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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베드로 (행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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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베드로 (행 4:5~12)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단순 확실한 방법은?

16세기의 카르멜 수도회 수사였던 브라더 로렌스는 오랜 세월 동안 수도원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주님의 일로 여기고 지속적인 사랑과 순종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임재 하심을 실생활 가운데서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나는 번철 위의 오믈렛을 뒤집을 때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일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그분의 임재 하심을 느끼기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다. 무슨 일에나 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좀 더 쉽고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는 데는 복잡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정직하고 단순하게 그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은 사색적인 많은 책들을 읽거나 고행을 하거나 QT를 하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거나 어떤 영성훈련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맡은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그 일을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나님께 예배하듯이 실행한다면 거기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고 기도가 되게 합시다. 


진정한 믿음의 삶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믿음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진정한 믿음의 삶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만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 점검하는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믿음이 돈독하고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한 사람 생각하세요. 여러분, 그 사람의 믿음이 돈독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왜 그 사람이 믿음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대체로 그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든지, 교회 봉사를 잘 하고 있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만 말하지 않고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행동과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믿음의 삶이 속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삶 가운데 한 조각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믿음의 삶의 겉옷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믿음의 삶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삶입니다. 앞서 언급한 브라더 로렌스는 평생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 하고 청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만족과 행복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브라더 로렌스는 삶의 현장, 부엌봉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일터인 부엌을 성전으로 만들었고 그의 일을 예배와 기도로 만들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삶의 현장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현장을 하나님이 임재 하여 역사하는 성전으로 삶고 삶을 예배와 기도로 만들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만족과 행복을 보수로 받는 사람들

웨인 오우츠는 저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목회상담학자입니다. 그는 ‘일 중독자들’이란 저서에서 켄터키 주 겟세마네 수도원을 방문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 수도원은 치즈 제조로 유명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직접 작업을 하는데 한 명도 힘들어 하거나 지루한 기색이 없고 모두 명랑하게 웃는 낯으로 찬송하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오우츠 교수는 한 명의 수도사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 수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치즈로 유명해졌습니다. 다만 치즈는 생계일 뿐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치즈를 만드는 노동시간 자체가 우리의 기도시간이요, 찬송시간입니다. 치즈 제조는 수익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기쁨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버는가 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일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며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수를 현금으로 받지 않고 행복과 만족이라는 보수를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오우츠 교수는 찬송을 부르며 노동하는 그들의 만족한 얼굴을 볼 때 대학교수요 저술가란 이름을 가졌어도 기쁘게 일하지 못하는 자기를 많이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겟세마네 수도원 수도사들은 예배드리는 시간에만 하나님이 임재 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곳에도 계시며 그곳에서도 함께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앞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며 그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과 진실함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족과 행복을 주셨습니다. 


재판정을 하나님의 성소로 만드는 베드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배당에서 기도하면 찬송하며 예배드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는 재판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 속에는 재판정에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그곳을 성소로 삼으시며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는 은혜의 자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자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를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여러분, 사도행전의 이야기, 특히 베드로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디서든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 함께 가시며 어디에서든지 임재 하여 역사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의 아주 중요한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120문도가 함께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던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성전이 아닙니다. 그곳은 가정집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여 새 시대의 문을 연 곳도 바로 그곳입니다. 한 번 설교에 3000면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은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예루살렘 거리입니다. 사람들이 감격하여 하나님께 돌아온 앉은뱅이를 고친 기적의 현장은 어디입니까? 성전 미문 밖에 있는 거리에서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재판을 받는 법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찬양하며 감사하는 이 성전 예배에도 임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에서만 우리들과 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 직장, 여러분들이 걸어다니는 직장, 여러분이 타고 있는 전철과 자동차, 재판정, 국회 사무실, 청와대 등 어디서든지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임재 하며 역사하며 하늘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먼저 영의 눈을 열어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거기에 임재 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말을 하기 전에, 그리고 일을 하기 전에 거기 임재 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곳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고 여러분들의 일을 예배가 되게 하고 기도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임할 것입니다.


약한 자를 들어 지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

베드로는 본래 학문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공회, 권력과 지식과 정보와 모든 부와 귀를 가진 대단한 지도자들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혜 자들과 권세 자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과 14절을 함께 읽을까요?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뛰어난 하나님의 사자로 만드십니다. 약한 자들을 택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충만입니다.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충만할 때에 지혜로운 자들보다도 더 지혜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베드로에게 충만할 때에 베드로는 강한 자들보다도 더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5절에서 7절 말씀을 함께 읽읍시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자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지금 이 법정에는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그리고 알렉산더와 그 가문들이 다 모였습니다. 유대를 대표하는 모든 권력자들과 지혜 자들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지금 그 앞에 시골 갈릴리에서 어부 일을 하다가 올라온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이들의 대결은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수많은 이리 가운데 외로운 양 한 마리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조금도 꿇리지 않을 뿐 아니라 힘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할 말을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8절 말씀이 그 대답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이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6-20).

여러분, 이리 가운에 양을 생각해 보세요. 잡혀먹히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 양이 어떻게 이리를 이길 수 있습니까? 달리기를 연습하면 될까요? 이빨을 단단히 하면 될까요? 사나움을 연습할까요? 갑옷을 입을까요? 어떤 무기를 준비할까요? 어떤 방법으로도 양은 이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강하신 양의 목자가 함께 있으면 이리는 꼼짝할 수 없습니다. 목자가 있으면 양은 살아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리 가운데 있는 양들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보내어 줍니다. 베드로에게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지혜자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권세 자들보다 더 권세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이 건물을 필요로 하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지지난 주에 저는 모스크바장로회 신학대학교에 강의하러 갔다 왔습니다. 모스크바장로회신학대학교의 이사장 이 흥래 선교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신학교 건물을 사서 증축하고 리모델링을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건장한 러시아 청년 7명이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면서 이 건물은 자기네 건물이니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그 순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지 않으면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순간 장로님에게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고 하나님의 지혜가 임했습니다. 그는 이리떼와 같은 그들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담대함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의지하여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이 건물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지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우리보다 이 건물을 더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이 건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용할 경우에 이 건물이 더 유용하고 우리들에게 더 필요하다면 이 건물에 대해서 손을 대지 마십시오.”

그러고 나서 이 장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건물은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입했습니다. 선교사역이라는 것은 신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만들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병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신학교는 목사님들을 양성하여 도움과 섬김과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게 하는 것입니다. 병원은 무료병원을 세워서 이 지역에 사는 러시아 인들을 무료치료하게 될 것입니다. 이 건물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것이고 20여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불하게 될 것이고 가족 수당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로 말미암아 500여명의 러시아인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로 안수를 받으면 교회를 개척하여 러시아인들의 영적인 치료와 구원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은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무료 치료를 행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보다 더 필요한 일을 하겠다고 충분한 설명을 해주면 이 건물을 당신들에게 드릴 것입니다. 우리가 러시아에 온 목적은 여러분 러시아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건물로 러시아인들이 우리가 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그냥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장로님은 간절히 기도하면서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마치 선심이나 쓰듯이 ‘이 건물을 당신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와서 이 건물을 빼앗으려고 하면 우리가 그들을 손보아 주겠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 그 건물에는 학교, 기숙사, 병원, 사무실 등을 갖추어 모스크바 장로회신학교와 러시아 선교를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충만하면 아무리 무섭고 험악한 상황에서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 선포하는 베드로

베드로는 평범한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지금 베드로 앞에 서 있는 공회원들에게는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는 시골뜨기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 곧 예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임한 예수님의 영은 이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보이는 세상보다 더 크고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한 베드로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과 권세만을 보았습니다. 그는 확신했습니다. 이 대결은 자기와 공회원들과의 대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공회원들과의 대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입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예수님의 이야기만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를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9,10). 나면서부터 앉은 뱅이 되었다가 이제 온전하게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을 고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0).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이제 하나님이 다시 살려서 모퉁이의 머릿돌을 삼았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증거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충만하면 오직 예수님만 보입니다. 성령님이 충만하면 오직 예수님만 증거 하고 예수님의 뜻만을 따릅니다.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어쩔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38절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하고 선언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님이 충만함으로 세상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당국자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대제사장들, 그들의 문중이 다 모였지만 베드로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5장 4절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이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한일서 4장 4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예수님만 자랑하고 그 예수님만 증거 하고 그 예수님만 순종하는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모든 승리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예수님을 순종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세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를 심으세요. 그러면 바로 거기에 임재 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기적 신앙을 가지고 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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