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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눈을 밝히시는 하나님 (엡 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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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을 밝히시는 하나님 (엡 1:15~23)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관심 있게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참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집중합니다. 다른 종교인들보다 기독교인에 대한 관심이 더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기독교인을 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들은 자기 삶을 그리스도에게 내놓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아까운 시간에 어떻게 교회에 나가는 것일까? 헌금을 내면서 어떻게 더 즐거워할 수 있을까? 그들의 얼굴에 있는 기쁨은 도대체 무엇일까? 허상인가 아니면 스스로 만든 자기 최면일까?’ 사람들은 기독교가 매력적이고 사람을 끄는 종교라는 사실에 대해서 변함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인에 대한 폄하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케케묵은 구닥다리가 된 사람들이 아닌가? 전통과 보수가 모든 것인 양 목을 매는 사람들이 아닌가?’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기대합니다. 뭔가 특별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인은 모든 것이 막혀 있어서 대화가 안 된다는 생각하면서 도망가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 속에도 이런 두 가지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두 종류의 상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완고하고 엄격하며 경직된 삶의 양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멋없고 자기고집에 꽉 차서 융통성이 결여된 사람들로 여기며 멀리하는 모습이 우리 속에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과 종교적인 갈등을 하면서 부딪친 사람들은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왜곡된  형식주의자였습니다. 때로 몇 가지 선한 일을 행함으로 도덕적 우월주의로 인간의 교만을 드러내서 종교적인 수렁에 스스로 빠져들었습니다.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로 위험하지만 긴장과 기대감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성령의 역사를 믿고 놀라움과 경탄을 갖고 모험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정의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17)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숙되고 변화되며 꿈을 향해 도전하는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이것을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은 부패하고 타락한 간사한 마음이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거룩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갖는 마음으로 성숙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어두운가, 밝은가? 마음이 닫혀있는가, 열려지는가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길이 확정됩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것에 따라서 인생을 보는 방식이 결정됩니다. 

리더십의 글을 쓰는 존 맥스웰이 「신뢰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잠깐 낮잠이 들었습니다. 어린 손자들이 할아버지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가장 냄새가 고약한 치즈를 꺼내다가 할아버지 수염에 살짝살짝 발라놓았습니다. 아이들은 숨어서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몇 분후에 냄새 때문에 눈을 떴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인지 부엌에 들어가도 냄새가 났습니다. 안방에 들어가도 냄새가 났습니다. 모든 곳에 심하게 냄새가 풍겼습니다. 그래서 바깥에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겠다고 심호흡을 하며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또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고약한 냄새가 가시지 않는 것을 보면서 할아버지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온 세상이 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구만.” 
  
우리 마음이 썩으면 세상이 썩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가면 썩은 것 같은 세상 속에서도 가능성이 보입니다. 자기 삶을 내놓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고약한 마음,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악취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인생을 보는 방식을 바꾸려면 먼저 우리 마음의 밭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바라봅니다. 자신을 신뢰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신뢰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결여된 사람은 만나는 사람을 모두 비딱하게 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인정이 많고 너그러울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만납니다. 
  
우리의 자아상이 마음으로부터 변화되지 않으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해도 참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은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부정적인 사람들끼리 어울려야 겨우 마음이 놓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마음의 눈이 밝아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삶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며 모험했던 인물들입니다. 지상에 살았지만 하늘의 비밀의 계시를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꿈을 안고 새롭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삶의 환경은 척박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역사를 한걸음, 한걸음 새롭게 이어나갔습니다. 
  
이덕주가 쓴 「한국교회 처음이야기」라는 책에 한국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복음 때문에 어떻게 변화되어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이루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 마음의 눈이 밝아진 한 여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0년 무렵 강화읍교회, 지금의 강화중앙교회에서의 일입니다. 과부였던 교인 김씨가 있었습니다. 자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돈은 여유 있게 가진 것이 있어서 복섬이란 여종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80이 넘은 나이에 예수를 믿게 되었고 한글을 깨치게 되었고 성경을 읽어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태복음 18장 18절에 그녀의 눈이 멈추어졌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18:18) 

그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이 마음에 직접 부딪쳐왔습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읽을 때 이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성경말씀이 바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이천년 전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의 말씀으로, 성경의 인물에게 준 말씀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준 말씀으로 다가올 때 말씀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씀을 읽어도 뜨거워지지 않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말씀이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것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게 주시는 성령의 약속이 담겨있는 말씀으로 부딪쳐오지 않을 때 우리는 말씀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니 우리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어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또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는 것인즉 그러고서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겠는가?” 
  
김씨 부인은 문갑에서 복섬이의 종 문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 문서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복섬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종이 아니란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내 집을 나가도 된다.” 그러자 놀란 복섬이가 부인에게 오히려 매달렸습니다. “마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제발 나가라고 하지만 말아주세요.” 
  
김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복섬이를 양녀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했습니다. 복섬이는 종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정성을 다해 어머니가 된 김씨 부인을 섬겼습니다. 김씨 부인 역시 늘그막에 얹은 양녀로 인해서 더 기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많은 교인들이 감복하여 더욱더 말씀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열망하면 우리 마음속에 소중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내게 다가와 가르쳐주세요. 말씀을 내게 하신 약속으로 주세요.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로 말씀을 받기 원합니다.” 이처럼 말씀 읽을 때마다 순종하는 열망과 성령에게 부탁하는 마음의 소중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변화될 것을 기대하며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곳은 바울이 삼년이나 목회하며 고통과 핍박을 받았던 곳입니다. 그러했기에 바울은 더욱 더 애정을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에베소교회를 목회할 때 겸손과 눈물로 했다. 그러나 거리끼지 않고 담대한 사랑으로 했다.” 바울은 자신의 목회 내용을 고백하고 이제 에베소교회를 떠나 그곳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에베소서 1:17)
 
바울은 하나님 앞에 계시의 영, 지혜의 영을 에베소 교회에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지혜와 계시의 영’인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에베소 교회를 축복합니다. 바울의 마음은 소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전도자이자 선교사였고 목회자였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외쳤습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계시와 지혜의 영을 주세요. 그들은 변화될 수 있고 더욱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위치를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계시의 내용을 허락해주시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과 어리석음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변화되고 성숙될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바울도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바울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유대인으로서 알고 있던 엄정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율법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죄악을 결코 용서하지 않고 정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는 거룩하고 두려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믿게 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 죄를 범해도 끝까지 인간을 찾아가셔서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깨닫고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완벽하셔서 마치 상처받지 않는 무생물처럼 이해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면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상처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상숭배를 하며 거역하면 통탄하십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찾아오시고 사랑으로 감싸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에베소서 1:18)
 
바울은 마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고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이 백성들을 향한 소망이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소망이 무엇인지, 나를 왜 불러주셨는지, 이 시대에 나에게 왜 믿음을 주셨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소망을 내 소망으로 품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시는 풍성한 유산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면 할수록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게 더 많이 기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나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더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나를 좋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신뢰와 사랑은 늘 함께 갑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분들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자녀들이 사춘기에 이유 없는 반항을 하고 어머니를 적대하며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에게 똑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얘야, 나는 네가 항상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명심하렴. 네가 어떤 사람이 되든지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잘되고 바르게 되기를 바라지만 혹 자녀가 다른 사람이 비난하는 사람이 되어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얘야, 이 사실을 평생 잊지 말아라.”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어 성숙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세상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며 도망갑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찾아오셔서 세워주십니다. “내 자녀가 되어라. 나를 믿어라. 모든 유업을 받아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이끌어주셨고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고 부르신 이유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풍성한 유산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의 나를 뒤로 하게 하시고 오늘과 내일의 나를 이끌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환경이 녹녹치 않습니다. 경제 금융의 위기 속에서 많은 분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내 몰릴 상황이 있기도 하고, 금융위기 속에서 가정에서는 투자한 재산에 대한 위험성을 안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보다 내 인생의 미래를 더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부정적이고 어려운 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마음의 눈을 밝혀주세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부르심의 이유를 다시 깨닫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주님 주신 약속을 따라 나가겠습니다.”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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