살았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자기도 모르게 불쑥 `소망교회로 갑시다.` 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집으로 먼저 갈 수가 없었더라는 거예요. 

그는 새벽기도회에 한 번도 안 나온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앉아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나오더라는 일화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궁극적인 면에 부딪히면 
        교회를 찾는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37편은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겪었던 신앙의 고초와 삶의 비탄 속에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결단을 노래한 탄원시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온입니다. 
시온을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오늘 우리에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

1절 [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1. 시편 기자는 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을까요?(1절)

시온에 대한 슬픔은 
단순히 바벨론 포로생활의 고달픔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서 예루살렘 시온산에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상실한 신앙적 아픔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하여 금 은 백향목으로 지은 성전을 주실 때
성전 예배가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하며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불신앙적인 삶을 살다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성전은 훼파되어 버리고 
   성전의 금, 은으로 만든 기명들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지며
   백성들마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깨닫고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성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걸어온 발자취를 역사 또는 문화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화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즉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사라고도 합니다. 

왜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사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교회를 중심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살펴보면 
     창세기는 하나님의 가계를 중심해서
     광야 40년 생활은 성막을 중심해서,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을 중심해서 
예수님 이후 신약시대로 넘어 오면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장이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은 항상 성전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전 중심 그것은 바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지금 바벨론에 포로 잡혀와 강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말은 고난을 당하고 보니 
       교회생활, 예배생활을 등한히 한 것을 깨닫게 됨을 말합니다.
사실 깨닫게 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삶의 회복이 안 되려고 하면 이런 깨달음도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강변에서 깨달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2.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2-4절)

이 말은 2절에 [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 
라는 표현 속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 자세히 보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혹 몸은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마음은 하나님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한다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는데 그 고난은 

1)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2절 [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 
수금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할 때 동반되는 악기인데 
지금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서글픈 현상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버드나무에 걸어놓고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잠자다가 머리 깎인 삼손처럼 
     신앙의 잠자다가 하나님 주신 재능 은사 다 녹 쓸어 버리지 아니했습니까?
돌이켜 교회 봉사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2) 바로 세상 속에서 수모와 수치로 나타납니다. 

  3절에 보니 바벨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롱 조로 하나님께 노래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찬송이라는 것이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나오는데
지금 수치와 수모를 당하면서 어찌 찬송이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4절에 [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께 노래를 부를꼬? ]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떠나서 세상에서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수모와 수치를 당한다는 사실 마음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도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다고 애굽이나 불레셋으로 갔다가는 
         꼭 낭패와 수모를 당합니다.
교회생활 어렵다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 
         반드시 세상에서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의 눈물 속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1-4절까지 말씀이 단순히 탄식의 소리만이 아닙니다.
저는 오페라에 대해서 잘 모르지마는 
     제가 좋아하는 크라식 가운데 하나가 “히브리 노래의 합창”입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Nabucco 중에 나오는 노래로
나부꼬는 바로 예루살렘을 멸망케 한 바벨론 느브갓네살의 이탈리아식 이름입니다.

합창곡 “히브리 노예의 합창”은 
오늘 본문말씀을 배경으로 하는 유대인들이 유브라데 강가에서 노역하면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합창곡입니다.
바로 시137:1-4절이 원전인 노래입니다.
노래의 첫가사가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우리가 역경에 처해 있어도
       우리의 생각이 교회를 향한다면 그기에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바벨론에서 수취와 수모를 겪는 고난을 당합니까?


3.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성도는 세상의 조롱 속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5절)

5절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데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
그것은 예루살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우상숭배를 하다가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세상에 빼앗겨 우리의 마음의 고향인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다 보면
       심령이 굳어지고 마음의 곤고가 따라오면 
       육신의 삶도 고달파지는 것입니다.  
      
창34장에 야곱이 세겜 땅에서                                    
외동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는 큰 낭패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둘째 셋째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세겜성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 디나를 주겠다고 언약하고는 
할례 후 고통이 심한 3일 째 세겜 땅 남자들을 칼로 다 살육해 버립니다. 
     이 이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죽이려고 하니
     야곱이 심히 두려워하는 가운데 있는데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창35:1절 [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온 식구에게 외칩니다
[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
그리고는 벧엘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럴 때 [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추격하는 자가 없더라 ] 고 합니다.

벧엘이 어디입니까? 
일찍이 야곱이 돌배게 삼고 자다가 하나님 만나고
      거기서 단을 쌓고 서원 했던 장소입니다.
벧엘은 이름 뜻 그대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로 우리의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인생 가는 길 고난 당하거든 
   일어나 하나님 집으로 찾아와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치 집 떠난 탕자가 굶어 죽게 된 지경에서 
아버지 집을 찾아오듯이 하나님의 교회로 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바벨론 사람들의 조롱과 수치와 수모 속에 깨닫게 됩니다.
왜 아름다운 성전 주실 때 바로 예배드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형식적 예배드리다가 이렇게 포로로 잡혀와 고생하게 되었구나 
이제 다시는
예루살렘을 잊을진데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합니다.
오른 손의 재주 - 밥 먹고 글 쓰고 하는 재주 
사람이 죽지 아니한 이상 오른 손의 재주는 잊지 않는 법입니다.
그만큼 뼈저리게 고난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122:6절에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줄 믿습니다. 

될 사람은 고난 속에 신념을 피웁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마음에 다짐하고 결단합니다. 


4. 성도에게 교회는 무엇이 되어야 하며 나의 삶에 가장 귀중한 축복이 무엇일까요?(6절) 

6절 [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데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찌로다 ] 

이렇게 성도는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들입니다. 
본래 고난이라는 말속에는 소성케 한다 새롭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다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발견하고 결단한다면 우리의 삶 소성하고 회복될 줄 믿습니다. 
이제 시편 기자는 고난 속에서 결단하게 됩니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지 아니하는 이상은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제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피는 신념입니다.                                
성도에게 교회는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시온의 복을 성도의 가정에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선전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이 있다면
공산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1903년 레닌이 처음 공산주의를 외칠 때는 17명의 추종자 밖에 없었습니다.
14년이 지난 후에는 4만 명이 생겼고 그것이 러시아 정부를 정복하고 
       드디어 반세기가 되지 아니하여 세계적으로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난 1957년 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쵸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텔레비전을 통하여 건방진 소리를 합니다.
[ 역사는 우리편이다 내가 한 가지 분명히 예언을 하는데 너희들의 손자 때가 되면 
  너희 손자들은 전부 다 우리 사회주의의 지배 아래 들어오고 말 것이다 ] 

물론 이뤄지지는 아니했지만                                            
공상주의 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습니까?
그것은 레인이 10년이 넘도록 감옥에 드나들며 
나중에는 4년이나 시베리아 형무소 생활을 통해 신념을 피웠던 것입니다. 
그만큼 고난 중에 피는 신념은 무서운 것입니다. 
맑스 레닌이 신학교를 나와서 공산주의에 눈뜨지 아니하고 
예수 복음에 눈이 뜨여졌다면 기독교의 세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고통 중에 있는 성도 있습니까?
그 고난 속에 피는 신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C.S Luis는 [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 ] 라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념을 피워나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당한 것이 네게 유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은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처럼 
[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노라 예루살렘을 나의 제일 즐거운 것으로 삼겠노라 ] 
하며 신앙으로 이어지는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합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 마음에 결단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진정한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고난에 부딪힐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가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웨이런> 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 나는 얼마 전에 4000년 동안 한 번도 실수하지 아니하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아니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그 사람은 대영제국 박물관에 있는 미이라이다 ] 

우리가 미이라가 아닌 이상, 살아있는 사람은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실수 속에 실패 속에서 신념을 피우고 
그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는 하나님이 그 삶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시편 기자가 고난 중에                                          
이제는 다시 예루살렘을 잊지 아니하고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예루살렘을 제일 사랑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을 고백하듯이
오늘 우리도 비록 고난 중에서라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나와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비록 세상에서 실패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새롭게 하셔서 더 크게 들어 역사 할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왜? 성도에게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삶보다 
               더 귀한 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같은 말로 기도를 끝맺는다고 합니다.
   “ 바샤나 하바아 예루샬라임 ”
이 말은 “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 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항상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예루살렘에 가기를 고대합니다.

저는 오늘 시137편을 택하여 설교하는 이유는
감사의 달 마지막 주일에 
       은혜로운 교회가 마음의 고향이 되고
      우리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 줄 알고
하나님께 내게 교회를 허락하심에 감사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5. 내가 예루살렘의 복을 누리는데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7-9절)

7절 [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예루살렘을 노략질하고 도피자까지 무자비하게 학살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성전을 지을 때도 많은 방해를 합니다. 
그러니 이 말은 단지 에돔 족에 대한 원한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에 대한 원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교회를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에돔 자손은                                     
에서와 야곱의 때로 시작하여
출17:에 아말렉 족속으로 이스라엘 괴롭히기 시작하면 
사울과 다윗 왕 때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다가 자기가 장대에 달려 죽는 하만이 
     바로 에돔 족속이요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건하고 성전을 다시 건축할 때도 
       에돔 사람들이 모함을 해서 방해 공작을 합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사탄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교회가 무너지기를 원하고                           
       교인들이 교회에 무관심하게 만들려고 유혹하며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예배의 실패자로 만들게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말고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마귀와의 영적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7절에서 에돔 족속을 치소서 라고 하며
8-9절에서는 
[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 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시137편을 읽어나가다 보면 맨 끝의 줄에서 읽는 사람을 흠짓 놀라게 합니다. 
그 끝 절은 글자 그대로 아주 어린 젖먹이를 바위에 그냥 메어치라는 
      무시무시한 저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메어치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축복의 기원까지 붙여놓았습니다.
이런 글을 대하면 참 기독교는 무시무시한 종교다.
어린 젖먹이조차 인정을 베풀지 않는 독선적인 종교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벨론의 어린 것들이란? 
바로 하나님 백성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탄의 세력의 어린 것들이란 말입니다.
모든 세력들은 어린 것, 새끼로부터 시작합니다.
세월은 금새 흐릅니다. 저 어린 것이 무엇이 될까?
결국 바벨론의 어린 것, 바벨론이 젖먹이고 보호하며 애지중지 키우는
     바벨론의 어린 것이 나중에 무시무시한 바벨론이 되어
     하나님 백성의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당장 들어다가 
아무리 모질어도 가차없이 바위돌 위에 내던져서
      화근을 면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혹 성도 여러분 가정에 바벨론의 어린 것이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지금 잘라버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결론>

사람은 귀중한 것일수록 가지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잃고 나면 그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건강, 물, 공기, 가정 특히 성도에게는 교회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귀중한 복이 바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파괴시키고
     하나님 백성들을 조롱하고 고통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에돔 족속과 바벨론이듯이
마귀와 세상은 항상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가운데서라도 이를 악물고 마음에 결단하여
      하나님 교회에 나와서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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