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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유쾌한 삶으로의 초대 (행 3: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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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삶으로의 초대 (행 3:19~26)


1. 웃고 삽시다!

우리나라 정치인 한 사람이 대통령 교체를 앞두고 있는 미국 대통령 인수 위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의원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에 대해서 치사(致詞, 致辭)를 해야 했는데요. 그가 치사를 시작하다 말고 “어~, 저~”하면서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미국 차기 대통령에 내정된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동료 의원이 ‘버럭 고마마’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이니까요,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중에, 오늘 초청할 저의 VIP인 누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가 다른 방에서 누님에게 전화를 걸어 “누님”하고 크게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이 두 군데서 들려왔습니다. 하나는 저의 전화를 받은 누님의 대답이었고, 하나는 거실에 있던 자칭 저의 누나라는 사람의 대답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웃으시라고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웃으면서 사시는지요?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요즘, 점점 더 여러분의 웃음을 빼앗아 가는 현실에서 ‘웃음’ 운운하는 것이 어색하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목사인 저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여러분 모두를 웃게 하는 일입니다. 저는 조금 전에 읽은 성경에서 저와 똑같은 사명을 가진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입니다. 그의 앞에는 웃을 일이 전혀 없는 사람들,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면서 저도 오늘 여러분을 웃게 만들고 싶습니다. 


2. 웃을 수 없는 사람들

먼저, 오늘 성경 말씀의 이야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왜 그들은 웃을 수 없었을까요? 그들이 웃음을 잃은 데에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문제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원인이 더 컸다고 보아야 합니다.

먼저 당시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결코 웃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라의 주권을 로마에 빼앗겨 로마 제국이 그들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정책적으로 통일된 유대나라를 원치 않았습니다. 모아 놓으면 반란을 일으킬까 하여, 나라를 조각 조각 내어서 로마에서 파송한 총독이 직접 통치하거나, 분봉왕이라고 하여 지역의 귀족이나 왕족들이 통치하게 했습니다.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과 그들이 꼭뚝각시처럼 세운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의 종교, 문화, 언어, 습관까지 다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열심당’이라고 하여 극렬한 독립투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로마의 빌붙어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버리고 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데 웃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웃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고 이방인들이 나라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다 보니 유대의 경제적인 상황은 피폐할 대로 피폐하여 그야말로 엉망이었습니다. 실업자들이 얼마나 많았든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는데요. 유대인의 특정한 명절이 아님에도 성전 주변에 수천 명의 남자들이 일이 없어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심지어 한적한 들판에서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에도 수천 명의 남자들이 몰려들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일자리가 없고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자리가 없고 먹고 사는 것이 힘든데 웃을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그들이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인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세계적으로 특별한 민족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선민의식은 그들의 종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상황에 의하면,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는 그들에게 어떤 위로도 소망도 힘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힘들 때 최종적으로 힘이 되는 종교여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종교생활을 해 보았으나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기만 했을 뿐입니다. 신앙의 만족, 영혼의 만족을 얻지 못하면 그 사람은 웃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들이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베드로 앞에 모여있던 군중들이 웃을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외부적인 환경과 상황이 그들을 웃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이 성전에 모이고, 베드로 앞에 모였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록 표정을 딱딱하게, 무표정하게 하고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는 웃고 싶었던 것이죠. 누구든 힘들고 어려운 자신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설교를 통하여 이들을 웃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들을 어떻게 웃게 만들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도 시원하게 웃을 수 있을까요? 


3. 웃을 수 있는 방법

1) 회개해야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19절에 보면, “새롭게 되는 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번역이 조금 다르게 된 성경에는 “유쾌하게 되는 날(개역성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번역 성경에는 “위로의 때(공동번역 성경)”, “편히 쉴 때(표준새번역개정판)”, “새로워지는 때(현대인의 성경)”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새롭게 되는 날, 회복되는 날”, 즉 “the time of refresh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절의 이 “새롭게 되다”는 말은 ‘상쾌하다, 기분 좋다, 즐겁다, 만족한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은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자기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웃을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들에게 ‘기분이 좋아지고, 즐거워지고, 유쾌해지고, 한바탕 신나게 웃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쾌하다’고 느끼신 때는 언제였습니까? 최근에 그렇게 유쾌하게 한 번 웃어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유쾌하다’고 느끼신 때가 첫 자녀를 낳았을 때였습니까?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을 때였습니까? 자동차를 샀을 때였습니까? 자녀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습니까? 자녀를 결혼시킬 때였습니까? 첫 손주를 보았을 때 입니까? 만약 그랬다면 그 유쾌함은 얼마나 지속되든가요? 

베드로는 그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진정으로 유쾌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회개하라”는 말은 조금 특별한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과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등장한 예수님을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정말 그것은 유대인 역사상 최대의 실수였고 최악의 범죄였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문제를 들추면서 “회개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분명 잘못 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베드로는 질책만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그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악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무지한 결과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지식과 인간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 그것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회개하라”고 말한 그 진정한 의미, 그리고 오늘 여러분에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분인지,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시려는 분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제까지는 괜찮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군지 알게 되었으면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인생을 즐겁게 사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맑은 새벽공기처럼 신선했습니까? 기러기가 무리지어 저 푸른 가을 하늘을 가르면서 날듯이 상쾌했습니까? 아니면 매일 매일이 무지와 욕망과 죄악으로 탁하디 탁한 구정물이 흐르고, 만남과 일들이 꼬이고 구겨져 쓰레기처럼 버려지지는 않았습니까? 혹시 한숨과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매일 매일이 신선해 질 것이고, 그리고 유쾌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오늘 우리 교회를 처음으로 찾으신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웃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웃음을 주시고, 여러분의 가정에 웃을 일이 생겨나게 하시고,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에 웃음이 충만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웃으며 살 수 있는 두 번째 방법 역시 “새롭게 된다”는 말에 숨어있습니다. 이 “새롭게 된다”는 말은 성경원어로 '아나프수코'인데요, 이 말은 ‘ana’란 전치사와 ‘psucho’란 동사가 합쳐진 말입니다. ‘ana’는 '위를 향하여', 'psucho'는 '숨 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된다”는 말은 ‘위를 향하여’, 즉 ‘하늘을 향해 숨을 쉰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성경의 제일 처음 책인 창세기 2장 7절은 인간의 기원을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생기, 즉 당신의 숨결을 그에게 불어넣어 주심으로서, 인간이 비로소 참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숨결을 호흡하지 아니하는 자는 참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자기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밖에서 호흡하는 자가 어찌 참 된 삶, 유쾌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나무에서 떨어져나간 가지는 더 이상 나무가 될 수 없는 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영혼을 더 우선으로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는 육신과 이 세상의 것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에 현혹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위를 바라보기 보다는 옆을 바라보게 되지요.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서 비교하고, 열등감에 빠지고, 상처받고 ···.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간, 참된 삶은 위를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즉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위로 향하는 사람, 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람, 즉 하나님을 바라보고 호흡하는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인간의 호흡 만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지막 호흡은 한 숨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하는 자의 마지막 숨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원하신 숨결, 그 진리의 숨결, 그 사랑의 숨결, 그 거룩하신 숨결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즉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과 그의 삶은 신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이 유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풍요로운 물질적 번영과 과학적 진보를 인간들이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내면의 삶은 여전히 무기력하고 웃음기를 잃었으며, 다른 사람과 세상의 일들에 대해 냉소적이기만 할까요? 하나님의 숨결을 상실한 까닭이요, 자신의 호흡만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 위를 바라보면서 호흡을 시작하고 죽을 때에 위를 바라보면서 숨을 거두는 것이 인간이건만, 그것을 상실했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것은 아래로부터 솟아오르지 않습니다. 옆으로부터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유한하기만 한 이 세상에 무슨 참된 것, 그리고 새 것이 만들어질 수 있겠습니까? 참된 것, 새 것은 오직 위로부터만, 영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위를 향해 호흡하는 사람이 될 것을 간곡히 촉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고,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갈 것이고, 즐겁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유쾌, 상쾌, 통쾌

‘노먼 키즌’라는 분이 <질병의 분석>이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지독한 병에 걸렸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여 건강한 삶을 되찾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해답은 ‘호탕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키즌은 평소에 자신이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버릇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병이 깊어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웃음을 통해 상황을 반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병이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쥐목에 속하는 ‘기니피그’라는 실험동물에 격렬한 분노를 느낀 사람의 혈액을 주사했더니 2분이 못되어 죽고 말았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원망, 불평, 분노 등은 매우 강력하고 치명적인 독소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현실이 힘들다고 찡그리고 원망하고 화를 내면 그것은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고,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웃으면 우습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 환난, 실패, 좌절, 미움이나 적대감, 분노, 원망이나 불만, 그리고 가난까지···. 그 앞에서 웃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전부 작게, 조그맣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웃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루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어린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가 전투 중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는 금방이라도 처형할 듯한 분위기였고, 그래서 그는 두려움과 공포로 바짝 진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긴장을 덜어내기 위해 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성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살 넘어 간수에게 작은 목소리로 부탁을 했습니다. 
“혹시 불이 있으면 좀 빌려주시겠소?”

간수가 그를 슬쩍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생텍쥐페리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그 간수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소에 답이라도 하듯이 간수는 생텍쥐페리에게 다가와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더니, 생텍쥐페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자식이 있소?”
“그럼요. 있고 말고요.” 

생텍쥐페리는 지갑에서 가족사진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생텍쥐페리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고, ‘가족을 만나지 못할까 겁이 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아무 말 없이 감방 문을 열어 주었고, 감방 뒷문을 지나 마을 입구까지 안내해 주고 되돌아갔습니다. 작은 미소가 세계적인 작가 생텍쥐페리를 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웃음의 가치, 즐겁게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을 더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설교를 시작하면서 목사의 사명은 세상 모든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이것은 목사의 사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도 여러분이 웃으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여러분을 진정으로 웃게 해 줄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유쾌함을 받습니다. “유쾌(愉快)”란 ‘마음이나 기분(氣分)이 흐뭇하고 좋은 상태(狀態)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서, “상쾌(爽快)”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분이나 마음이 아주 시원하고 거뜬함’을 뜻합니다. 마치 ‘목욕을 하고 나니 온몸이 날아갈 듯 상쾌하였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그리고 “통쾌(痛快)”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강한 표현인데요. ‘아주 유쾌(愉快)함, 불평(不平)이나 불만(不滿)스럽게 여기던 일이 뜻대로 잘 풀릴 때에 마음이 매우 상쾌(爽快)함, 아주 즐겁고 시원하여 유쾌함’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특히 이 통쾌라는 말은 고난이나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한 기분을 뜻하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불경기와 점점 나빠져만 가는 상황 속에서, 여러분의 모든 웃음을 앗아가는 상황에서도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통쾌하게 웃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미래를 예상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에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유쾌한 시간이 올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결단하여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유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유쾌해 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예수님을 믿으면 직장과 사업에 유쾌한 일들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시고 항상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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