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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스로 지고 가는 십자가 (마 1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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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지고 가는 십자가 (마 16:24~28)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요?

시편 127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까닭은 우리 힘만으로는 세울 수 없는 집을 세우고 싶기 때문이며,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우리의 성을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집을 세워 주시고 우리의 성을 지켜 주시는 분일까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집은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성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집도 무너지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의 성도 흔들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시편 127편의 말씀이 틀린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틀릴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집을 세우시고 우리의 성을 지켜 주시는 방식이 우리의 생각과 좀 다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집을 세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집을 세워야만 무너지지 않는지를 알려 주셔서, 무너지지 않는 집을 세우는 능력을 주셔서 우리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 집을 짓게 하시며, 우리의 성을 직접 지켜 주시기보다는 우리에게 성을 지킬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의 삶과 인생의 성을 능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2장에 정말 제가 좋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2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하나님께 대한 예레미야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 내용은 우리들의 보편적인 궁금증을 대변한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오히려 형통하는 경우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할 때 예레미야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 같아 보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때 자신의 처지를 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이와 같은 표현을 보면 당시 예레미야가 처하여 있던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암담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와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있는데 이렇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세상의 악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로 사는데 도리어 형통하니 예레미야로서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와 같은 예레미야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5절에서 이렇게 답변하여 주십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 하겠느냐?”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정말 시원하고 통쾌한 하나님의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레미야 12장의 말씀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르셔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의인을 사랑하지 않으셔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무능하셔서도 아니라 의인은 말과 경주하여도 이기고 요단 강 물이 넘치는 것과 같은 무섭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능히 이겨 살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셨습니다.

너무 편안하게만 하면 점점 사람은 약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말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을 강한 사람으로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가끔 혹독한 시련과 어려움을 통하여 저들을 훈련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로마서 5장 3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이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바울은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신에게 가끔 환난을 주시는 줄을 알았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환난 중에 무너지겠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니 환난 중에도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요.” 하나님을 믿는 의인이 환난 중에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인내함이 생기게 되었고 인내하다보니 고난과 역경에 대한 내성이 생기게 되었고, 그와 같은 내성이 점점 쌓여 결국에는 소망하는 일들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강한 사람으로 연단되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경험 적인 고백이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시험과 환난은 모든 것이 끝나는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강한 사람으로 연단하고 훈련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랜 당뇨병 환자입니다. 안식년을 보내면서 제법 상태가 많이 좋아졌었습니다. 꾸준히 운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헬스클럽에 등록하여 가기도 하고, 허드슨 강 변 아랫길을 땀이 나도록 걷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운동을 하면 혈당 수치가 떨어지고 모든 몸의 컨디션이 좋아집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할 수 있는 대로 운동을 계속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무래도 안식년 때만큼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전혀 운동할 시간이 없어서 좀 불안했었는데 어제 혈당 수치가 좋지 않았습니다. 결혼 주례를 마치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교회로 돌아와 교회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결혼식장에서의 식사는 가볍게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남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보통 때는 남산 산책로만 걷는데 어제는 일부로 팔각정까지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운동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운동 삼아 걸을 때 가능한 한 빠른 걸음으로 걷습니다. 보통 한 시간 조금 더 걷는데 절반은 종단지가 당길 만큼의 속도로 걷습니다. 그렇게 걸으면 나머지 절반을 돌아오는 동안 종단지 근육이 풀립니다. 종단지가 당길 만큼의 속도로 걷을 때 조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을 계속함으로 제 몸이 점점 튼튼해져 갑니다. 다리에 근육이 붙습니다. 편하게 지내면 몸에 근육이 생기지 않습니다. 점점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조금은 고통스러워도 힘든 헬스 운동도 하고 걷기 운동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에도 근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영적인 근육을 위해서도 운동이 필요합니다.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는 지난 7년 동안 거의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큼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가만있었는데 교회는 저 혼자서 성장하고 부흥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쉽게 성장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그렇지 못한 교회의 교인들보다 나약해 지기 쉽습니다. 지난 7년 동안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약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야성도 없고 근성도 없는 그냥 온실에서 자란 꽃 같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작고 어려운 교회에는 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짐들이 많습니다. 달갑지는 않지만 구레네 시몬과 같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작고 어려운 교회에는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힘들고 어렵지만 점점 그것을 감당할 힘이 생깁니다. 영적으로도 생기고 육적으로도 생깁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계산하면 도저히 계산이 안 되는 일들을 교회는 해 내곤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회에는 큰 일도 척척 감당해 낼 수 있는 기둥과 대들보 같은 교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지난 주 저는 우리 교회 사랑방 게시판에 ‘착한 우리 교인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올렸었습니다. 지지 난 주 저는 믿음으로 승부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오히려 믿음으로 강한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였습니다. 야곱과 같은 기도로 승부하고, 힘들면 힘들 수록 더 하나님의 식과 법으로 승부하고,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시니, 그리고 결단코 상을 잊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어려울 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돌보아 주는 것으로 승부하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거기까지만 설교 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저는 한 가지 승부수를 더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십일조였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렇게 설교하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정말 힘들어서 쩔쩔맬 교인들에게 부담을 덜어주는 설교는 하지 못하고 더 짐을 지어주는 설교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헌금 통계를 보며 저는 정말로 코가 찡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난 주는 셋째 주일로 십일조 헌금이 많이 나오는 주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추수감사 헌금을 하는 주일이었기 때문에 십일조 헌금은 연중 가장 적게 나오는 주일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헌금 통계를 보니 십일조 헌금이 많이 나왔습니다. 십일조 헌금이 많이 나온 것이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 교인들 참 착하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나왔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좋고, 우리 교회 교인들이 좋습니다. 여러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 허전 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크기에 비해 크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앞장 서서 감당해 주려고 하는 기둥과 대들보 같은 교인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교회 건축을 할 때 적지 않은 예산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헌금 작정을 하였습니다. 헌금을 작정할 때 먼저 당회원들이 작정을 하고 그 다음에 안수집사와 권사들이 작정을 하고 그 다음에 서리집사들이 작정을 하고 마지막으로 교인들이 작정을 하였습니다.

당회원들 중에 재력이 있는 분이 한 두분 정도 있었고 나머지는 그냥 자기 집 정도 가지고 사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와 같이 교회의 큰 일을 할 때에는 적어도 당회원들이 1/3은 감당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있으셨습니다. 물론 당회원의 숫자는 적고 건축예산은 너무 컸기 때문에 저들이 1/3을 다 감당하지는 못하였지만 제가 감탄하고 감동하리만큼의 작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안수집사와 권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건축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교회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작용하였습니다. 추수감사 헌금을 하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때로 큰 일을 할 때마다 저들은 정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힘이 되어 주었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흙도 필요하고, 판자도 필요하고, 못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대들보도 있어야 하고 기둥도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대들보는 중히 여기시고 못과 판자는 하찮게 여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대들보만 가지고는 집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둥과 대들보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하여 대들보와 기둥과 역할을 감당할 사람들을 미리 준비해 놓으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그와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문제는 저들이 그와 같은 역할을 잘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특별히 힘을 쓰지 않아도 교회는 그냥 잘 되어가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기들이 힘을 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교회에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희년헌금을 하고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해도 다른 자재들은 나무랄 것이 별로 없는데 큰 몫을 감당해야 할 대들보와 기둥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너무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것 같아 조금 쑥스럽지만 지난 주 십일조 헌금에는 감동했지만 추수감사헌금에는 조금 섭섭하고 허전했습니다. 오늘 높은 뜻 하늘 교회에서 첫 예배가 드려 집니다. 높은 뜻 하늘 교회는 청어람과 함께 우리 교회 소유의 건물입니다. 800평의 건물이 우리 교회 이름으로 등기가 끝났습니다. 저는 그 일이 너무너무 감사하지만 조금은 부끄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 건물은 우리 교회 교인이 헌납한 건물이 아니라 다른 교회 교인들이 헌납한 건물입니다. 우리 교회는 7년 만에 출석이 5천 명이 넘는 교회가 되었지만 우리 5천 명 중에는 아직 그와 같은 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없다는 것이 조금은 허전하고 섭섭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추수감사헌금이나 희년헌금 작정하는 것을 보면 그런 걱정이 듭니다.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는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쑥쑥 저 혼자서 성장하는 교회니까 부담 없이 다니시기 좋으시지요? 그러나 거기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만 합니다. 

부담 없이 숨어서 손님처럼 교회 생활하시는 것은 이제 다섯 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관중 속에 숨어서 편하게 교인 노릇해도 좋은 숭의교회는 이제 다섯 주만 지나면 없어집니다. 이제는 우리는 높은뜻 광성교회, 높은뜻 정의교회, 높은뜻 푸른 교회, 높은뜻 하늘교회로 흩어집니다.

여러분 거기 가셔서는 여기서처럼 교회생활하지 마시고 조금 부담스럽게 교회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짐을 지고, 부담을 가지고 신앙생활과 특히 헌금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부담을 감당할 힘과 능력을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실 줄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내 팽겨 치고 부담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점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스스로 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강제로 지우십니다. 교회에서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으니까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억지로 지는 십자가보다 스스로 지는 십자가가 더 좋습니다. 꽤 부리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교인들이 되어 새로 분립하는 교회의 대들보 역할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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