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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넘겨지시는 주님 (요 1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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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넘겨지시는 주님 (요 19:1~16)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 오늘날까지 지구상에서 벌어진 모든 재판 가운데 최고로 흥미 있는 재판의 진행상황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재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보통 재판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 유일한 심판자이실 그 분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그 땅을 정복한 당대 지상의 최강세력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총독 빌라도 앞에 서서 그로부터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지신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이 재판은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재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는 18:33-38이 이미 빌라도의 법정에서의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의 첫 대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첫 대면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법정 밖에 모여 있던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그렇게 그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니 이렇게 하면 어떻겠는가? 어차피 유월절이면 내가 당신들에게 한 사람을 사면하는 전례가 있으니 내가 저 유대인의 왕을 석방하는 것이 어떻겠소.” 했습니다(요18:38-39). 

예수님이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어 그들의 명분을 세워주면서도 자기가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살리는 실리도 얻을 수 있는 절묘한 타협을 이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그 협상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강도 바라바를 석방하면 했지 예수는 아니라고 소리 질렀습니다(요18:40).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이런 완강한 입장에 빌라도가 다시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사면과 석방을 거부하자 빌라도는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하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그의 앞에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말하며 손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본문 1-3절). 

로마황제가 머리에 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사람들로부터 “황제 폐하, 만수무강하소서.”라는 경례를 받는 것을 흉내 내서 군인들은 재미로 그렇게 하여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빌라도는 그것으로 오히려 유대인들을 비웃고자 했습니다. 빌라도는 군인들로부터 채찍질과 주먹을 당하고 머리에 박힌 가시관 때문에 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예수님을 데리고 다시 관정 밖 유대인들 앞으로 나가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본문 4-5절) 

빌라도가 비참해진 예수님의 모습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준 것은 자기가 그들의 요구를 상당히 들어주었음을 증명함으로써 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계산에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생각을 눈에 보이게 뒷받침한 행위가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힌 채로 예수님을 유대인들 앞에 내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유대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무언의 반박과 조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물러설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로부터 아랫사람들까지 다함께 예수님을 가리키며 소리 지르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하자 유대인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했습니다(본문 6-7절).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더욱 큰 두려움을 갖고 다시 관정에 들어갔습니다(본문 8-9절). 유대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부인하는 것과 반대로 예수님이 정말 신적인 존재라면 더더욱 함부로 처결할 수 없는 일이므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간 빌라도는 예수님께 대뜸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 이것은 예수님께 “네가 세상에서 온 보통사람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보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대답하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침묵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고 대답하셨던 것처럼 당신과 빌라도는 각각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53:7을 찾아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침묵은 빌라도에게 궁금증과 자존심을 자극한 듯합니다. 그는 위압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본문 10절)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본문 11절)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시 로마황제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속국을 관할하는 총독들에게 내린 통치지침 중 하나는 각 피지배국의 고유한 종교와 그 관행을 존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지침을 잘못 지켜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소요사태가 발생하면 통치를 문책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총독은 유대교의 법과 관행을 존중하며 유대교의 지도층과 잘 협력해야 하고 로마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따라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해도 그것은 직책상의 권리와 의무에서 오는 것이니 어찌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대인들의 죄는 큰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 중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하신 말씀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총독의 직책과 권리와 훈령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로 넘겨줄 것이지만 그 권력 또한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권자이시고 모든 민족과 나라의 참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권력은 그에게서 나오는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판단과 계산에 따라 예수님을 죄 없다고 믿으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리겠지만 그것도 사실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놓으시는 그 감추어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의 주인이 빌라도고 피고가 예수님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재판장이시고 빌라도는 역사의 죄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 빌라도에게 침묵을 깨시고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라.”고 일러주신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하신 말씀의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어쨌든 예수님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압박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를 뽑아 들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본문 12절). 

이 말에는 빌라도도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유대인들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면 그들이 자기를 로마의 훈령을 어기고 총독의 직무를 올바로 수행하지 않는다고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기라도 하면 자기의 정치적 생명은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충신이 아닌 반역자로 몰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로서는 이제 빨리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었습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빌라도가 최종판결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말하기를 “보라. 너희 왕이로다.”(본문 14절) 했습니다. 

그러자 여전히 유대인들은 소리 지르기를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했습니다. 빌라도가 묻습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그때 대제사장들이 대답합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본문 15절) 그러자 빌라도는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본문 16절).

빌라도는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면서도 끝까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이중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셔서 달리신 십자가 위에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붙임으로써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요19:19-20).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잘라 대답했습니다(요19:21-22). 

빌라도가 그렇게 한 데는 복잡한 계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단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어 소요사태를 예방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황제로부터 반역자로 몰리거나 불신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죄 없고 훌륭한 이로 보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두고두고 쏟아질 비난도 어느 정도 피해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을 가능한 한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게 돌리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의 양심의 가책도 완화시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법정에서의 예수님의 재판이라는 이 역사적 사건 속에서 무엇을 봅니까? 우선 대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시기, 미움과 불신, 의혹과 적대감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야를 죽게 한 자들입니다.자기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고 이방인의 손을 빌려 위대한 의인을 처형시킨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해 온갖 계교를 동원하고, 사람을 매수하여 거짓 증언을 하게 하며, 폭력을 사용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백성의 대제사장이면서도 자기들에게는 왕은 오직 가이사뿐이라고 소리 지르는 기가 막히는 인사들입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의 사주에 따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주고 병을 고쳐주며, 귀신을 쫓아내주고 먹을 것 마실 것을 공급하며 인생의 참 의미와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 지르는 군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빌라도를 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살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무죄방면이 안 되면 그를 사면하거나 적당히 체벌을 하고는 석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의 권좌가 위태로워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는 자신의 양심에 소리보다 유대인들의 고함소리를 따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결백과 무죄를 주장하려고 애썼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행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암송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한 빌라도는 비겁하고 위선적이며 냉혹한 인간으로 인류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황제를 대리하는 이방인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고 막상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해야 할 유대인들은 오직 로마황제만이 자기들의 왕이라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웃지 못 할 장면이 전개된 것입니다. 

권력욕에 눈이 멀거나 영적으로 눈이 멀어 진리와 양심과 정의는 유린되고 피를 보고자 소리 지르는 군중의 광기로 가득 차고 결국은 탐욕과 거짓과 위선과 살기가 승리한 것이 빌라도의 법정 안팎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로 넘겨진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 그것은 오늘날 이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쉬지 않고 일어나는 일상사입니다. 그런데 교회까지도 빌라도의 법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반복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넘기는 우리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빌라도나 대제사장들이나 유대인 군중이 보인 모습들이 곧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승리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기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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