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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욘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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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욘 2:1~10)


경제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코너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이방법도 저 방법도 안 되고 그러다보니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닥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그때 우리 성도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절대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코너가 망할 길이 아니라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오늘 봉독한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본문의 주인공 요나가 그런 죽을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부여한 거룩한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다가 그를 삼켜 버리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큰 고기가 어디 있느냐”하며 의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의 몸을 통째로 삼킬만한 물고기는 많습니다. 그중 <긴수염 고래>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동물 중에서 몸집이 가장 크답니다. 몸길이는 수컷이 25m, 암컷이 27m 정도이며 30m까지 자란답니다. 보통 크기가 몸무게는 110톤 정도 됩니다. 

그런데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그 고래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를 그 물고기로 삼키게 하셨을까요?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요나를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당신의 종으로 선택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을 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 되고 용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가라는 방향의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를 끝까지 추적하고 그가 스스로 깨닫고 항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혼 구원 사역에 동행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하나님의 설득과 추적에도 죽기를 자청하다가 바다에 던져집니다. 결국 그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그냥 내버리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요나가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는 유대인들을 위한 선지자로 부름 받았지 이방인을 위해서 부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그 잘못된 믿음과 구원관을 고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 요나가 죽으려고 발버둥 쳐도 그냥 죽도록 포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가 깨닫게 하기위해 한가지 작업을 하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요나를 물고기 신학교에 그를 입학시키는 것입니다.  

1:17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물고기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마자 그를 통째로 꿀꺽 삼키게 합니다. 물고기 뱃속, 저는 이곳을 신학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의 삼일동안의 요나 생활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그는 그 물고기 뱃속 신학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고 변하게 됩니다. 

요나가 그 신학교에서 변화된 것은 무엇입니까? 

1.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2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가 무엇 때문에 기도합니까? 

2절에 보면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그렇습니다. 요나가 기도한 것은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난은 사명을 외면하였기에 따라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알고 보면 요나의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변장된 축복>이라고 합니다. 고난이 싫지만 고난 때문에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고 또 119편 71절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고난당하지 않고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며 산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그러나 고난이 찾아 왔을지라도 늦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가 기도할 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들어간 물고기 뱃속은 어떤 장소입니까? 

2절에 요나는 “스올의 뱃속”이라 했습니다. ‘스올’은 음부, 곧 지옥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아니고 지옥 맛을 보여 주는 곳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어둡고 고통스러웠으면 지옥이라고 말했겠습니까? 3절, 4절, 5절을 보면 그 안에서 그가 당한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평상시 기도하고 평상시 하나님 뜻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현재 요나와 같이 지옥 같은 장소에서 살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기도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니면 너무 편안하고 안락합니까? 그때도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는 평상시 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기도 못해요. 너무 더워서, 너무 추워서 기도 못해요. 이런 것 다 핑계입니다. 몸이 불편하면 더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더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경험하며 느끼는 것은 기도에는 방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은 피곤해서요.”이것도 안통합니다. “하나님 오늘은 일을 많이 해서요.” 이것도 안됩니다. “오늘은 심방을 많이 해서요.” 다 소용 없습니다. 

왜냐면 기도라는 것은 환경을 이기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이런 고난이 닥치기 전에는 성경에 기도했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사명을 받았을 때도 기도 안합니다. 도망을 치려 할 때도 기도 안합니다. 심지어 풍랑 속에 배가 침몰직전인데도 기도 안합니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물고기 뱃속 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2절을 다시 한번 더 보세요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그는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습니다. 이‘아뢰었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과 자신의 상태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환난 날에 할 일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 어떤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아멘입니까?  기도가 여러분의 환경을 바꾸어 주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어느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When men works, men works, When men prays, God works.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일하면 사람이 일할 뿐이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말입니다. 

어느 대학병원에 소아과 의사로 재직중인 어느 교수의 간증입니다. 그가 어느 날 다른 병원에서 고치지 못한 어린아이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하루 두 번씩 고열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하면서, 다른 병원에서 강력한 항생제를 써 보았지만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병원에서는 정확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개복수술을 해야 한다고 권했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차마 어린 자식의 배를 가를 수 없어 그 병원으로 데려 온 것입니다. 

그 아이를 맡은 교수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예수를 믿느냐고 물어보니 믿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기도하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검사 결과 ‘간농양’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간에 염증이 심해 농양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먼저 있던 병원에서처럼 항생제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치료를 시작한 지 이틀 후부터 감쪽같이 열이 내렸습니다. 2주 후에는 거의 정상이 되었고, 한 달 후 아이는 완전히 회복되어 퇴원했습니다. 

옆에 있던 의사가 그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먼저 병원에서도 똑같은 치료를 했는데, 왜 거기서는 좋아지지 않고 여기서는 좋아졌을까요?” 그때 그 교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약을 더 썼지, 그게 뭔 줄 아나? ‘기도 마이신’이라는 것을 썼는데 그것도 용량의 두 배나 강하게 썼거든. 그랬더니 효과를 봤다네.” 

그러면서 하는 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는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거라네.” 했답니다.  

인간에게는 크고 불가능한 문제처럼 보여도 하나님께는 아주 작은 문제이고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의 능력은 사람이 일하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일하신 것에 비하면 그 결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방법이나 노력으로 안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면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자신의 무능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물고기 뱃속 신학교에서 변화된 요나,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4절~5절을 보세요.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7절을 보세요.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여기 잘 보세요. 아주 중요한 표현들이 기록됩니다.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이 표현의 핵심은 뭡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 신학교에 들어가서야 자기가 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다 물속에서, 그리고 독한 가스 냄새가 나는 뱃속에서 그는 깨닫습니다. 자기가 형편없기 그지없는 존재가 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요나는 선자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종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대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도 칩니다. 그리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큰소리도 뻥뻥 칩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인가를 물고기 뱃속에서 3일지나면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그리고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여러분!  
내 연약함이 보일 때 하나님의 위대함이 보입니다. 

내가 커 보이면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가를 알게 되면 그제서 하나님이 보입니다. 

제 막둥이가 4살 때 쯤 제게 물었습니다. “아빠 아빠가 쎄, 예수님이 더 쎄,” 아빠하고 예수님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깜짝 놀라 야단을 칩니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말이냐,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그분의 종이란다”  그 아이가 보기에는 아빠가 예수님만큼 대단한 분으로 보인 것이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빠가 작아 보입니다. 

내가 작아져야 하나님이 위대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일 수록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악이 보이게 되자 낮아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알게 하는 특효약은 ‘고난’이고 그리고 ‘실패’입니다.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가장 위험한 사람입니다. 또 실패를 모르는 사람은 겸손을 모르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왜냐면 그런 사람은 교만하게 되고 결국은 패망하게 됩니다. 

요나도 평상시 자기의 한계와 연약함, 그리고 무지를 모르다가 뱃속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알았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도 알아야 하고 자신의 은사도 알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제서 하나님이 보이고 그제서 은혜가 체험되는 것입니다.  

  
3. 사명을 감당하기를 약속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4절에서는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8~9절에서는 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합니다. 

“다시 성전을 바라 보겠다.”“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이런 말이 없었습니다. 사명을 내버리고 도망을 치던 자였습니다. 니느웨를 가라고 했다고 도망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갚을 것을 약속합니다.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무슨 서원일까요? 선지자로 부름 받았을 때 “어디든지 가오리라” 하는 서원입니다. 결국 니느웨로 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 신학교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를 깨달았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자기 사명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왜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여러분을 왜 대한민국 땅에 보내셨고 왜 우리 교회에 나오게 하셨나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실 때는 Mission 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구원입니다. 
요나가 그것을 물고기 뱃속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9절 하반절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구원역사는 사람이 하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공부한 후 졸업시험을 보았는데 그 해답이 이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구원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고백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니느웨 백성을 버리면 그들이 심판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구원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고백해 보세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셨고 그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 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내가 스올과 같고, 인생 밑바닥에 내려와 앉은 것 같은 느낌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열정이 다 식어져 버린 것과 같은 분이 있습니까? 앞이 캄캄한 분들이 있습니까? 자존심이 우리를 먹여 살리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마음들이 우리를 회복시키지 못합니다. 이제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빨리 사명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의 자리로 달려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주님이 주신 사명, 너무 정신없이 살다가 그 놓쳐버린 봉사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힘들어 하시 마세요. 무거운 짐 내려놓으세요. 주님이 나를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을 불러봅니다.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2.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3.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습니까? 그런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사실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때로 지치고 곤하여 주저앉고 싶을 때 많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뭐라 하십니까?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며 일어나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코너에 몰릴 때도 나 혼자가 아닙니다. 그분이 함께 하십니다. 도우십니다. 아멘?  

여러분이 누린 구원,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게 하여 구원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혹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먼저 역사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한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한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여러분도 배워야 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전도 누가 합니까? 우리가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누가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도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니느웨 전도, 요나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한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만 들어 쓰실 뿐입니다. 나는 단순히 예수님의 도구가 되어 가서 전하는 것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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