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경적 신데렐라 (에 2:12~18)

  • 잡초 잡초
  • 305
  • 0

첨부 1


성경적 신데렐라 (에 2:12~18)
 
   
명작 동화 [신데렐라]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데렐라는 계모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힘겹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요정들이 나타나 신데렐라를 도와줍니다. 빨리 일을 끝내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파티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마침 파티에 참석한 왕자가 한 눈에 반해 신데렐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돌아오며 유리 구두 하나를 남겨두게 됩니다. 왕자가 그 유리 구두로 결국 신데렐라를 찾게 되고,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신데렐라처럼 되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삽니다.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서 자기와 사랑을 나누는 꿈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말로 팔자를 고치는 꿈 말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데도 그 꿈에 기대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보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꿈 속으로 도피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콜레트 다울링이라는 분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말은 타인에게 의존하여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여성들의 심리적 의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와 비슷한 남성들의 심리 상태를 “온달 콤플렉스”라 부릅니다. 이 말은 “남성이 일시에 자신의 인생을 화려하게 변모시켜 줄 여자를 기다리는 심리적 의존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가 이런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런 심리에 편승해서 시청률을 손쉽게 올리려고 합니다.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파리의 여인”, “내 이름은 김삼순”, 그리고 최근의 “유리성”과 같은 드라마들입니다. 이런 드라마들은 줄거리가 다르고 상황이 다른 것 같지만 결국은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잠시나마 자기가 신데렐라가 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듭니다. 자기 속에 숨어있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해소해 봅니다. 그래서 비슷한 드라마가 반복되지만 계속해서 빠져듭니다.

오늘 본문에도 어찌보면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스더 이야기입니다. 에스더는 남에 나라에 포로로 끌려온 처지입니다. 신분이 낮고 천합니다. 혈통도 다릅니다. 그런데 왕비 간택에 나갑니다. 왕의 눈에 들어서 일거에 왕비가 됐습니다. 신분이 땅에서 하늘로 올랐습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 성경판 신데렐라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 속에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같은 심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인생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에스더는 동화나 드라마 속에 잘못 포장된 신데렐라가 아닙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헛된 신데렐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건강한 인생관을 갖도록 올바로 이끌어주는 진정한 신데렐라입니다. 이제 본문이 주는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자

에스더서를 펼쳐보면 잔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1:4를 보면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무려 180일 즉 6개월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를 그렇게 성대하게 벌인 목적은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곧 시작될 그리스 원정에 앞서서 왕권을 과시하고 신하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려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서 기자는 이 잔치보다는 이어진 뒤풀이 잔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6개월 동안의 긴 잔치가 끝나고 뒤풀이로 7일간 잔치가 또 벌어졌습니다. 긴 잔치를 위해 수고한 수산성 사람들을 치하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 잔치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왕이 잔치 중에 왕비의 미모를 자랑하기 위해 왕비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왕비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왕이 진노합니다. 결국 이 일로 왕비는 폐위가 되고 맙니다. 왕실 내부의 불미스런 사건으로 왕비가 폐위된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이 잔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것은 그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왕이 그토록 길게 잔치를 벌였을까요? 왜 왕비는 왕의 명령을 거역했을까요? 저마다 표면적인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 속 깊은 곳에는 에스더를 왕비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엊그제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숭실대학교가 우리 교회 옆에 대형마트를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기획단계여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교회 성전재건축과 맞물려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기획 책임자를 만나보았습니다. 그분 말씀이 숭실대학교가 이번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것은 우리교회에게도 다시 찾아오기 힘든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동시에 건축함으로써 건축도중 발생할 피차에 대한 여러 가지 민원 문제와 지역 주민들의 민원을 함께 해결할 수 있어서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만일 우리교회가 필요로 할 시 대토를 통해서 성전부지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숭실대학교가 건축을 진행할까요? 왜 하필이면 우리와 담을 같이한 이곳에서 건축을 진행할까요? 물론 숭실대학교의 상황에 따라 진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교회 성전 재건축을 도와주시려는 섭리를 작동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되면 될 수 없는 일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되지 않으면 아무리 손쉬운 일이라도 닫혀버리고 맙니다. 


이런 우스개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하와는 정말 예뻐요.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만 바라보지 않겠니?"

아담이 다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하와는 좀 멍청한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만드셨어요?" "바보야, 그래야 그 애가 널 좋아할 거 아니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때로는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어갑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봐야 합니다. 진정한 신데렐라들은 자기 주변에서 작동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2.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에스더는 왕비 간택에 나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에스더는 이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잡아서 결국 왕비가 되었습니다.

우선 1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에스더는 왕비 간택을 위해 12개월을 후궁에 머물며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에스더는 최선을 다해서 주변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헤개라는 사람을 비롯해서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16-17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왕 앞에 나가니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은총을 얻은지라” 에스더는 물론 기본적으로 미모가 뛰어났습니다. 그러면서도 12달 동안 최선을 다해서 자기 미모를 가다듬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한눈에 반할 정도의 미모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치 요셉과 같습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종으로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 그랬습니다. 심지어 오해를 받아 죄인으로 감옥에 수감된 후에도 그랬습니다. 주어진 상황 하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결국 왕 앞에 서게 됐습니다. 왕이 한 눈에 반해서 그를 총리로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최선을 다해서 그 기회를 잡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가끔 재미있게 보는 교양 프로 중에 [생활의 달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 숨겨진 달인들이 참 많았습니다. 뒷정리의 달인, 배달의 달인, 부침개의 달인, 명함 홍보의 달인, 포장의 달인, 상자 쌓기 달인 등등 ... 이분들의 공통점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입니다.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달인이 되었더랍니다. 정말 이분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어진 상황 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이 달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현 상황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한 신데렐라입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풍습이 있답니다. 양을 팔고 살 때 양의 값을 결정하는 방식이 독특하답니다. 양의 덩치가 아니라 양의 특성으로 값을 결정한답니다.

산비탈 중간에 양을 풀어놓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테스트를 해 본답니다. 비탈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풀을 뜯는 양은 비싼 값을 쳐주고 반대로 아래 쪽으로 내려가면서 풀을 뜯으면 값을 덜 친 답니다. 힘들더라도 산 위쪽으로 오르려는 특성을 가진 양들은 고원의 초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하게 산 아래로 내려가려는 특성을 가진 양들은 결국 풀이 없는 협곡으로 가게 돼서 굶은 죽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고생스럽더라도 산 위로 오르려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힘들더라도 주어진 상황 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신데렐라들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왕비로 높이신 이유가 있습니다. 에 4:14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섭리 가운데 왕비의 자리에 앉게 하신 뜻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지금 바사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하만이라는 바사의 실권자가 눈에 가시같이 여기던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계략을 짰습니다. 자기 뜻대로 돼가는 것 같으니까 차제에 유대인들 모두를 다 죽이려 든 것입니다. 이제 꼼짝 없이 유대인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 에스더가 왕비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왕비가 된 것은 에스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위기에 민족을 구하라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스더가 그 말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비이지만 왕이 부르기 전에 왕 앞에 나간다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칫 한 순간에 지금까지 자기가 누리던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아가 목숨까지 위태로운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자기를 왕비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단합니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데렐라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선교잡지에서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여자 청년이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서원을 하고 철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언어 훈련도 잘 쌓았습니다. 기본적인 신학 훈련도 했습니다. 자기가 인도에 가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 하나에 딸 셋을 둔 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형부도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어린 조카 넷을 그대로 두고 인도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본부에 편지를 썼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인도에 가서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봅니다. 대신 인도 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네 아이가 잘 컸습니다. 놀랍게도 그 중에 세 아이가 인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자기가 늘 인도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이 자매가 다시 선교 본부에 편지를 썼습니다.

25년 만에 다시 편지를 씁니다. “제 대신 세 아이가 인도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배로 인도에 선교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선교사로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 보다 내가 인도선교를 위해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에 있습니다. 이분은 늘 인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결국 그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 받는냐입니다. 많은 경우 내 뜻은 무엇이 되는데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진정한 신데렐라는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꿈에 사로잡혀 삽니다. 그러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시달립니다. 그저 누군가 나타나 일시에 자기 처지를 바꿔주기를 기대합니다. 상황 핑계대고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허망한 신데렐라의 삶입니다.

그러나 에스더처럼 진정한 신데렐라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봅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사람들이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신데렐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