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을 보이라 (약 2:14~18)

  • 잡초 잡초
  • 313
  • 0

첨부 1


믿음을 보이라 (약 2:14~18) 

유대인 의사 코른 펠트(P. Kornfeld)는 소련 공산주의에 의해 시베리아 감옥에 유배를 당합니다. 억울한 옥살이로 그는 분노와 원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유배자를 감옥에서 만났는데 그는 늘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코른 펠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내용이 궁금하여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코른 펠트는 장암에 걸린 젊은 청년 유배자를 수술하게 됩니다. 그의 영적 곤고함을 보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과 새로 발견한 자유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코른 펠트는 죽게 됩니다. 감옥에서 온갖 부정부패에 관여해 왔던 코른 펠트는 거듭난 이후 동업자였던 간수의 살해 위협을 감지하고도 전도하며 불의에 항거하다 그 간수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젊은이는 코른 펠트의 열정적인 마지막 말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보여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자신이 그 곳에서 깨달은 것을 전세계에 말하게 됩니다. 곳곳에서 소련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의 불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소련은 멸망하였습니다. 그 젊은이는 바로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솔제니친(Alexander I. Solzhenitsyn)입니다. 

본문을 통해 야고보는 믿음이 있노라 자위하면서 참된 삶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를 합니다. 당시 교인들은 믿음이 있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아노라고 주장했지만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참 믿음이 있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에 의하면, 참 믿음이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율법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가 있지만, 오히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나가는 행위가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참 믿음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증거가 바로 행함이라고 야고보는 강조합니다. 

한 해를 지나면서 신앙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행함의 열매가 있었는가 살피며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행하는 생활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있으나 그에 따르는 행함이 없었다면 벌써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이미 유익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히 보여야 할 믿음의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로 희생을 행함으로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에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가지에 그네를 매어 타기도 했습니다. 나무 그늘에서 마냥 즐겁게 놀았습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놀이터를 제공했습니다. 소년은 자라면서 열매를 구하게 됐습니다. 다행히 나무는 좋은 열매를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청년이 되자 집에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합니다. "내 가지를 베어다 불을 때서 더웁게 하라". 소년은 장년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말하며 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때 나무가 말합니다.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 타고 가라고." 그러고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멀리 떠난 소년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백발의 노인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때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습니다.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습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기쁨을 방해할 수도 있고, 믿음을 깊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희생을 보이지 못한다면 후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말합니다. "처음에는 무거운 짐, 죽음과 연관된 짐처럼 여겨지지만, 희생은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결코 평범한 위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위해 희생하도록 초청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무엇을 주기 때문에 신앙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까? 이 질문에 바로 대답할 때까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앙의 회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생을 행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작은 희생이라도 감수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자기부인에 있고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손해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희생을 행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심한 희생일지라도 감수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희생을 좇아가는 믿음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희생을 통하여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겸손을 행함으로

유명한 흑인 교육가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박사가 앨라배마의 터스키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후, 그 지역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백인 부인이 워싱턴 박사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흑인이려니 해서 멈춰 세우고 몇 달러를 줄테니 장작을 패달라고 요청합니다. 총장은 특별한 일도 없고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소매를 겉어 붙이고 장작을 패서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습니다. 

일이 끝나 돌아간 후에 그 집의 흑인 하녀가 그를 알아보고 주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이 되어 다음날 아침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 총장은 "부인, 괜찮습니다. 저는 가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 그 뿐 입니까? 이웃을 위해 돕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요" 하며 위로를 했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들을 세워주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당시에 믿음을 말과 입술만의 진리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배격합니다. 그들은 신앙을 생명도 없고 삶도 없는 입술 고백으로 전락시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결코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며 아무 유익도 얻을 수 없습니다. 믿으면서도 생명의 결과를 끌어내지 못하다가 끝내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행하는 믿음만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강조합니다. 

믿음은 행함에서 인식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래?' 의 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약삭빠르고 영악한 사람들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행하며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 더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심령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높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지적하면서 겸손을 행함으로 보여 주는 것만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강조합니다. 부디 겸손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구원을 행함으로 

복음 전도자 크라일레일(Stephen Crailrail)은 성령의 감동으로 밀림 지역에 선교하러 들어갔습니다. 도착한 곳은 벌목꾼들이 살다가 이동해 버린 황폐한 마을이었습니다. 사람이라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크라일레일은 가슴이 뜨거워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벽을 향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듣는 사람이 없었지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몇 년이 흐른 후, 런던의 다리를 지나가는데, 한 사람이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찾았군요! 이제야 찾았군요!" 라며 무척 좋아합니다. "아니, 무얼 찾아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몇 년 전 미국의 밀림 지역 오두막집에서 벽을 향해 설교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예, 설교는 했지만 아무도 없었는데요?" "저는 벌목꾼이었습니다. 빠뜨린 도구를 찾으러 마을에 다시 들어갔다가 당신이 벽을 향해 설교하고 있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후 전도할 마음이 불타올라 계속하여 전도했는데 천 명이나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삼백 명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구원을 행함을 보여 주었던 전도자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역사였습니다. 

껍데기만 있는 화석화된 신앙이 아니라 구원을 행하며 보여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여야 합니다. 영혼의 생명을 구하는 믿음을 보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믿어온 햇수가 아름다운 만큼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의 행함이 계속 보여져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로 악한 세력을 물리치며 언제나 승리하는 믿음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바클레이(William Barclay)목사가 흑인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한 부인이 일어나 말합니다. "믿음이란 좋은 것"이라는 간증입니다. 바클레이는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를 행하는 면에서 어떻습니까? 은혜 받은 후 부인께서는 남편을 위해 좋은 음식을 많이 준비하게 되었습니까? 가정에서 친절하고 어진 분이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바클레이 목사의 뒤에서 "목사님, 묻는 것 좀 그만하세요, 그는 제 아내입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클레이는 그 교회 전도사의 소리임을 알아 채리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전도사의 외침을 통해 그의 아내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로는 그렇지만 받은 은혜가 행함으로 나타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손해볼 각오도 해야 합니다. 겸손히 행함으로 낮아짐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능력을 행함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될 수 있으면 말은 줄이고 행함으로 보여야 합니다. 이제는 말만 할 때가 아닙니다. 단순히 신앙고백 하거나, 듣기만 할 때가 아닙니다. 행하고 움직일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디 희생을 행함으로, 겸손을 행함으로, 구원의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보여 아브라함과 라합처럼 칭찬을 얻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