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신를 부인하는 삶 (마 8:34)

  • 잡초 잡초
  • 315
  • 0

첨부 1


자신를 부인하는 삶 (마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8:34).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각 사람을 복 주시고, 어두움 가운데서 생명의 자리로 이끌어 내주신 것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의 영광과 사랑을 드러내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과 구별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 닮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상은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 분 닮은 성품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단련하시고 격려하실 것입니다. 


Ⅰ. 본문해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간절히 만류하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꾸짖으시며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8:34)입니다. 


Ⅱ. 예수를 따르는 삶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자기 부인’의 삶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A. 자기 부인 

자기 부인은 무언가 옳지 않은 것들이 자기 안에 생겨나게 될 때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거부하며,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죄와 악의 사슬에 매어있던 그의 영혼과 마음을 성령의 지극히 큰 능력으로 풀어 자유를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 그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인간에게는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당치 않는 생각들과 욕망이 신자 안에 계속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 안에서 참된 것을 분별하고 옳지 않은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없으면 진정 예수 따르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의 첫 번째는 자기 생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일 먼저 신자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잘못된 생각들에 관한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그것을 잘 모를 수도 있고 혹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강한 편견과 고집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지 점검하고 말씀 앞에 그것들을 내려놓는 일이 없다면 신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고 이제껏 우리가 배운 진리와 다른 생각과 판단들이 오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생각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미혹하고 혼란케 하지 않습니까? 바다를 항해하는 큰 배일수록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릇된 생각은 인생전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자기부인은 자기의 욕망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실 때 우리에게 소원도 같이 주십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쁜 뜻을 따라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기름진 밭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잘 자라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소원과 자기 욕망에 대한 소원도 같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망 모두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았던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결국 모든 미끄러짐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했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영혼의 큰 손해와, 관계의 깨뜨려짐을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욕망을 분별하여 어떤 것이 성령께서 심으신 것이고 부인하여야할 것인지 구별하고 말씀의 영향력과 기도의 은혜로 그릇된 것을 죽이는 일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신자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주님을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잘못된 욕망을 깊이 깨닫고 뉘우치는 ‘회개’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 예수님이 메시아일리 없다는 신학적인 편견과 이방인에게는 절대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심리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 회개한 후 샤도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주님이 원하시는 욕망과 생각만 생겨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따를 수 없다고 부인하지 않으면 온전히 예수를 따르지 못합니다. 만일 이런 자기 부인이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비척거리며, 주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본받기는커녕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방불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덧붙여 우리는 생각과 욕망의 부인뿐만 아니라 의지 또한 굴복시켜야 합니다. 강력한 욕망은 항상 의지를 동반합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의지는 완고해져서 좀처럼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치 주님을 거스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아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B. 자기 십자가 

또한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닮은 형상을 만드시기 위해서서 지신 것으로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 시련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를 우리가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우리에게도 있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절대적인 십자가 

절대적인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같이 애매히 당하는 핍박과 괴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이 세상에 오셔서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준 생애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과 섬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따르는 것이 ‘진리’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죄로 물든 인간들의 눈에 가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박해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으로서 자신들이 진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진리를 미워하고,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 분의 진리를 따라가려고 할 때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인 십자가입니다. 

2. 상대적 십자가 

상대적인 십자가는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와 허물, 결함으로 인한 십자가입니다. 걸어가는 그 길은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지만 자신의 모난 성격과 아직 절제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과 시련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자업자득이나 하나님의 징계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이 십자가를 자기 성숙의 기회로 받아들인다면 이런 고통을 통해서도 그는 절대적인 십자가와 똑같은 효력을 자신의 성화의 삶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을 떠올려보십시오. 다윗은 그의 범죄로 인하여 자식들의 끊임없는 칼부림, 갈등의 연속을 경험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후궁을 아들이 겁탈하는 부끄러운 일 또한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혈기를 가지고 분노하는 대신 하나님께 피하여 그분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 세상에는 궁극적으로 의지할 것이 없고 오직 기쁨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모든 고통을 통해 다윗은 주님 앞에 순종하는 삶에서는 도달하지 못하는 온 땅에 가득한 주의 무궁한 진리를 더 절실히 목격하고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인생의 풍랑으로 인하여 주님께 피하였더니 주님과 오히려 가까워지는 비밀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 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시 31:19~21).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종류의 많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날마다 주님을 생각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연단하시는 십자가가 없고 아무런 고통이 없을 때 우리의 인생의 항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사명으로부터 이탈하게 돼버립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죄와 씨름하며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그 고통과 비할 데 없는 놀라운 기쁨이 솟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합니다. 그 십자가가 그 사람을 그 만큼 이라도 하나님 앞에 살아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큰 능력으로 구원을 얻고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그에게도 이 두 가지 십자가는 늘 있어서 그의 마음에 고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그는 자신의 소망을 철저히 하늘나라 에 둘 수 있었습니다. 


Ⅲ. 예수의 죽음에 참여함 

하지만 십자가는 결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끊임없는 양심의 정죄와 세상의 핍박 가운데에서도 십자가를 통해 예수의 죽음과 고난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 이 십자가가 끊임없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죄를 짓게 만들지만,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깊이 묵상할 때 이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의 기운이 우리를 삼키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의 육체가 나이가 들면 죽음의 기운에 피부와 살갗 인막과 체취 모든 것이 생명의 기운을 점점 잃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은 바 될 때 우리 안에 모든 정욕과 굽은 욕망과 부패한 경향성들이 죽음에 의해 잠식되어 기운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평안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모든 좋은 것,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 세상의 덧없음을 알고 정욕을 버리는 아름다운 자기 비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내세에 대한 아름다움, 죄를 죽이고자 하는 의지는 고난이라는 토양 속에서 피어오르는 꽃과 향기, 열매들입니다. 환란과 핍박이 가득하고 세상에 소망 둘 곳이 없던 그런 고난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찬송을 토해 놓았던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그 모든 고통 속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죽으심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의 기운은 시공간을 넘은 죽음이 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하나님이 심지 않는 모든 것을 죽이는 신비함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일평생 깨닫기 위해 노력한 것 중에 하나가 이 비밀스러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 이었던 것입니다. 


Ⅳ. 결론: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구원받은 자녀인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참예함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진흙과 같은 우리의 몸을 정금과 같이 만드시고 더러운 인간들을 끊임없이 진리와 성령으로 씻으셔서 예수의 형상을 충분히 담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 목적에 합당하게 쓰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갈고 닦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고 하늘가는 길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모든 길들은 참 진리의 길이 아니었음이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옛 조상들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그 십자가 때문에 살아있는 우리가 이번에는 그 분을 따라 십자가를 질 차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살 때만이 우리는 생명을 보여주며 살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잘 감당해서 예수의 죽음에 참예함으로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성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