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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사람 (시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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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시 1:1~3)


성도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것, 그래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된 것은 가장 복된 일인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아~멘!

동시에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다른 사람보다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복된 살기 원한다면 복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은 복 있는 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50편 6절에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고 선언하며, 찬양하고 노래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바로 '호흡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숨을 쉬는 호흡'을 말합니까? 물론 살아 있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더욱 귀한 의미가 숨어 있는데 바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호흡이 있는 자"는 누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호흡을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의 <콜 하느솨마 테할렐 야흐>를 직역하면 '<호흡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시편에 언급된 것과 같은 악기들을 연주함은 물론이고 온갖 기예(技藝)를 동원한 음성으로써 또한 지정의(知情意)의 모든 인격의 정성이 담긴 영혼의 소리로써 아름다운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가리키며 그리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복 있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호흡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호흡을 맞추어 찬양하며, 감사하며, 모든 받은 은총을 잊지 않고 영광 돌리며 사는 자가 복 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호흡을 하는 자'는 누굽니까?  오늘 읽은 시편 1: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인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는 자는(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o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라고 하였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은 세상에 취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취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묵상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는 '묵상하다'는 뜻 이외에 본래 '말하다', '속삭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로 볼 때, 의인은 묵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하게 암송하며 진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복 있는 자의 히브리어는 ‘아쉬레이’는 복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복 있는 자는 한 가지 복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복이 함께 몰려옵니다. 그래서 복은 언제나 복수로 사용됩니다.

성경 서열에 <욥기 다음에 시편이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욥기 다음에 시편을 배열해 놓았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분명히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 중요한 의미가 과연 무엇입니까? 욥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원하시는 본심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를 읽어보아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본래의 중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시편을 읽으면 하나님과 올바른 영적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욥기 다음에 시편을 배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도 때로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인생이 무엇인지 노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시편 119: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Before I was afflicted I went astray, but now I obey your word.)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모든 인생들이 개인적인 목표나 목적이 다 있겠습니다만 보편적으로 다 갖고 있는 목표는 성공하는 인생, 혹은 복 받은 인생을 원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복을 받을 때 아무런 대가 없이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은 복은 얼마 못갑니다. 곧 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된 복은 반드시 고난과 시련을 겪은 후에 받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경우 십자가 고난의 길이 있었기에 부활의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고난이 있어야 부활의 복이 있습니다. 

시편  34:19절에도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A righteous man may have many troubles, but the LORD delivers him from them all;)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고난의 삶이 있어야 인생들 올바르게 귀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이 귀한 비밀은 성경을 읽어 보아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가 하는 것은 성도 여러분 자신의 상태와 모습에 따라 다르게 나타사십니다. 여러분이 이왕이면 복 있는 사람답게 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 있는 사람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복 되게 사는 방법이 성경에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안에서 살면 됩니다.

디모데후서 3: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라고 하였으니 복 되게 사는 방법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복 있는 자는 시편 말씀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개괄적으로 정의한다면,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특히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이란 율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흔히 모세 오경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의 계시'라는 점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교훈 또는 훈계>라는 의미를 가지며 아울러 <하나님의 교훈은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경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절에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본 의인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그 특성은

1)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기쁨으로 반응하며

2) 계속적으로 그 율법과 관계를 맺는 삶을 삽니다(수 1:8).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여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즐거위하여'라는 말은 의인이 토라(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뻐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그에게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면 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도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부부관계가 회복되면 가정의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부부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어떠한 방법으로도 가정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자식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형통한 것만 복이 아닙니다. 부자였던 청년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고 주님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부자 청년을 복 있는 자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창세기12:2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예 베라카"는 곧 '너는 복이 될지라'는 뜻입니다. 장차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너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당시 아브라함의 지금의 처지가 어떠하였습니까? 자식도 없었습니다. 자기 땅도 없었습니다. 양과 가축 몇 마리를 가지고 사는 유목민이었습니다. 남의 땅에서 눈치 보면서 살아야 하는 뜨네기 즉, 나그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됩니다.

1) 아브라함으로 인한 물리적 풍요(슥8:12)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2) 사람들이 상호 축복의 양식(樣式)이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합니다.

3)  본문에서 '복은 영적인 복으로서 곧 아브라함은 그로 말미암는 복의 기준이 되리라'는 뜻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세 가지 견해중 세 번째 견해에 저는 동의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이란 단순한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인 메시야가 나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은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미칠 수 있는 것이니(살후 2:13,14)그 같은 메시아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 칭함은 당연합니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정립되어 있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가게 문 앞에 “무엇이든지 다 파는 가게”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가게에 가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다 살 수 있다고 소문난 그런 가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가게를 찾아와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복을 사러왔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주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복은 얼마든지 드리지요. 다만 이 가게는 씨앗을 팝니다. 복의 씨앗을 드릴 것이니 가지고 가서 잘 가꾸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당장에 얻기를 바랍니다. 당장에 열매를 얻기를 바랍니다. 꽃이 피지 않고 바로 열매는 맺는 식물은 많지 않습니다. 바로 열매를 맺는다 할지라도 바로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없습니다. 반드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믿음의 과정이 바로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목숨까지 내어 주셨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약속함과 같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구원받은 자녀에게 성경의 모든 약속대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락해 주십니다.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묵상하여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원만한 관게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늘과 땅의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약속을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즉, 식물로 비유하면 씨앗을 주십니다. 그 씨앗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의 씨앗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은혜의 씨앗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과 은혜의 씨앗을 성경 말씀으로 묵상하여 심어 놓고 그 성경 말씀을 실천함으로 내가 잘 가꾸어야 합니다. 복 있는 삶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방법은


2. 믿음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3까지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올바른 믿음의 삶의 살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는 신앙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과 같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우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씀을 실천함으로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믿음의 열매를 따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씨앗도 함께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멀지 않아 기쁨의 단을 거둘 때가 옵니다.  문제는 씨앗을 뿌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나도록 믿음으로 반드시 실천하고 순종함으로 잘 가꾸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안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은 바로 의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삶의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112:1). 그래서 복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사는 삶, 구체적으로 말슴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많은 노력과 좋은 습관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세요. 복 있는 사람은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 1절에서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한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임' 은 <표적을 빗나가거나 또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하나님의 길(율법)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가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고 추구하는 삶을 먼저 멀리하든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복을 받으려면 믿음을 가진 자로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자와 함께 자리에 앉으면 안됩니다.'

이런 복된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달아 믿음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공자 선생이 쓴 논어는 모두 10권 20편 그리고 5백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씀 중에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인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에 "조문도 석사가의(朝楣 夕死可矣)"란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길(진리)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길을 듣는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해 영생의 길, 구원의 길, 행복한 길을 찾는 구도자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바르게 걸어가는 자, 바로 믿음으로 행하는 그 사람을 의미하며> 그래서 <복 있는 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행복이 곧 복 있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복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믿음으로 살아야 천국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이며, 현재의 고난과 환경을 뛰어넘어 소망이 보이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의학 인체 연구가로 유명한 하버드대학의 세계적인 교육학자이며, 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 박사>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 가지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세계보다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기에 소개합니다.

1) '웃을 때는 마음껏 웃는 사람이 건강하다'고 했습니다. 

장수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웃는 인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나치게 체면을 차릴 것 없이 웃음이 나올 때는 가급적이면 마음껏 웃어야 합니다. 

'J. 웨이스'라는 작가는 <인간의 웃음을 하나님도 만족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문화 인류학자인 '클루크혼(C. Kluckhohn)'은 식인종들의 공통점은 ‘웃음이 없는 족속’이라 했습니다. 식인종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웃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웃음(笑)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며, 숨어 숨 쉬는 살아있는 만병통치(萬病通治) 의사와 같은 무한한 꿈의 에너지입니다. 요즘은 건강을 증진하는 직업으로 웃음치료사 자격증까지 주고 있습니다. 

엄마가 아가에게 주는 웃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꿈을 심어주고, 무한한 애정을 아낌없이 넣어주는 사랑을 전수하는 마음의 에너지입니다.

연인이 서로에게 주는 웃음은 이 험한 세상 함께 가자고 다짐하며, 영원을 다지고 연정(戀情)으로 이어주는 꿈을 심는 희망에 메시지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주는 웃음은 한 평생 한 길을 향(向)해가는 믿음(信)과 소망(所望)의 영원한 텔레파시 기도인 셈입니다. 

웃음은 건강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만듭니다. 소담처럼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수 없습니다." 직장인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1위는 41,2%가 회사 내에서 인간관계 불화 때문입니다. 스트레스 우울증현상을 호소하는 것도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1위는 관계성이 깨졌을 때, 2위 교인들의 무관심 때문에, 3위 사람과의 어색함 때문에 모두 인간관계와 관계있습니다.

미국의 성공조직은 35%시스템과 65%분위기에 의해 좌우됩니다. 한국은 90%가 분위기이고 10%가 시스템입니다. 

한국은 되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는 어떤 프로그램도, 시스템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사람이 만듭니다. 분위기를 만드는 소재 중에 돈들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웃음’입니다. 그래서 유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훨씬 유우머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표정은 많이 밝아졌지만 유머가 약합니다. 유우머스러운 사람을 경박스럽다고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웃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바꾸어졌습니다. 요즘은 분위기 메이커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분위기 메이커는 유머스러운 사람입니다. 늘 웃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얻었더라도 웃음이 없다면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웃겼습니다. 특히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고 했을 때 믿음이 없어 웃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웃는 자’란 뜻을 가진 이삭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한 번 웃어볼까요.

소심해서 여자 친구 하나 없는 남학생이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습니다. 할 수 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거리며 한참동안 고민하다 옆에 서 있는 여학생에게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저 회수권 한 장만 꾸어주세요” 그러자 남학생을 한참 쳐다보던 예쁜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시간 있으세요.” “예, 저 시간 많은데요.” 남학생의 이 말을 듣고 있던 여학생이 하는 말, “그럼 걸어가세요!”라고 했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여러분 같으면 이런 경우에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모든 것을 범사에 감사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감사하며 삽시다. 웃는 것이 복이요. 보배다>라는 교훈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건강하고 행복한 조건은 '울 때 마음껏 울라'고 했습니다. 

웃음의 반대인 슬픔 즉, <울 때는 마음껏 울어야 한다>고 합니다. 눈물의 선지자란 별명을 가진 예레미야처럼 마음껏 울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정도로 울었는지 아십니까? 예레미야애가에 보면 여러 곳에서 예레미야가 얼마나 많이 울며 기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1:2말씀에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
1:16말씀에도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2:11절의 말씀입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문더러 지도록 울었겠습니까? 심지어 얼마나 울부짖었으면 창자가 끊어질 듯 했겠습니까? 

3:48-30에 보면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그런데 시편126편 5-6말씀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울 때는 마음껏 우십시오. 심청전의 심봉사도 울다가 눈을 떴습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 5월 22일 태어나 1626년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던 조선 조 17대 효종대왕은 울다가 나라를 구했습니다. 

눈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맑게 닦아줍니다. 눈물은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게 해 줍니다. 눈물은 고통스런 경우도 있지만 죄의 고통스런 눈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눈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사는 것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정의 어려움이 많다보니 사회가 점점 삭막해져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눈물의 촉촉한 인간미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살맛이 나게 만듭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공관복음에 모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유독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6절에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라는 말씀입니다. "습기가 없다"는 표현입니다. 바위에 떨어진 씨가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습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습기는 생명유지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습기가 있어야 부드러워집니다. 부드러워야 품을 수 있습니다. 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자꾸 마음에 습기를 제공해야 합니다. 감동 받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깨진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토로해야 합니다. 메마름으로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바위가 됩니다. 

다윗의 전성기는 이스라엘을 통일시킬 때도 아니고, 골리앗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둔 때도 아닙니다. 범죄 이후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자기 죄를 고백할 때입니다. 그 고백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깨진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깨진 마음은 눈물이 있습니다. 습기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편 시 51:17절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고 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깨진 마음을 원하십니까? <습기의 회복, 눈물의 회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습기가 회복되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멕시코 지역에 ‘아나브랩스’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눈이 4개인 것이 특징입니다. 눈 2개는 물속에 있고, 눈 2개는 물 밖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 밖에 있는 눈으로는 곤충을 잡아먹고, 물속에 있는 눈으로는 공격을 방지합니다. 그런데 물 바깥의 눈은 눈물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물 밖에 있으면 눈이 메말라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아나브랩스’는 주기마다 한 번씩 깊이 물속에 잠깁니다. 그래서 메마른 눈을 충분히 적시는 시간을 갖습니다. 충분히 적셔진 눈은 다시금 잃었던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아나브랩스’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회개하여 눈물이 마르지 않고 촉촉해져야 영적인 세계가 보입니다. 촉촉해져야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촉촉해져야 열매가 있습니다. 

메마른 눈으로 바라보니까, 세상이 안보이고, 미래가 안보이고, 이웃이 안 보이는 것이다. 주기마다 한 번씩 기도로 눈물의 샘에 잠겨야 합니다. 통곡의 샘에 잠겨야 합니다. 잠겨야 보입니다. 잠겨야 시력이 생깁니다. 잠겨야 사역이 됩니다. 

잘못 보았던 사람도 고난을 통해 눈물의 골짜기를 건넙니다. 그의 눈이 눈물로 충분히 촉촉하게 적셔집니다. 비로소 미래가 보입니다. 찾지 못하던 피할 길이 보입니다. 막막하던 상황에서 살 길이 보입니다. 적셔져야 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통곡과 눈물(히 5:7)>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보는 삶을 사셨습니다. 열매가 없습니까? 땅이 적셔지면 열매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만든 사람의 눈에 눈물샘이 터진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요, 진정한 의미에서 인재입니다.'  눈물샘이 터지면, 사막 같은 영적 세계가 비옥해집니다. 아픔을 보는 눈, 고통을 보는 눈을 가진 ‘영적인 아나브랩스’가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많이 나와야 합니다. 

눈물이 적셔지면,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눈물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눈물에는 회개의 눈물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회개의 눈물로 복 있는 삶을 만들어 가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가드너 박사는?


3)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성경 잠언12:15절 말씀에도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스코틀란드 속담에 “아내의 충고는 쓸데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남편에게는 재앙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인의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3대가 편안합니다.

잠언 13:10 말씀에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하였고, 잠언 12:15절에도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낭패를 당한 역사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충고를 가볍게 생각하다 화를 당하게 됩니다.> 

'삼손'의 경우 부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충고, 목회자의 충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건강하고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가드너 박사'는 <웃을 때 마음껏 웃고, 울 때는 마음껏 울어라>고 했습니다.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누구든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따라합시다. <행복은 물질적이고 조건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미국 기자들과 언론사들이 1985-1995년 사이에 미국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선정하여 뽑았습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연 <로렌스 헤레트>라는 사람이 뽑혔습니다. 로렌스 헤레트는 공사장에서 일하는 목수인데 일을 하다가 전기 감전으로 거의 죽을 자리에 갔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 후에 다시 다른 장소에서 공사를 하다가 다시 감전사고로 죽을 위기를 맞이하였지만 또 다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국가를 대상으로 보상 받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서 재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판을 진행하던 중에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왔을 때입니다. 담당 변호사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그 변호사와 눈이 맞아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릴 무렵, 건강이 나빠 진찰을 했더니 몸에서 간암이 발견되었습니다. 간암 진단을 받은 헤레트는 한 달 동안 고통 중에 지냈습니다. 한 달 후, 다시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했더니 간암 진단이 의사의 오진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겨우 한숨을 돌린 헤레트는 이번에는 폐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난과 병과 싸우던 중, 폐가 극도로 나빠져 버린 것입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이제는 등에다 산소통을 지고 다니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산소통을 지고 운전을 하고 가던 중에 트럭이 차를 뒤에서 들이 받아서 차가 종이 한 장처럼 구겨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기저적으로 목숨이 살아있어 기어 나와 옆에 있는 건장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건강한 사람이 구조대원이 아니라 강도로 변해 총을 들이대며 있는 것을 다 내어놓으라고 하고는 다 털어서 가버렸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로렌트 헬레트'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당신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복된 사람입니다. 아직도 이 땅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생명이 붙어 있기 때문에 복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진다면 그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때로는 하박국처럼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하고, 욥처럼 모든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가장 복 있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은 평범한 생활 속에 있습니다. 행복을 라틴어로 <비티타스(beatitas)>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만든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행복은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행복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복된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에 반응하고, 순종하고 실천해서 복된 인생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보이티우스가 쓴 책 『철학의 위반』이란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자기 안에 있다”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복은 바로 여러분 마음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바로 여러분의 믿음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귀한 교훈을 합니다. 본문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믿음 안에 참된 복이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삶을 위하여 옛 삶을 버리는 믿음 안에 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어렵더라도 말씀 묵상하고 믿음으로 그 말씀을 실천하여 여호와와 아름다운 관계를 잃어버리지 않는 좋은 습관과 노력을 지속적으로 가진다면 그것이 곧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과 호흡하며 동행함으로 그것이 곧 복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짜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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