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의 열매 (갈 5:22~24)

  • 잡초 잡초
  • 212
  • 0

첨부 1


성령의 열매 (갈 5:22~24)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힘주어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몇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요한이 성도들을 향해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한 것처럼, 사도 바울 역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거듭난 성도의 삶과 그 놀라운 복에 대하여 선포하였습니다. 그 중에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려고 하는 말씀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것은 곧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누리는 삶입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구별합니다.  요한과 바울 등 1세기 기독교 초기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이 말씀들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이 말씀을 따라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육체의 욕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별이 되고 또 말씀을 따라 새롭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로 변하여지며 또 그 아름다운 삶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이 시간에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중심으로 나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살피고 그 아름다운 열매를 충실히 맺어가는 자녀로 살기를 다짐합시다.

바울은 5장 16절 이하에서 육체를 좇아 행하는 삶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명확하게 대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단순히 감각적인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떠난 죄악 된 인간 본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악한 욕구에 끌려 다니는 인간 본성입니다.  반면에, 성령은 새로운 생명입니다. 결과적으로 육체는 죄의 본성을 따라 무질서하고 무가치한 일을 낳고 성령은 생명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의 일들은 무엇인가요?  19절부터 21절에 나열된 그 일들의 목록을 읽어봅시다.  “육체의 행실은 분명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와, 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 중에 어느 것 하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본을 삼아 따를만한 선한 모습이 없습니다.

풍향계가 바람이 불면 그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 자아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갈 것이고 성령의 바람을 따라 그 가운데 걷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고 그것들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결국, 내가 성령을 선물로 받았느냐?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느냐?  받아들였느냐?  그리하여 그의 생명을 소유하였느냐? 여기에 따라 내가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인가 아닌가 차이가 드러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 즉시 흠이 없이 완성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는 누구나 젖을 먹는 어린 아기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아기였지만 날마다 자라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성자처럼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드디어 생명이 그 속에 들어가 그를 자라게 만드는 변화의 증거가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기 전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살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들어온 순간 그 속에 변화의 씨앗이 꿈틀거리고 육체의 껍질을 벗으며 생명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아직은 여전히 육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생명이 육체의 욕심과 투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증거로 그가 육체의 욕심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 승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최후 승리는 우리의 생이 마치는 그 날입니다. 다만 승리를 향해 투쟁하고 있는 삶입니다.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육체에 매여 무가치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심지어 하나님의 의로운 법조차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기를 자랑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인간의 철저히 타락한 본성을 따르는 싸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에 그런 사람이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간증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완전한 사람인 줄 생각했고 또 그것을 지키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리석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가두었고 죽음의 자리로 몰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싸우기는 열심히 싸웠는데 싸움의 본질을 알지 못했고 헛된 싸움을 싸웠던 청년 사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자신처럼 율법을 따라 살지 않는 약한 자를 경멸하고픈 우월감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의로움은 사울 자신의 영광과 의로움 다음에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공과 사람들의 평판과 존경과 부러움을 얻는 것이 일차 목표였을 뿐입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육체에 사로잡혀 살았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참 뜻을 알리고 싶었으니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 속에 분명하게 들어와 자리잡고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함께 하자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나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거주하는 생명이 나를 위해 싸우고 나와 함께 싸웁니다. 나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아시는 성령께서 나를 도우시고 싸울 힘이 있게 하시며 나를 위하여 친히 싸워주십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그 생명의 성령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의로움과 능력과 선함을 의존하며 살고 있는가? 

21절 말씀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삶 가운데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 등과 같은 선한 열매를 보이며 삽니다.   그리고 육체를 따라 무질서하고 죄악 된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그것을 금하는 엄한 법이 있지만 이런 선한 열매 맺는 삶을 못하도록 금할 법은 세상 천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였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나의 죄악을 거기에 못 박고 더 이상 그것들에게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던 것처럼, 모든 죄수들이 자기 형틀을 지고 사형장으로 올라갔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적 본성을 걸머지고 거기로 올라가야 합니다.  즉 나 자신의 이기심과 옛 사람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그것들을 못 박아 죽게 함으로 관계를 끊는 결단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의 의미가 무엇인지 로마 시대 십자가 사형 집행과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옛 본성에 대하여 가차없는 거부가 있어야 합니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형은 고상한 사형집행법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흉악한 죄수에게 내리는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런 죽음이었습니다.   그 사형수의 육체가 무슨 존경 받을 만한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우받을 수 밖에 없는 흉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버려야 하는 우리의 옛 자아, 옛 사람의 본성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애정이나 존경심을 보일 수 없는 흉악한 삶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가차없이 거부하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음입니다.

둘째, 우리의 옛 본성을 거부하는 것은 고통스럽기 마련입니다.   십자가 형은 날카로운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과거의 즐거웠던 육체적 향락, 죄의 향연을 빼앗길 때 어찌 아무런 고통이 없을까요?   내면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갈등과 예리한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 곧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음입니다.

셋째, 십자가에 자신의 옛 본성을 못 박았다는 것은 거기서 완전히 죽도록 내버려두는 단호함이 있습니다.   일단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순간적으로 죽는 것도 아니고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오래오래 버티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죄수가 일단 십자가에 못 박히면 죽을 때까지 거기 달려있어야 했습니다.   군사들이 그 곁에 지켜있으면서 누구도 죄수를 끌어내리지 못하게 감시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바울의 말은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주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한 순간 우리의 육체, 옛 본성, 죄는 거기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완전히 죽기까지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죄에 대하여 비타협적이고 거부하는 자세를 날마다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만일 죄가 계속적으로 내 속에서 영향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거나 또는 회개는 했지만 그 회개를 지속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옛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다시 미련을 두고 그 자리로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죄를 쓰다듬고 아쉬워하고 그것을 풀어놓기를 바라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다시 내려 놓으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약동하고 믿음이 자라가는 성도라면 나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그대로 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였던 부끄러운 일들, 그 짓거리들이 거기서 완전히 죽도록 방치해두어야 합니다.   죄와 협상하려 들지 말고 십자가에서 못을 빼려고 시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단호한 자세입니다.   

내 삶을 그리스도께 의탁하였으면 이제 더욱 적극적인 순종의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은 수동적으로 코를 꿰어 끌려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발적인 순종으로 반응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줄(line)에 서서 부지런히 함께 걷는 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자연스런 열매가 맺혀집니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이 맺는 열매에 9가지의 요소가 있습니다.  바울이 제시한 이 요소들 혹은 덕목들은 바울이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말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여러 성경 주석가들은 이 9가지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랑, 희락, 화평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서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이며, 마지막으로는 어려움과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과 거듭난 성령의 사람인 나 자신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 아홉 가지의 아름다운 덕목들은 서로 고립되지 않고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의 뿌리에서 생명을 통해 연결되어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모양과 크기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한 나무에서 열리는 동일한 열매라는 점에서 서로 통일성을 이룹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 얻는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열매라고 불릴 수 없는 무질서한 짓들이지만, 성령을 따라 살면서 얻는 결과들이기에 열매라고 부릅니다.   

이제 첫 번째 그룹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여기 나오는 세 가지 미덕들은 다름이 아닌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 속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가운데 사랑이 가장 기본적이고 원동력이 된다고 봅니다.   사랑은 마치 성령이라는 나무를 통해 솟아오르는 생명의 수액이며 그것을 통해 모든 열매가 가능하도록 하는 힘이 됩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을 충분히 들은 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사랑으로 새롭게 출생한 사람이며, 그 사랑을 먹고 자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나타내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은 가짜 사랑일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의 증거에 대하여 이미 드린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에 대하여 더 설명드릴 필요가 없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사랑이 이처럼 중요한 덕목이기에 또 다시 강조를 합니다.   이 사랑은 사도 요한이 강조하였고 사도 바울이 힘 주어 말했으며 다른 사도들 역시 사랑을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사랑에 대하여 많이 말한다고 하여 그에게 사랑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을 멋있게 설명했다고 하여 사랑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사랑은 말 그대로 삶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랑을 가리켜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강조합니다. 행함이 따르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증거로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정의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함께 읽으며 묵상합시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나의 믿음 고백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이나 나의 헌신, 봉사, 공로 …..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이 모든 것들은 다만 자신을 위한 자랑이고 자부심이며, 자기 만족이 될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생명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을 나누지 않고 나의 고집이나 내 생각 또는 내 주장만 앞세우는 일은 없습니까? 청년 사울도 그런 정도는 누구보다도 잘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난 후로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발견하였기에….    

한동안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가 인기였는데, 거기에 ‘똥 덩어리’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배설물은 고상한 용어이고 사실은 똥 덩어리입니다.   뭐 사람들 앞에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거나 잘 했다고 칭찬 들으려고 몸부림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이 어찌 생각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형제와 이웃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내 열심만 가지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합시다. 그것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참된 삶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쁨이 우러나오고 거기에서 화평도 나옵니다.  사랑에서 시작되는 기쁨과 평화에 대한 말씀은 다음 시간에 이어서 계속 말씀을 드리기로 합니다.  이 한 주간 주의 말씀과 함께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눔으로 사랑이라는 열매가 우리의 삶에서 충실하게 맺혀가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