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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받은 자의 온전한 믿음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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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자의 온전한 믿음 (마 25:31~46)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 본문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보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마치 테레사 수녀처럼 선행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주장한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교리와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서로 대립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싱칭의,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롬1:1-11장에서 믿음을 강조하셨고, 12-16장까지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행함을 놓고, 무를 자르듯이 나눌 수 있느냐고 말하면, 그렇게 쉽게 나눌 수 없다고 봅니다.  여기까지는 믿음이고, 여기서부터는 행함이라고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출발하여 행함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강조하신 것 중에 건축하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3:10-13)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전 위에 있다는 말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이요, 구원 받을 믿음은 단순한 고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은 실천적인 믿음이요,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믿음 따로 놀고, 행함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란 나무는 믿음이란 뿌리와 행함이라는 나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고, 우리의 행함은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오늘 양과 염소의 말씀을 보면 이 내용을 비유로 보지 않고 세상 끝날에 일어날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고 해석하시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비유는 최후의 심판, 또는 세계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최후의 심판을 행하시는 실제의 모습 그대로 묘사한 것이냐, 아니면 최후의 심판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하나의 그림 언어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으로 보는데,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하시는 광경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으로 보려고 합니다.  

31절 상반절에서 보면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메시아이십니다. 역사의 심판자로, 하나님을 대신하시는 심판주로 오시는데, 천군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그 때에 오시는 주님은 다시 오시는 주님, 영광중에 오시는 주님, 파루시아라고 합니다.  

파루시아라는 말은 실제로 오신 주님, 당신이 부활하신 그 몸을 가지고, 육체적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파루시아의 도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아무도 그 날의 심판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파루시아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안에서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종말을 말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살만큼 살았다고 하면, 주님 앞에 서는 연습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파루시아의 주님, 재림하시는 주님에 대한 기대가 생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나운 짐승의 이빨 앞에서도, 불타는 기둥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해주신 주님을 뵈올 수 있다는 감격이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기고,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일에 거침돌이 된다고 내어버리고, 또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외친 유명한 말이 “코람데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파루시아의 주님, 다시 오시는 주님, 영광중에 오시는 주님을 사모하면서 주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냥 철 푸덕 힘없이 맥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그 나라를 사모해야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최후의 심판정을 여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십니다. 우리 주님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보좌에 앉으시는 순간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불러 모아”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불려나왔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세계 만민을 둘로 갈라놓으시는 것입니다. 최후 심판 때에는 긍휼이라든지, 은혜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감상적인 말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구별하듯이 둘로 가르셨습니다. 여기서 양과 염소를 예로 들기 때문에 이 말씀이 마치 비유인 것 같지만, 장차 일어날 사건을 설명하시는 것이지, 어떤 한 가지를 교훈하려고 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가 나누어지게 하십니다. 양의 무리는 오른 편에, 염소의 무리는 왼편에, 심판은 명료합니다.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제3의 지대가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에는 옳거나, 틀리거나 오심이 없고, 분명합니다. 오른 편에 있는 양의 무리들에게는 세상에 없는 복을 받은 자로 칭찬하시고, 왼편에 있는 염소의 무리들은 저주받은 자요 불의한 자로 경멸하시고 있습니다. 

왜 우리 주님은 양과 염소를 들어 설명하신 것입니까? 양과 염소를 비교해보시고, 상상해보십시오.    양이 염소보다 더 비싸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양은 흰색의 털을 가지고 있으며, 온순하여 목자의 말을 잘 듣기 때문에 그런 상징성을 가지고 구원받은 무리로 채용한 것입니다.  염소는 가격 면에서 양보다 못하기 때문입니까?  가격보다는 염소는 검은 색의 털을 가지고 있으며, 성격이 급하고, 목자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징성을 가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나타내게 한 것입니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임금이셨습니다. “인자”라고 하시면서 주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오신다고 하셨는데, 이제부터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신 임금으로 소개하시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권은 아들이신 메시아 주님에게 위임되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오늘 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34)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을 자들을 향하여 선언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을 부르시는 말씀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하셨습니다. “복 받을 자”라는 말은 완료 수동 분사로 한번 부여된 은총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앞으로 영원히 미친다는 뜻입니다. 이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나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펴보겠지만, 저주받은 자들은 “나를 떠나”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가까이 나아오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 순간 세상에 모든 아픔이 사라지고, 모든 근심이 변하여 축복이 되고, 영원한 사랑에 감격하면서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예비하신 하늘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저택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칭찬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은 당신이 친히 주리신 적이 있었고, 목이 말라하셨고, 나그네가 되셨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히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구원받을 자들은 주님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에, 돌아보았고, 섬겼다고 하십니다. 그 때에 구원받은 자들이 주님 앞에 저희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37-40절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사실 이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부끄러워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을 자들, 양의 무리요, 구원받을 자들을 의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 주님은 수많은 성도들, 천천만만의 성도들을 향하여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성경은 이신칭의를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진리입니다.  믿음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믿음,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심판의 기준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동안 종말적인 비유나 경고의 말씀을 여러 번 주셨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나 그물 비유는 밀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르는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심판의 날이 불원간에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이 내려지느냐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청중의 모든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오른편에 있어 구원받은 자들도 어안이 벙벙하고, 왼편의 염소의 무리들, 저주 받을 자들도 심판의 기준을 몰라 자기들에게 주어진 심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놀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도 성도요, 구원받지 못할 염소의 무리도 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실천적인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신앙고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의 믿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일으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전제되지 아니한 믿음은 애초부터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이 실천되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세상 끝 날에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밀과 가라지를 나누듯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나누듯이 구원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를 구별하십니다.  그 때에 구원받은 자들은 그냥 믿는다는 말만 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들, 힘없는 사람들, 권세에 눌러 아무 항변도 할 수 없는 작은 자들에게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주린 사람들이었고, 목이 말라하였고, 나그네로 있었고, 헐벗고 병들었고,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갚으려는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므로 우리의 물질을 나누고, 섬김을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작은 자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다시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와준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시는 되돌려 받으려는 마음도 없고, 그냥 흩어 구제하고, 도와주고, 섬기는 실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선행을 당신에게 베푼 사랑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심판 받을 자들, 왼편의 염소의 무리들에게 선언하셨습니다.  41절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고 하셨습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미 저주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가까이 오지 말고 “나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지옥이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놓은 장소가 아니라, 마귀와 그 졸개들을 가두기 위하여 만든 형벌의 장소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사랑을 베풀지 아니한 자들에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2-43)라고 하십니다.  

저주 받은 자들,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이 항변합니다.  복 받을 자들은 감격 속에 겸손하게 물었지만, 이들은 따지고 달려들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라고 소리쳤습니다.   주님이 주리신 것을 알았다면, 주님이 목마르시고, 주님이 나그네 되시고, 주님이 헐벗으시고 주님이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알았다면 발 벗고 달려가 도와드렸을 것입니다. 

이 때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저주 받을 자들은 자기를 알아주고, 다시 갚아주고, 다시 초청해줄 만한 그런 큰 자, 명사들과 사귀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자들, 복 받을 자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폈지만, 이들은 전혀 작은 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믿음은 본래 살아 있는 운동력이 있습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 가정을 구원하기 위하여 섬김으로 이어지고, 사회를 구원하기 위한 자선으로 이어지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저주 받을 자들, 형벌에 처해질 자들이 무슨 악행을 저질렀거나, 의식적으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이웃, 참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주변의 약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에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선행을 행해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선행해야 천국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과연 천국에 까지 이끌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좀 애매하지 않느냐, 선행이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심판의 기준이 행함에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까?  이제는 사랑의 빚을 갚아갈 수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행함에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지 않지만, 믿음에는 행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55주년을 보내면서 올해에 이웃 사랑을 실천해본다 아름다운 가계를 준비하였고, 소아암 환자를 위한 헌금도 했습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은 사랑하는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힘써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맛만 본 정도지, 본격적인 봉사도 아니고, 주님이 알아주실만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적으로 사역한 것을 가지고 나도 참여하였다는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이란 어디까지나 우리라는 공동체의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나의 신앙은 정적인 신앙이 아니라 동적인 신앙, 활동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을 때에 삭개오의 실천적인 믿음을 보시고는 하신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결단하였습니다. 사실 주님이 그의 집에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라고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지금 살아 있는 신앙, 구원받을 신앙을 가지고 고백하는데, 신앙고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요,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뒤쫓음을 당할지언정, 남을 뒤쫓아서는 안 됩니다.  압박을 당할지언정, 남을 압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멸시와 모욕을 당할 수 있어도, 우리는 남을 멸시하지 말고, 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최후에 선언하십니다. 46절의 말씀으로 선고되었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영벌에 들어간 사람들은 “말과 혀로만” 사랑한 사람들이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는 칭찬과 함께 영생에 들어간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볼 수 있었던 믿음의 사람, 행함이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행함에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지 않지만, 믿음에는 행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수동적인 신앙, 마지못해 하는 피동적인 믿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실 것을 주었고, 영접하였고, 입을 것을 주었고, 돌보아주었고, 찾아주었습니다. 다 능동적인 헌신봉사였습니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가 쓴 “섬김”이란 책에 보면 한 형제가 고백하는 말이 참으로 귀하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에서 제게 가장 중요하고 만족을 주는 일은 바로 교회봉사예요.  제가 관에 실려 나가는 그 순간까지는 할 것예요”라고 하였습니다.  

헨리 나우엔 박사는 천재로 불리던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항상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는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예일대학을 거쳐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집필한 30여권의 책은 모두다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만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오직 성공과 성취로 장식되었습니다. 

그가 청천벽력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교수직을 포기한다.  이제 정박아 시설에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많은 명예와 보수를 왜 버리려고 하는가?  차라리 후학을 양성하라”고 했습니다.  “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낮은 곳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낮은 곳에서 우리 주님을 만나야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 도와주고, 그들이 힘들어 할 때에 손을 잡아주십시오.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낮고 천한 자리에 찾아오신 우리 주님을 만나 뵈옵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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