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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약속 (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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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약속 (수 1:1~9)
      
  
며칠 전 신문을 봤더니 지금은 작고한 어느 재벌 창업주의 사주에 대한 연구 내용이 실렸습니다. 연구가의 말에 의하면 이 재벌 창업주의 사주는 오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주라는 것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한 가지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 이런 이론은 당사자가 죽은 다음에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만약 이런 이론에 진실이 있다면 당사자가 아직 젊었을 때, 아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무명인일 때 그때 예측을 하면 과연 거기에 뭔가가 있다고 신뢰할 수 있겠지만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이런 사주 때문에, 이런 것 때문에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어떤 원리, 이론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과거에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하면 그것으로 미래를 점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바라고 있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아요. 미래는 우리가 섣불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미래에 대해서 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말을 알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결말을 모르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고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찾아갈 때 베들레헴이 목적지인 것을 알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별이 베들레헴 위에 와서 멈추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스페인의 문호 세르반테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자유라고 했는데 사람이 자유하기 때문에 미래를 미리 알 수 없는 것이고 미래가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것이고 사람 하기에 따라서 자신의 삶에 방향이 결정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도 존중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 사람들이 선한 결과를 얻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보혜사를 보내리라고 말씀하셨느냐하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고치고 감동하고 우리로 회개하고 믿고 기도하게 하는 것은 그것은 미리 정해진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우리의 파트너가 되어서 우리가 생각하고 묵상하고 또 기도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길을 찾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재벌 창업주는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 자기의 사주가 좋다고 생각하고 살지 않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소신껏 살다보니까 좋은 성과도 거두게 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칭송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김구 선생이 젊었을 때 과거를 응시했다가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먹고 살아야 되겠기에 관상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관상을 봐주면 먹고살게 되지 않을까 해서 관상을 배우다가 내 관상을 한번 봐야겠다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고 관상을 봤더니 아주 형편없는 관상이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 관상도 이런데 어떻게 남의 관상을 봐줄까 낙심하다가 책을 읽노라니 이런 글이 있었다고 합니다. ‘얼굴이 잘 생긴 것은 몸이 튼튼한 것만 못하고 몸이 튼튼한 것은 마음씨 좋은 것만 못하다. 마음씨가 좋은 것이 잘 생긴 얼굴이나 튼튼한 몸보다 낫다’ 여기에서 용기를 얻고 그리고 열심히 살다보니까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진짜 진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운명을 어떤 외적인 조건에 연결시켜서 설명하려고 하지요. 별자리든, 타고난 일시와 시간이든, 심지어 혈액형이든. 저는 혈액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웃깁니다. 도대체 혈액형이라는 것이 네 가지 밖에 없는데 인생을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사람이 어떻게 될지 섣불리 판단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사람을 파악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다면 사람은 변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남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놀라운 면이 있고 사람은 변할 수 있고 운명이 달라질 수 있고 남이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반대로 그것이 선한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아주 악한 일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미리 파악해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미리 사람을 단정 짓지 않습니다. 미리 단정 짓는다면 사울 같은 사람에게 임금의 자리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고 가룟유다를 예수님의 제자로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왕은 이후에 하나님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알고 아예 애초부터 차단하면 좋지 않으냐.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고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하나님이 알았느냐? 그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아셨을 수도 있고 모르셨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도록 미리 예정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예정돼 있었다면 왜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겠습니까. 미리 예정된 것이라면 먹지 말라는 명령은 무의미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먹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미리 정해졌느냐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이고 그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열심히 좇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은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부러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불확실한 미래를 섣불리 확실하게 만들려고 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사십 년 동안 할 때 그 날에 먹을 만나를 그날 거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은 염려하지 말고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고 그 날 먹을 양식을 그날 거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 중에 좀 더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이왕이면 내일 것까지 거두면 좋지 않겠느냐 해서 내일 먹을 분량까지 거두어 들였을 때 어떻게 되었느냐? 썩었어요. 벌레가 생기고 썩었습니다. 하나님은 내일 먹을 것까지 미리 거두게 하지 않고 그 날의 양식만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미래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고 미리 섣불리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감옥에 갑니다. 

사람들이 이미 가진 것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이 가지면 더 미래가 보장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조금 더, 조금 더 이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법을 어기고 또 내가 건너서는 안되는 것을 건너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오늘 염려는 오늘로 족하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과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하는 일입니다. 이 위대한 사명을 여호수아에게 맡겼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구약에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예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사실에서 율법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고 여호수아가 예표하는 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헬라식 발음이고 히브리 식으로 발음하면 여호수아입니다. 그러니까 동명이인이지요. 

그러나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인도했다는 데에서 율법의 한계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복음의 놀라운 원리가 이미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에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업을 앞두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미래의 성공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고 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고 또 이 과업을 감당할만한 믿음을 얻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언급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모세는 죽었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냉정한 말씀입니까. 모세와 하나님이 그렇게 가까웠다면 어떻게 이렇게 냉정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모세가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만일 여호수아가 지금까지 모세를 의존하고 있었다면 하루빨리 모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는 과업을 달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내 종 모세가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경제적인 불황을 우리가 앞두고 경험하면서 빨리 받아들여야 되는 것은 이전의 방식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금융기법은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 그것은 우리를 도와줄 수 없고 우리는 새로운 현실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방식을 버리고 지금 필요한 방법을 하루빨리 찾아야 됩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에요. 과거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고 홍해를 가르고 여기까지 인도했지만 모세는 죽었습니다. 모세는 더 이상 이들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하루빨리 그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여호수아가 이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변화는 삼천년 전에도 신속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변화가 늦고 이십일 세기에는 변화가 빠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도 변화는 빨랐습니다. 그 당시에도 사람이 빨리 빨리 적응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한번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천사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신비한 사건입니다. 손님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고 달려 나갔다고 했습니다. 천천히 걸어간 것이 아니고 달려 나가서 그들을 영접했다고 했는데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행하시는 일들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둘러서 그것을 빨리 깨닫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변화를 수용해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경험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바디매오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었지, 만일 바디매오가 주저하고 침묵했다면 예수님은 서지 않고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지나가실 때 삭개오가 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서 지켜봤으니 망정이지 가만히 있었다면 예수님은 지나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기회와 은혜를 받을 만한 기회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오는 날이 있지만 늘 머무는 것이 아니고 지나갑니다. ‘지금은 구원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은혜의 날이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에 우리가 그것을 붙잡는 것이 믿음이에요. 그게 믿음이고 주님이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도 모세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되고 그러면 이제 모세를 의지할 수가 없고 여호수아가 직접 이 일을 맡아야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두 가지를 명하십니다. 

첫째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라’ 이 말씀을 6절, 7절, 9절, 세 번에 걸쳐 말씀하실 정도로 강조하십니다. ‘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우리는 마음이 착하면 될 줄로 생각하지만 착해서만은 안되고 마음이 강해야 됩니다. 그 이유는 인생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인생의 시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시키시고 능력을 주시지만 우리가 강하고 담대해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대신 우리의 마음을 담대하게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이 강하고 담대해져야 됩니다. 
  
두 번째는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형통하리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착해서만도 안되고 강해서만도 안되고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해야 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미래는 어떤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게 아니에요. 별자리든, 그의 사주든 팔자든, 그의 관상이든, 이런 데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의 미래는 그 마음속에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느냐에 좌우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느냐에 여러분의 미래가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있는가,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가,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되고 그 말씀이 움직이고 역사해야 되고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할 때 그것이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이미 결정돼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오픈해 두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좌우되도록.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픈해 두셨습니다. 믿음대로 되게 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믿고 믿지 않고, 또 얼마나 믿고 얼마나 큰 믿음을 갖느냐 하는 것은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이만큼의 자유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냥 내 멋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네가 한번 네 소신껏 믿음대로 살아봐라’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시간과 또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순종할 수 있는 시간과 이런 것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다음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축복받은 사람이에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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