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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시고 써 주시는 은혜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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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시고 써 주시는 은혜 (마 20:1~16)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한 비유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름하여 포도원 품군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오실 때 주셨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을 때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고 물었는데 (마19:16) 그에게 예수님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좇아오라(마19: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도저히 예수님 말씀대로 할 수 없어서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때"(마19:7)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 

베드로가 생각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얻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당시 제자들의 하늘나라 이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해 오던 이 여행길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시비를 했습니다.(눅9:46-48). 이 다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눅22:24).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세울 나라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워지는 나라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분이 다윗의 왕국과 같은 세상 나라를 세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함께 고난의 세월을 견딘 부하들이 새 정권의 주역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세우시는 새 나라에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이 한자리씩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자세에 대해 예수님은 교정을 시도하셨고 이를 위해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이야기의 줄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한 농부가 포도 농장에서 일할 일군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요즘말로 말하면 인력 공사로 나갔습니다. 이른 아침이란 보통 유대인들의 시간 관념으로 해뜨기 전을 말합니다.

그는 인력 시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부 몇 사람과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 씩을 주기로 하고 자기의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또 3시에 나가 보았습니다. 그곳에 아직 일할 곳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 3시는 우리 나라 현재 시간으로 아침 9시입니다.

주인은 제 육시와 구시 즉 우리 시간으로 아침 12시와 오후3시에 또 나가 보았더니 그곳에 일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에게도 자신의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오전 12시나 오후3시는 품꾼이 품삯을 위해 남의 집일을 시작하기는 늦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시간에 관계치 않고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인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11시에 또 시장 터에 나가 보았습니다. 11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5시를 말합니다. 이제는 일이 끝나 갈 무렵입니다.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밖에는 일을 할 수가 없는 시간입니다. 주인은 품꾼을 구하기보다도 어쩌면 다른 볼일이 있어서 장터에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곳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마20:7) 그랬더니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아무도 써 주는 사람 없는 버림받은 인생
써 준다는 것은 가치를 인정해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대개 인력 시장에서 품꾼을 구할 때는 건강하고 일 잘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합니다. 
자신이 시키려는 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힘이 세고 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은 속된 말로 잘 팔려 나갑니다. 그러나 약해 보이고 힘이 없어 보이는 사람, 그리고 경력이 없는 사람은 일거리가 잘 주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품꾼으로 써 주는 사람이 없다 라고 하소연합니다. 
왜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품꾼으로 써 주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일을 원했지만 써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을 원하지 않았다면 그 시간까지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나 하루의 일을 맡겨 주기를 소망하면서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습니다. 만일 이들의 경험이 부족하다든지 또는 약해 보여서 주인들이 품꾼으로 쓰기를 꺼려하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무도 써 주지 않아 시장에서 허송세월 하던 이 사람들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요? 우리의 하나님을 모르던 세월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모든 것이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하나님 없이 부지런히 살다가 죽어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공사가 다망하였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 날 엄청난 인파가 몰려오고 미사어구로 꾸며진 조사가 낭송되고 어떤 유명한 성악가가 장송곡을 불렀을 것입니다.

요새처럼 수 천 만원 차리 수입차인 캐딜락 장의차에 실려 호화롭게 단장된 무덤에 안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은 그가 죽어서 음부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속에서 고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 주는 사람 없는 불쌍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불러 주심과 써 주심을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써 주심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만일 이 은혜로운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냥 공치고 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절박한 사정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불쌍한 처지를 안고 집으로 발길을 옮겼을 것입니다. 
사람이 일거리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인지 모릅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일거리가 있다는 사실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품꾼을 구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써 주시기를 소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르시고 쓰실 때 적용하시는 원칙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손익 계산없이 종들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손익 계산 없이 종들을 쓰십니다.

오후 5시에 부르신 품꾼은 한 시간만 일하고 퇴근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돕고 그를 위해서 일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는 모든 일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익을 생각하고 손익 계산하시어 일을 맡기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맡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써 주심도 감사한데 품삯까지 두둑하게 주셨습니다.

미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수한 고난 끝에 백화점 왕이 되고, 재무부 장관이 되고, 미국의 10대 재벌에 든 사람이 되고, Y.M.C.A를 창설한 존 워너 메이커씨는 100만 달라를 드려 예배당을 짓고 낙성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주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애들이 줄서서 추수감사 예물을 바치는데 집이 너무 가난했던 나는 빈손으로 온 것이 너무 괴로워 주일학교 끝나고 오후에는 벽돌 굽는 아버지 공장으로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벽돌이라도 한 수레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목사관을 찾았습니다. 잠버드 목사는 내게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30여년이 지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단독으로 100만달라 예배당을 짓게 되니 이 큰 은혜를 말로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이 이득을 보려는 것에서 아니라 그에게 더많은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

너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종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장터에서 일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새벽에(삼시에) 인력시장(장터)에 나와 서성 거리고 있던(놀고 섰던) 사람들입니다.(20:3) 하루의 일을 찾지 않으면 먹을 것 조차 구할수 없는 사람들, 유대인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은 밑바닥 인생들입니다. 

하루 품을 파는 것 조차도 여의찮은 사람들, 어쩌면 아침도, 어제 저녁도 굶었을 사람들. 일자리를 잡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온 가족들을 굶겨야 하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었던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진노를 피할 수 없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 분의 일군으로 부름받은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나를 잊을 때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 하게 됩니다. 
아침 일찍 들어온 품꾼들은 자신들을,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딜" 자들로 평가합니다. 

자신들이 무슨 위대한 존재나 된 것처럼 주인에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비참했던 처지를 생각할 때 그리고 다른 동료들의 동일한 상황을 생각할 때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베푼 주인의 은총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하려 들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아침부터 수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일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과의 약속이외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하고서도 자신들의 수고를 주인이 알아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은 나중에 온자가 자신들 보다 덜 받았으면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을 하고 그것을 빌미로 보상을 흥정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당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들이 주님을 따른 수고에 상응하는 댓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년이나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수고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0:12) 그러나 주님은 지금 베드로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내주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앞에 자신이 좀 수고했다고 그 수고를 가지고 흥정하고 거래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베드로를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자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 만큼 주님을 위해서 수고했으니 이 쯤은 주셔야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입니다. 
마치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사람처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할 말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17:10)입니다. 그냥 구원해 주시고 써 주시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 수는 없을까요?

처음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본문이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 20:16) 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란 말은 이야기의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름받은 품군은 근로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주인이 볼때 하루 품삯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아침에 부름 받은 일군들과는 일의 동기가 달랐습니다. 아침일찍 부름받은 일군들은 하루 품삯을 위해 일하는 품군들이었지만 마지막에 부름받은 이 사람은 불러주신것만도 감격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그러기에 단 한 시간을 일햇어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돈을 바라고가 아니라 자신을 챙겨준 주인이 감사해서 성심껏 일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일군을 찾으십니다. 
불러주신 것 만도 감격해서 품삯을 따지지 않고 일할 일군들입니다. 
연말이 되어 교회에서 각 기관 임원들을 뽑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맡겨주시면 감사히 일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벌써부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속에 다짐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정은 모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인데 그리고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데 나의 사정이나 나의 형편을 핑계 삼아 주님을 섭섭하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일년인데 ...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다면 구원의 은총에 감사한다면 그 감사함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는 없을 까요?

만일 회장을 맡고 임원을 맡고 하는 것이 큰 명예가 주어지고 큰 복이 주어진다고 약속했다면 서로가 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일은 명예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댓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커다란 칭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이 가치가 있고 그일이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댓가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상으로 갚아주시고 위로해 주실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러주시고 써주심에 감사합시다. 
그 감사에 근거하여 주님의 일을 할 때 한 한 시간을 일해도 칭찬받는 것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천국의 일입니다. 오늘 부르시고 써주심의 은혜도 감사한데 쓰신 후에 하나님은 상급과 칭찬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칭찬이나 어떤 대가가 아닌 그저 써주심 그 자체만 가지고 겸손히 섬기는 신앙이 됩시다. 그러면 주님이 높여주시고 하늘에서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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