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도] 행복한 사람들 (눅 15:3~32)

  • 잡초 잡초
  • 194
  • 0

첨부 1


행복한 사람들 (눅 15:3~32)


1. 행복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무엇을 갖추어야 행복한가?’ 하는 행복의 조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무엇을 갖추어야 행복한가?’입니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성균관대학교>와 함께 조사한 “한국인이 생각하는 행복 조건”에 대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젊어야 한다(젊음).
2. 남보다 잘 산다고 느껴야 한다(경제적 우위).
3. 많이 배워야 한다(배움).
4. 사회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야 한다(사회적인 신뢰감).
5. 종교 행사에 자주 가야 한다(신앙).
6. 가족과의 여가를 중시해야 한다(가족).
···
우리나라 최고 경제 연구기관에서 발표한 결과인데도, 썩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만족한 상태이고 그 만족이 지속적일 때”를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존 매슬로우를 비롯한 미국의 학자들은 다음의 4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만족한 상태’, ‘심리적인 차원에서 만족한 상태’, ‘정신적인 차원에서 만족’, 그리고 ‘영적인 차원에서의 만족’이 두루 갖추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상당수의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자기만족”이었습니다. 건강에 대한 것이든, 돈에 대한 것이든, 그 무엇이든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다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이죠. 저도 한 번 행복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평안하고 기쁜 것이 행복”이라고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행복’보다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들의 행복의 조건은 다르다는 말이지요. 『고도원의 아침 편지』란 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서만 행복하면 진짜 행복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해야 진정한 행복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기 자신이 행복할 때가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은 내가 행복한 순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할 때이며,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 하는 순간이라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우리 역사 가장 사랑하는 우리 주님이 행복해 하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행복을 느낄 순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어떤 경우에 행복을 느끼실까요? 


2. 하나님의 행복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것에 관한 비유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 첫 번째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3~7). 

100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1’보다는 ‘99’가 더 많으니까 그 ‘1’에는 신경 덜 쓸 것 같습니다. 혹 ‘하나’에 집착하다가 더 많이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목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그 하나를 찾고 또 찾아 다녔습니다. 여기 이 ‘찾는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요. 그 중에 상인이 ‘상품을 판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훌륭한 세일즈맨인지 아십니까? <미국 소매상 협회> 조사결과, 물건을 판매할 때, 세일즈맨 중 48%는 단 한 번 권유한 뒤 상대가 거절하면 포기하고, 두 번 권유하는 사람은 25%, 세 번 권유하는 사람은 15%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일즈맨 중 12%만이 네 번 이상 권유한다고 응답했는데요, 놀랍게도 네 번 이상 권유한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어느 사람에게 다가가서 상품을 팔다가 거절당하면, 다음에 또 찾아갑니다. 낮에 거절당하면 분위기를 봐서 저녁이나 밤에 찾아가고, 본인이 안 되면 부인이나 자녀들을 찾아갔고, 때로는 그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겨주면서 기어코라도 상품을 판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찾는다는 말은 이렇게 ‘끈질기게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끈질기게 찾고 찾은 목자는 잃었던 한 마리의 양을 다시 찾았습니다.


2) 두 번째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8~10). 

열 드라크마를 가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드라크마는 은전(銀錢)으로서 로마의 동전인 데나리온처럼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오늘의 가치로 친다면 적게는 3만원에서, 많게는 7, 8만 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여인들이 가진 열 드라크마는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사랑의 징표이자 결혼지참금이었다고도 합니다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의 여인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징표였다는 것을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열 개 중에 하나만 없어져도 전체가 무의미했고, 또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대신 할 수 있었는데도 오직 잃은 그것만을 찾은 것을 보면, “열 개의 드라크마”라고 하는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임을 알 수 있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서 찾고, 또 빗자루를 동원해서 찾습니다. 즉 이 여인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찾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비유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소위 <탕자비유>로서, 앞의 두 가지보다는 좀 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11~32).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잔재주만 부리고, 일은 하지 않고, 놀기를 좋아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둘째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이 아들은 참 ‘못돼먹은 자식’입니다.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아들입니다. 아버지 보다는 아버지의 재산을 더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를 보십시오. 아버지는 그 아들의 요구대로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주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오래 된 규정(신 21:17)대로 아버지의 재산의 1/3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 돈으로 바꾸어서 외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하고, 갖고 싶었던 것을 다 소유하면서 즐겁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재산을 허비하는 자에게 돈은 머물지 않습니다. 

결국 그가 가진 돈이 전부 다 떨어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가 간 나라에 흉년마저 들어 먹을 것조차도 구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살 길이 막막한 그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졸지에 종이 된 그가 맡은 일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천하고 저주스럽게 여기는 일인 돼지 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신세가 얼마나 비참했든지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마저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자리에 떨어진 것이죠. 

그때서야 그는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제 온다는 기약은 없었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들이 저 멀리에서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들을 보았을 때 그에게 뛰어가서 그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이 아들을 환영하여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겼습니다. 그리고서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4) 이 세 가지 예수님의 비유에서 매 번 반복되는 표현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세 가지 모두 다 친구들이나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좋아서 즐거워서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각 비유에서 똑 같이 언급된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32절,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 비유에 등장하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그리고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는 모두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남아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못하거나 어린 양일지라도, 지금 남아 있는 것보다 적은 금액의 은전 한 닢이라도, 그리고 자기 곁에 남아있는 아들보다 자신을 덜 사랑하고 늘 사고 만 치는 아들일지라도, 찾고 또 찾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찾고 찾으셔서는 너무나 기뻐하시고, 그 기쁨을 못이겨 잔치를 벌이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행복의 제일 조건으로 삼아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주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들의 행복

성도들이 행복을 느끼는 두 번째 순간은 “그들이 행복할 때”입니다. 저는 말씀을 시작하면서 ‘행복은 무엇이며, 행복의 조건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 다섯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욕구와 조금 부족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는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로 겨루어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또 한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였습니다. 

입고 먹고 사는 것이 충분하거나 넘치지는 못해도 그래도 만족할 만한 정도라면, 남들로부터 못났다는 소리 듣지 않을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높지는 않아도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명예와 지위를 가졌다면, 40대에 40대 평균치의 건강 50대에 50대 평균치의 건강 60대에 60대 평균치의 건강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웃음이나 감동을 주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상의 것들 하나 하나는 별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다섯 개를 모아놓고 보면 이것을 다 가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들은 “경제적인 여유(45.4%)”를 행복의 제1 조건으로 꼽았습니다. 반면 중국 직장인들은 행복의 조건 1위로 ‘건강(85.9%)’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행복의 기준이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어느 목사님께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행복이란 외부적인 환경에서 오는 줄로 알았기에 늘 어둡고 추운 자신의 환경을 원망하면서 ‘좀 더 행복한 가정과 어린 시절을 가졌더라면, 좀 더 행복한 학창시절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늘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이 지난 후에도 늘 부족한 것을 들추어내며 원망을 자주 했습니다. 세월이 십 년, 이십 년 흐르는 동안 사정이 달라져 환경이 무척이나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생각해 볼 때, ‘환경이 좋아졌다고 해서 전보다 더 행복한가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가난하고 춥고 배고프던 그 시절이 아름답고 행복하게까지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각각 다른 행복의 조건을 말합니다. 결국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고, 그때그때마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요?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미국의 백만장자 ‘제이 골드’는 죽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다." 행복은 지위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었던 ‘베콘스 필드’ 경은 "젊었을 때는 실수 투성이었고 중년에는 투쟁뿐이었다. 이제 늙으니 후회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투쟁에서 승리하고 정복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은 "이 땅에는 더 이상 정복할 곳이 없다." 면서 그의 막사에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주일 밤, 추수감사절을 맞아 청년들이 준비한 “2008년도 우리 교회 10대 뉴스” 등의 다양한 코너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을 맞아 학습세례입교한 분들 가운데서 세 분이 간증을 했습니다. 아들에게 ‘교회 가겠다’는 약속을 해놓고서는 그것을 어겼다가 다리를 다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회 다니게 된 한 성도, 그는 이제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으며, 달리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으니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다 힘들면 기어서라도 갈 것이고 기지도 못하게 되면 교회 성도들이 데리고 가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우리 모두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지요. 꿈을 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서울 고시촌에서 공부하다가 너무 너무 힘들고 외로워 교회를 찾았고, 낙향한 후 우리 교회를 찾았다는 자매, 이제는 주님과 교회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자신도 섬기면서 살고파서 새가족부를 섬긴다는 자매의 간증도 있었지요. 아버지 학교를 통하여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설교를 듣는 중 자신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벗은 얼굴 맨 몸으로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섰다는 성도의 간증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간증하는 그들은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다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행복의 반대인 불행은 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최상의 상태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을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행복을 누렸던 곳에서 벌거벗은 수치 때문에 몸부림쳐야했고, 불안과 공포로 숨어야 했고, 서로 사랑한다던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 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며, 죄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심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으며, 죄로 인한 수치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은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분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영육간에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시며, 또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주십니다. 즉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아버지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카를 힐티는 “인생의 최대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4. ‘나’의 행복

이상에서 저는 하나님의 행복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행복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외적으로 볼 때 도저히 행복할 것 같지 않은데 행복의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서도 불행의 눈물을 흘리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단칸방, 월세방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아방궁 같은 집에서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송명희씨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부자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계적인 인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행복해 지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행복해 하시면 우리가 행복해 지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하면 우리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다 주관적이고, 그때 그때의 임시적인 것이고, 세상적인 것이고, 인간적인 것일 따름입니다. 

지난 주일 밤에 우리는 주님을 만난 감격과 교회 공동체의 한 가족이 된 것으로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고, 그가 행복해 하는 것 때문에 우리 역시 가장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을 간증자들이 보여준 것이죠. 행복을 전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 모두가 행복해 지는 일,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행복하게 만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잃은 자”,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전도는 행복이다!”
“전도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일이다!”
“전도는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전도는 내가 행복해지는 일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