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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엎드리어 감사하는 자 (눅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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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리어 감사하는 자 (눅 17:16) 

(눅 17: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갈릴리와 사마리아 접경을 지날 때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멀리서 소리를 높여 긍휼히 여겨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긍휼히 여겨 달라는 그들의 외침 속에서 그들이 예수께서 자신들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 고침을 호소하는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말씀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를 만나면 그들의 문둥병이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 지역까지 찾아 나섰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난 그들은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7:13)라고 호소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즉시 그들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은 주님께 찾아와 간구하는 자들을 거절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백 명의 나병환자들이 찾아왔더라도 주님은 틀림없이 그들을 다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와의 만남, 그것은 죽은 생명의 소생이며, 질고로부터의 해방이며, 절망적인 삶에서의 탈출입니다.
   
나병으로부터 놓임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며,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소외와 고독과 무관심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고침 받은 그들에게는 모든 건강한 사람들이 누리는 권리와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제2의 삶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혹한 나락의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값지고 황홀한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감격스러운 새 삶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환자 중 사마리아인 한 명만이 주께 나아와 엎드려 감사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아홉의 변명' 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다합니다.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한 사람은 '의사와 제사장에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겠다' 해서 갔다는 겁니다.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지' 그래서 가버렸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혹,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 이거, 신중론입니다. 이거 나았다고 하는데 꿈같은 얘기라서 정말 나았는지 좀 기다려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본래 나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던가보다.' 이건 회의론자입니다.

네번째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 이건 자연현상으로 보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어떤 병 걸렸다가 나았을 때, "어떻게 나았어?" "그저 뭐, 약도 좀 쓰고 병원에도 가긴 했지만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나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이게 궁금해요, 이제 먹고 살아야겠으니까. 그래서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그래서 가버렸습니다.

일곱 번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안찰을 한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아, 그저 "가서 보여라" 한 말씀 밖에 안했는데 아, 뭐 예수님이 별로 해준것도 없는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란 말입니다.

여덟번째 사람은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 해버렸단 말입니다.

아홉 번째 사람은 '이 모습대로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 그래서 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합니다.(곽선희목사 설교중)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엎드리어 감사 합니다.

엎드리어 감사함은 겸손의 표시입니다 
열 나환자들 중 한 나환자는 제사장 앞에 보이러 가다가 나병이 나은 것을 발견하고 너무나 기뻐서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에게 돌아와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의 변화이며, 모든 비애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큼과 그런 은혜를 자기가 받게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감격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는 부끄러움도 잊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러한 기적을 자기에게 베푸신 주님에게 돌아와 엎드렸습니다.
저는 비록 사마리아 사람이었으나 은총의 가치를 안 자이며, 신실하고 순수한 성품의 소유자이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겸손한 자였습니다.

차를 급하게 몰고 가던 어떤 운전자가 무인측정기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는 속도를 줄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플래시가 터지면서 사진이 찍히는 것입니다. 계기판을 보니 제한속도는 넘지 않았는데 이상하다 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차를 돌렸습니다. 아까보다 천천히 갔는데 역시 사진이 찍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삼세번은 해봐야지.’ 다시 한 번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더 천천히 지나가는데 역시 사진이 찍혔습니다. 고장 난 무인 측정기라 간단히 결론 내리고 돌아갔습니다. 얼마 뒤에 그에게 벌금 통지서가 세 장 날아왔습니다. 내용인 즉, 안전벨트 미착용이었다합니다 .

우리는 이 운전자처럼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을 위한 기준을 가지고 인생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인생이란 자기가 생각한 기준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엎디어 감사하는 자가 복된 자인줄 믿습니다.
겸손히 엎드려 감사합시다.


엎드리어 감사함은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이는 모두 열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한 명을 제외한 아홉 명은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바 엄청난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레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나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말해야 했고, 일반사람들과 격리되어 진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자기 입술을 가리는 행위는 모두 자신을 죄인으로 비하시키는 표현입니다.

또 그들이 자신을 부정한 자라고 외치면서 사람들과 격리하여 사는 것은 거룩한 선민들과 상대할 수 없는 버려진 자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이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가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혼자였고, 소위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참된 감사는 은혜를 기억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감사는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느날 흑인 노예와 백인이 기차 안에서 싸우다가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는 찰나였습니다. 그 때에 마침 옆에 백인 목사님 한 분이 앉아 계시다가 순간적으로 흑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드는 칼을 손으로 막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슴에는 안 꽂혔으나 그 목사님의 손에는 심한 칼자국으로 상처가 나고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흑인 노예는 자기가 죽을 대신에 살려 주신 목사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내가 어디를 가나 노예 생활을 할텐데 이왕이면 목사님을 모시고 일평생을 바쳐 충성할 것을 다짐하면서 나를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소원대로 집에 데려가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흑인은 원래 난폭하기 때문에 가끔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고집만 부리고 거만하게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을 때가 있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이 목사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 언제인가 흑인때문에 다친 손의 칼자국을 가만히 들어 보이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 흑인은 고집만 부리고 말을 듣지 않던 그였지만 그 손을 보기만 하면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순종을 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벌써 죽었을 인생들이지만 우리 사랑의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진정 이 사실을 믿고 그 은혜를 잊지않고 기억하는 성도는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엎드리어 감사함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입니다

고침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병이 나았음을 확인하자마자 주님께 나아와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례했다는 말은 깊은 환희와 감격으로 감사를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의 감사를‘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 찬송케 하려는 목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엡 1:5-6)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영화롭게 섬기려는 목적으로 지으심을 받았고,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목적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미국에 어린 소년 하나가 집집마다 다니며 또  거리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캔디를 열심히 팔았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어느 집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그 집에서 점잖은 신사가 나옵니다. 그 분의 이름이 데이븐 스티븐스입니다. 

이 분은 목사입니다. 어린아이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리고는 캔디를 팔아 달라고 합니다. 그 목사님께서 아이에게 “집에 먹을 것이 없니? 어떻게 어린 네가 캔디를 팔러 다니니?”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집에 먹을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그럼 왜 캔디를 팔러 다니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하기를 동생이 어린이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 어린이병원의 운영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 지미와 함께 캔디장사를 해서 100만불을 벌어 헌납을 하려고 한다고 얘기하였습니다. 

100만불이 작은 돈입니까?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다시 묻기를 친구 지미와 너는 어느 단체 소속이냐고 묻습니다. 그 소년은 어느 단체의 소속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네가 백만불을 벌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 소년이 대답하기를 “저는 제 친구 지미와 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스티븐스 목사님이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여지껏 이런 믿음생활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 더하기 하나님 둘이면 충분합니다’라고 하는 믿음 말입니다. 

나 더하기 천만명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고 얘기했지만 천만명이 나에게 다 더해진다 할지라도 못하는 것은 못합니다.

그러나 나 더하기 하나님은 충분합니다.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주님의 기쁨이 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감사한 결과는 영혼의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19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홀로 돌아와 사례하는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인이 단순히 육체만 나병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이제 그의 영혼도 영원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열 명의 나병환자가 주님을 만나 나음을 얻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온전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다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아홉 사람은 육신적인 구원, 일시적인 구원을 받은 반면, 사마리아 사람은 영육이 모두 구원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신은 구원받았으나 그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지 않은 아홉 명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가? 그러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를 표하고 그 앞에 영광을 돌린 사마리아 사람은 영원한 천국 도성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은혜위에 은혜인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감사하는 자와 감사하지 않는 자의 영원한 구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리석은 아홉 명처럼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은 채 그저 일시적인 구원함을 받았던 유대인들처럼 되지 말고, 받은 바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암에 걸렸습니다. 몸이 힘드니까 간호하던 자녀들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의 심방예배를 받으면서 이분은 모든 것을 감사하기로 다짐했습니다. 한번 감사하기로 작정하고 이분은 죽도록 감사하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병원에 오는 분마다 이분의 감사 고백을 듣고 오히려 용기를 얻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처럼 죽도록 감사를 실천하니까 암세포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영혼과 육신의 암까지 치료되고, 더 많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런 감사의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과 천국을 선물로 예비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교도소와 수도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교도소와 수도원의 근본적인 차이는 한 마디로 불평과 감사에 있다고 합니다.(소페르 David Soper「피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책)

감옥에 투옥된 죄수들은 항상 모든 것을 불평으로 보내지만, 반면에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은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감사로 보낸다. 그러나 죄수가 감사하면 아무리 교도소라 할지라도 수도원이 될 수 있고, 수도사들이 감사를 중지하면 수도원도 교도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교도소 안의 죄수들처럼 항상 불평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수도사들처럼 순간순간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까?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때로는 교도소의 죄수들처럼 불평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감사하는 삶을 살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죄수들처럼 불평 불만을 하는 빈도가 감사하는 것보다 더 많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 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가,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 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모임을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나에게 불만을 토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래도 그가 내게 친구로 가까이 있음이 아니던가요?
(낮은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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