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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아이성의 실패를 넘어가자 (수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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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의 실패를 넘어가자 (수 7:1~5)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인 박범신씨가 지은 소설가운데 ‘촐라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연재되어 누적 방문자수 100만을 돌파한 화제의 작품입니다.  그것을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한 것입니다.   ‘촐라체’는 히말라야 정상부근에 있는 해발 6440미터의 한 봉우리의 이름입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관문으로서 험하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일 높은 백두산이 2744미터인 것을 감안하면 이것이 단순한 봉우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모두 빙벽으로 되어 있어서 전문 산악인들도 오르기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2005년 1월 한국의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 두 사람은 여기 촐라체 북벽 등반에 성공했습니다.  촐라체 북벽은 수직고만 해도 2천여 미터 가까운 난벽입니다.  지금까지 이 거벽에 도전해 성공한 팀은 1955년 프랑스 팀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원정대는 많은 자본과 물자를 투입해 고정로프를 깔면서 올라가는 등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최소한의 장비만으로 올라간 두 사람의 등반은 세계 등반사에 길이 남는 획기적인 성과였습니다.  특히 정상에 오른 이들이 하산하면서 최강식이 미끄러져 박정헌의 로프에 묶여 있었는데, 무게를 견디며 로프를 끊지 않고 마침내 동료를 구해내었습니다.  

소설은 바로 이런 실제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다 작가는 배다른 두 주인공의 기구한 삶속에서 그들 인생에 넘어가야 할 것을 촐라체를 통해 잘 보여줍니다.  결국 인생은 무수히 넘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촐라체의 봉우리처럼 극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에게는 인생의 촐라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야 합니다.  이 소설은 촐라체를 통해, 바로 우리 인생에 누구라도 넘어야 할 촐라체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전쟁을 채비하고 여리고를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의 전투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리고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성이 장벽이요, 촐라체였다는 것입니다.  아이성을 넘지 못하면 여리고의 승리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아이성은 그들이, 또 우리가 넘어야 할 곳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성은 당시 무엇을 보여주는 곳일까요?


첫째는 실패의 현장입니다.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진입한 이스라엘은 길갈에서 거룩을 다짐하며 할례를 행하고 거룩한 전쟁을 채비합니다.  그리고 정복의 역사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들 앞에 제일 먼저 만난 대적은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싸우시니까 그들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차례가 아이성입니다.  아이성은 여리고에 비하면 쉬운 상대였습니다.  성 자체도 작고, 군사도 별로 없었습니다.  여리고 작전처럼만 하면 아이성 정복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4절,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고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륙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한마디로 대패였습니다.  여리고를 무너트리고 승승장구 했던 이스라엘은 아이성의 패배로 그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아이성의 현장입니다.  아이성은 바로 실패의 현장입니다.   이스라엘은 싸움에서 여리고처럼 승리하기도 했지만 때론 아이성처럼 패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이기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고, 때론 패배의 아픔과 고통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요, 현실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 인생은 승리만 있지 않습니다.  매일 햇빛만 나고, 좋은 일만 있고, 웃는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칠흑 같은 어두움도 찾아오고,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아픔의 순간을 보내는 때도 있습니다.  매일 승리와 성공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아픔도 패배도 뼈저린 실패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인생에 종종 만나는 실패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실패를 만날 때 난리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다루면 됩니다.  가만히 보면 실패도 잘 다루면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닙니다.  언제나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실패의 인생으로 끝내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천국은 실패한 자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여 낙심하고 절망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패는 과정일 뿐입니다.  본문의 백성들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승리합니다.  실패가 끝이 아니기에 극복해야 합니다.  실패를 경험으로 오뚝이처럼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고 강조합니다.  실패의 현장에서 포기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결국 주께서 믿는 자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가운데 이런 인생의 이력서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22세에 사업에 실패, 23세에는 선거에서 낙선, 25세에는 사업에 실패, 26세에는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 27세에 신경쇠약으로 정신과 치료, 34세 국회의원 낙선, 37세 역시 국회의원 낙선, 39세에 또 낙선, 46세 상원의원 선거에도 낙선, 47세 부통령 입후보 좌절, 49세 상원의원 경선에서 패배.. 대부분 이 정도 실패의 이력이면 누구라도 낙심하고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그는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의 나이 52세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과연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우리는 그가 노예해방의 업적을 남겨서 존경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런 실패의 현장에서도 다시 일어섰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우선적인 촐라체는 바로 실패입니다.  그러나 그 봉우리를 넘어야 합니다.  절망의 현장에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실패를 넘고 넘어 진정한 성공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범죄의 현장입니다. 

아이성은 이스라엘이 당한 패배의 현장이고 아울러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당시 전쟁은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거룩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거룩하고, 성결함이 우선적으로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점령할 때 이스라엘이 혹이라도 범죄할까 우려하여 누구든지 여호와께 바칠 물건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아간이 그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성경은 당시 그의 범죄를 얼마나 무섭게 다루었는지 그를 소개할 때 조상의 조상까지 이름을 거론합니다.  아이성은 바로 범죄의 현장입니다.  아간의 범죄로 실패를 경험한 현장입니다.  이것은 아간의 일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일이고, 또 오늘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독생자까지 보내셨을 정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우리가 날마다 죄를 해결하며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넘어가야 할 촐라체는 바로 죄입니다.  이 봉우리가 촐라체 이상으로 너무도 험난하고 무겁습니다.

믿는 사람도 분명 죄를 짓습니다.  믿음이 돈독한 사람도 결국 죄인일 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닮은 성자라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 외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죄인인 것을 알아갑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죄의 기준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지난 한주간도 우리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도덕과 윤리와 양심으로 진단하는 죄만이 죄가 아닙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을 생각하지 않고, 선한 말을 하지 않고, 선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우리가 죄인입니까?  이 죄의 촐라체를 넘어야 합니다.  해결하며 나가야 합니다.  자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남은 생애동안 죄를 해결해 가야 하겠지만 특히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확실히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욕심’입니다.  아간의 죄는 바로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간의 행동은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지긋지긋한 광야생활에서 그들은 반듯한 옷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날산의 외투를 입고, 금덩어리 하나를 숨긴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에 욕심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욕심은 다스려야 합니다.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의 근원인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늘 자족하는 마음으로 욕심의 촐라체를 넘어가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자만의 현장입니다. 

아이성은 실패와 범죄의 현장이면서 자만의 극치를 보여준 현장입니다.  결국 그 오만함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그들의 자만에 대해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  여리고를 정복한 그들은 순간 아이성을 아주 얕본 것입니다.  거대한 여리고도 무너트렸는데 조그만 아이성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패배의 원인입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바로 그들은 자만한 것입니다.  그들은 섰다고는 생각하면서 넘어질 것은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아이성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들이 자만하게 된 것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요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승리의 순간, 하나님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여리고를 무너트린 뒤 성경의 흐름으로 보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처럼, 가나안에 첫발을 내디딘 그 때처럼, 그들은 여리고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경배와 찬양과 모든 영광을 돌리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그들은 잠시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가 없습니다.  만약 단 한 마디, 단 한 줄의 감사만 있었더라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오늘 이 날이 해마다 그냥 지나는 절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감사해야 하는지, 왜 풍성한 감사가 필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만하지 않는 나의 고백이요, 간증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풍성할수록 더욱 겸손해 지고, 겸손할수록 더 큰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뜻 깊은 감사주일에 이런 마음과 믿음으로 풍성한 감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또한 그들이 자만하게 된 두 번째 원인은 자기발전, 자기변화, 자기성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를 무너트린 뒤 이젠 더욱 성장과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나안을 연구하고, 전쟁에 몰입해야 했습니다.  아이성이 작더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충분히 탐색하고, 신중히 작전계획을 수립하면서 여리고보다 훨씬 더 변화된 모습, 성장된 면모를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없었습니다.  자만심이 그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패배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가야 궁극적인 촐라체는 바로 자만입니다.  자만하면 성장이 없습니다.  성장이 멈추면 결국 자만하게 됩니다.  늘 그 자리에만 안주하여 변화와 발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장해야 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하고, 신앙은 성장이 특징입니다.  성장이 멈추면 자만심, 자존심만이 상처로 남을 뿐입니다.

서울대종교학과 교수를 지내다가 지금은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활동하는 정진홍교수의 칼럼을 아주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는 먼저 이런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 지 58년이 지났는데 당시 13살이던 아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전쟁으로 아버지도 잃고, 집도 잃었습니다.  그는 내일이 없었고, 꿈조차 꿀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낳았고, 이제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온갖 세상물정 다 겪은 세월을 돌아보며 휴식을 누릴 만큼 살림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기 문패가 달린 집도 지니고 삽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 전에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해가 뉘엿거리면 집에 가고 싶었어 그러나 갈 집이 없었지.  그런데도 초조해 못 견딜 만큼 집에 가고 싶었어.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내렸지. 그런데 지금은 돌아가야 할 집이 있어. 한데 알 수 없는 일이야 집에 가서 발을 뻗고 누웠는데도 여전히 집에 가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 아이는 이렇게 덧붙였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내 성장은 그때 멈추었나봐...’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의학적으로 보면 이 사람의 진단이 단번에 나옵니다.  바로 ‘외상성신경증(外傷性神經症)’ 이라는 것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후유증이라고 말입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혹은 어린 시절 심한 정신적 충격과 압박을 경험한 뒤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다른 말로 이런 상처를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6.25 세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식민지 세대도, 4. 19세대도, 군사정권 세대도, 민주화 세대도, 아니 모든 세대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네 트라우마를 겪었을 것이고, 그래서 모두 바로 그 시점에서 성장이 멈춘 채 그 이후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교수는 이것을 진단한 뒤 오바마의 치유를 예로 들었고, 우리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역설했습니다.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진단과 내일에 대한 꿈이 있다면 우리 모두도 치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믿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기에 더 확실합니다.  트라우마는 치유되고, 변화와 성장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만을 극복하여, 우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교만을 믿음의 힘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 힘입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촐라체는 무엇보다도 내 삶에 성장을 멈추게 한 ‘트라우마’입니다.  이것을 넘지 않으면 늘 그 자리입니다.  산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학대하고, 상처와 아픔을 대물림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가면 변화와 성장의 사람으로 우뚝 섭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아간의 범죄를 알아내고, 문제를 해결하여 아골 골짜기에서 새로운 소망을 선포합니다.  이제 그들은 여리고와 함께 아이성도 넘어갑니다.  우리 삶에 아이성은 실패의 현장이고, 범죄의 현장이며, 그리고 자만의 현장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촐라체입니다.  이 봉우리를 넘어야 합니다.  이제 어떤 실패의 경우에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제 모든 욕심을 통제하고 다스리십시오.  그리고 내 성장이 멈춰진 트라우마를 찾아서 해결해 나가십시오.  우리 모두 아골 골짜기의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서 한주간도, 남은 생애도 골짜기와 봉우리와 계곡과 깊은 산을 넘어 하나님의 넓은 세계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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