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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니... (시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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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니... (시 16:1~11)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더욱더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피로 빚은 제삿술을 그 신들에게 바치지 않겠으며, 나의 입에 그 신들의 이름도 올리지 않겠다.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 소속감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계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평화로우십니까? 저는 ‘샬롬’이라는 단어를 ‘안녕’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싶은데, 안녕이란 두루 평안한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삶은 욕망과 그 충족 사이를 오가며, 행복도 느끼고 불행도 느낍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험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hierarchy of needs)로 나누어서 설명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배설하는 것과 관련된 ‘생리적 욕구’입니다. 그 다음은 몸, 도덕, 가족, 건강, 재산 등을 잘 지키고자하는 ‘안전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 다음은 친구들의 우정이나 가족, 연인들 간의 친밀함에 대한 욕구인 ‘소속과 사랑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 다음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고자 하는 ‘존경에의 욕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도덕성, 창조성, 자발성,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에 대한 욕구’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소속과 사랑에 대한 욕구’입니다. 사람은 고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서로 함께의 존재’(Mit-einander-Sein)라 했습니다. 홀로는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들, 혹은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라는 말이 사회학의 용어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틀어박히다'는 뜻의 일본어 ‘히키코모루'의 명사형으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소속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건강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소속감을 충족하기 위한 장치, 즉 계, 동창회, 향우회, 동호회 등을 만들며 삽니다. 패거리 의식으로 고착된다면 문제겠지만, 건강한 삶을 나누는 기본 단위로 운용할 수만 있다면 이것도 긍정적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소속은 분명합니까? 여러분은 누구로부터 살아갈 힘을 공급받습니까?


• 철저한 낙관주의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자기가 어디서 행복을 경험하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2-3)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는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다 내려주시고,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제게는 이런 확신이 부럽기도 하지만 좀 아슬아슬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실은 이런 낭만적인 확신을 뒤흔들어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고, 어둠 속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성도들끼리 상처를 주고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 시인이 혹시 인생의 그늘과 세상의 어둠을 모르는 철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의 첫 구절을 살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합니다.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1) 그도 분명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알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징징거리지 않습니다. 

신앙은 철저한 낙관주의(radical optimism)라지요? 그저 막연히 ‘모든 일이 잘 될 거야’(Everything's all right)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이끄심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된 낙관주의 말입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가 어떻게, 그리고 언제 해결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때,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깊고, 나의 생각보다 옳다’고 확고하게 믿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철저한 낙관주의입니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9-10)


• 당신이 당신 자신의 저자

경제 위기에 대한 경고의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옵니다. 저는 정밀하게 사태를 분석하고 진단할 능력이 없지만,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 만큼은 직감할 수 있습니다. 경기가 나빠지면 그 피해를 가장 크게 입는 것은 가난한 계층들입니다. 올 겨울은 어쩌면 정신의 추위와 더불어 더 혹독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실업이 증가하고, 가처분 소득은 줄어들고, 물가는 오르고, 전망은 불확실하고, 그러면 삶은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때로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고통과 시련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첼리스트 미츨라브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예술가에게 편안함과 명성은 결코 좋은 게 못 됩니다. 베토벤이 지금 살아있다면 그는 어쩌면 하나의 선율도 작곡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스폰서가 되겠다고 나서고, 법인을 세워주고,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려 할 테니까요…만약 내가 소련에서의 그 끔찍한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연주자에게는 어려운 시절이 필요한 법이지요. 그래야 비극의 감정부터 넘치는 기쁨의 감정까지 진폭이 큰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요.”
- Harold Kushner, [Overcoming life's disappointments], Anchor Books, 2006, p.65

이것은 비단 연주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실패와 쓰라림이 있기에 기쁨이 각별하고, 이별이 있기에 만남의 기쁨이 있고, 연약함이 있기에 회복의 기쁨도 있는 법입니다. 자기 앞에 당도하는 삶의 재료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무늬의 삶을 직조해 냅니다. 19세기의 미국 시인 월트 휘트만(Walt Whitman, 1819-1892)은 자기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현재 생활은 책 속의 한 장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지나간 장들을 썼고, 뒤의 장들을 써나갈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저자이다.

그렇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것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의 저자는 나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남의 삶을 모방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숨이 가쁘고,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긍정합니다.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6) 사실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는 척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곳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두려움이나 원망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팔자타령이나 하고 있기엔 삶이 너무 찬란합니다.


• 파랑새는 어디에?

철저한 낙관주의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이야말로 값진 보화를 캐낼 현장임을 알아차립니다. 사람들은 늘 ‘대안 동경’을 가지고 삽니다. 저 건너편에서의 삶이 늘 좋아 보이기에 사람들은 ‘이곳’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저곳’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산골 총각 하나가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더랍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하여 나무에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지만, 배가 고팠던 호랑이는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나무 위에서 깜짝 졸던 그는 그만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호랑이 등 위로 말입니다. 호랑이도 역시 졸고 있었는데 느닷없는 충격에 놀란 호랑이는 죽을 힘을 다하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총각도 호랑이 뒷덜미에 죽을둥살둥 매달렸습니다. 떨어지는 순간이 죽는 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너편 기슭에서 콩밭을 매고 있던 한 젊은이가 그 광경을 보고는 들고 있던 호미를 땅에 내동댕이치며 투덜거렸습니다. “이런 제길, 어떤 놈은 팔자 좋아 호랑이를 타고 노는 데 난 이게 뭐람!”

우리 사는 꼴이 꼭 이렇습니다. 파랑새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것 같아 바깥을 떠돌다보니 다리는 아프고, 마음은 심란합니다. 하지만 파랑새는 가까이에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삶의 자리, 그곳을 거룩한 곳으로 여기고 살면 인생이 한결 풍요로워집니다. 풀 한 포기, 들꽃 한 송이도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때로는 아옹다옹 하기도 하지만 지금 내 곁에 ‘그대’가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요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늘 해야 하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청맹과니처럼 어둠 속을 헤매면서 투덜거리기나 하다가 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시인은 참 밝은 분위기를 주위에 흩뿌리며 사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삶의 비결은 뭘까요?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7)

그는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어긋난 길로 나가다가 절망을 추수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 터전이 흔들리는 때

이 시인의 말 가운데 제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이 되는 말씀은 8절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것이 혼돈된 시대입니다. 어느 것 하나 우리가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돈은 한 순간에 손사래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새 나갑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돈으로 구매할 수도 없습니다. 명예와 권세라는 것도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것을 얻을 때는 행복하지만,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누가 빼앗는 것은 아닐까? 건강도 젊음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는 가슴을 뜨겁게 했던 가치들도 시간의 풍화 작용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데올로기의 불길이 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허망함 뿐입니다. 우리는 코헬렛의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전1:2)

터전이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면 땅 위에 서있던 모든 것들은 다 쓰러지게 마련입니다. 교회 화단에 철모르고 피었던 분꽃이 강추위가 찾아온 다음날 보니 마치 삶아 놓은 것처럼 녹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참 허망한 최후였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도 그렇게 허망하게 스러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허무의 노래나 부르다가 가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허망하지 않은 삶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주신 숙제를 하는 기간입니다. 그 숙제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를 포기하는 때, 사람을 그 이상의 존재로 이끌어 줄 화살이 활시위에 매겨지지 않을 때, 그저 지금의 상태로 만족할 때가 가장 비참한 때”라 했습니다. 물론 세상은 마치 바람이 나무를 뒤흔들어놓듯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온갖 유혹과 어려움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 말이 우리 가슴에 새겨진다면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당당한 사람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조차 나의 생명을 삼킬 수 없다는 도저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작은 손실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 말을 지팡이 삼아 팍팍한 세상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는 사랑의 사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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