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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사를 땅에 묻지 마시오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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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를 땅에 묻지 마시오 (마 25:14~30)


1993년 7월 7일 캘리포니아 자동차 클레임 사무실에 소포하나가 당도했습니다. 이 소포는 헌 과일상자에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매우 수상쩍은 상자임을 바로 직감했습니다. 미심쩍은 상자를 그냥 풀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폭발물이면 어떻게 합니까? 경비원은 경찰을 불렀습니다. 400명의 근무요원들이 일단 대피했습니다. 폭탄물 제거요원(The bom squad)이 도착했습니다. 상자를 중립에 놓은 수 공중폭발 시켰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폭발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24,000의 현금이 $20짜리로 가득 넣어 있었습니다. 그중에 $1,000은 폭발로 인해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조심하다가 돈만 날렸습니다. 때로는 너무 조심스런 태도가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사인간판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미국 테네시주의 낙스빌(Knaxville, TN)에 있는 동물원에는 이런 사인간판(주의를 요하는 광고문)이 걸려 있었습니다. “안전에 조심하십시오. 이 펜스에 앉거나, 기어오르거나, 기대지 마시오. 만일 떨어지면 동물들이 당신을 잡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동물들이 아플 것입니다.” 사람을 위한 안내문인지, 동물들을 위한 안내문인지 헷갈립니다.

1901년에 안나 에디슨 테일러(Anna Edison Taylor)라는 여인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드럼통을 타고 건넌 최초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드럼통에 자신의 생명을 던진 것입니다. 통에서 미끄러지면 안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녀는 목숨을 건 모험을 단행하여 나이아가라를 최초로 건넌 여인이 되었습니다. 새롱운 일을 하려면 모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어떤 때는 매우 조심스러움이 요구될 때도 있습니다. 조심은 모든 일을 실수 없이 해낼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너무 조심하다보면 큰일을 해내지 못합니다. 안나라는 여인처럼 모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험이 없이는 발전도 못하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부자가 먼 여행을 떠나며 자기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나에게는 5달란트, 다른 하나에게는 2달란트, 그리고 나머지 한 종에게는 1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이때 1달란트의 가치는 노동자의 3년 품삯이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적어도 15년은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돈입니다. 5달란트 받은 종은 즉시 사업에 투자를 해서 5달란트 남겼고, 2달란트 받은 사람도 투자해서 2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너무 조심스러워 안전하게 땅에 묻었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에 있는 대로 읽어봅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 25:18)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벌어들인 종들에게는 크게 칭찬을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하지만, 1달란트를 받아서 땅에 묻었던 종에게는 야단을 칩니다. 보통 야단이 아니라 그에게 주었던 1달란트까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는 바깥으로 내칩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26-30)

여기 보면 이 비유는 5달란트 남긴 종이나 2달란트 남긴 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1달란트 받은 종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준 1달란트를 땅에 묻었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줍니다. 이 달란트(talent)는 예전에는 화폐단위로 쓰였으나 지금은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나 “재능”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자에 맞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60억 인구의 모든 사람에게 그에게 맞는 특별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잘 개발해서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큰 능력을 주셔서 크신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받은 은사를 땅에 묻고 사는 사람을 향해서는 호된 꾸지람이 내려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이 비유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민중 선동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아다가 부유한 자들에게 주라고 한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아닙니다. 터무니없는 해석입니다. 이 비유의 진의는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잘못된 두려움은 인생을 졸아붙게 합니다. 그런 시각에서 이 비유를 해석해 보려합니다.

첫째로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Many people are ruled by their fear). 사람들이 좋은 결심, 훌륭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이 두려움입니다. “할 수 있을까?” “어려울 거야” “안 될거야” “불가능하지!” 이런 지나친 두려움이 좋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합니다.

불란서 육군은 낙하산병(paratroopers)을 모집하는 캠페인을 벌리는 중에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낙하산병 모집 광고를 붙였습니다. 그 포스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불란서의 낙하산 부대에 들어오십시오. 낙하산을 메고 뛰어 내리는 것 보다 이 거리를 건너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이 포스터는 그 밑에 어떤 사람이 낙서를 해놓기 전까지는 꽤 성공적이었습니다. 낙서는 이렇습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모병 사무실은 이 거리 건너편 에 있습니다.

낙하산병이 되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낙하산 점프 보다 더 위험한 거리를 지나야 모병사무실에 갈 수 있는 것 때문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팻씨 클레어몬트(Patsy Clairmont)라는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광장공포증(agoraphobia)에 시달렸습니다. 그녀는 집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갖고 있는 광장공포증은 터무니없는 두려움입니다. 많은 군중들 앞에 선다 해서 아무런 위해가 그녀에게 가해지질 않는데도 그 공포는 그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때 스테반 아터번이라는 사람이 주의를 주었습니다. 목욕탕에 떨어져 다치거나, 화장실에서 그녀의 머리를 부딪치거나, 집안 내에서 사고로 죽을 확률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는 확률이나 많은 군중들 앞에서 넘어져 죽을 수 있는 확률보다 훨씬 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팻찌는 두려움들을 내쫓지 못했습니다. 그 두려움들이 그녀를 집안에 칩거시켰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모든 두려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겼습니다. 그 후에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그녀는 혼자 운전을 해서 공항으로 갑니다. 비행기 표를 끊어 여행을 합니다. 수천 명의 여인들 앞에 서서 강연을 합니다. 그녀는 자칫 자신의 그 놀라운 은사를 땅을 파고 묻을 뻔 했습니다. 

진 투머(Jean Toomer)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움은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기 전까지는 나를 얽어매는 올가미이다”(Fear is a noose that binds until it strangles)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려움 앞에 섰을 때 그 두려움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없애야 합니다. 두려움을 정복해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은 어차피 모험입니다. 모험관리사로 유명한 래리 러단(Larry Laudan)은 말하기를 모험을 관리하는 원칙의 제1조는 “모든 것은 다 모험이다”(Everything is risky)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안전(absolute safety)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집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매년 미국에서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침대에서 떨어져 심한 부상을 당하여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아마 여러분들 집이나 사무실이 창문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명 중의 하나가 창문에 있는 베네치안 커튼 줄에 걸려 부상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의 상당한 숫자가 돈을 침대 매트리스 속에 숨겨두고 있을 것입니다. 거기가 그래도 안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년에 수천 명이 돈을 매트리스에 넣다가 베이거나 다쳐서 응급실로 실려 온답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모험입니다.

심지어 돈을 땅에 묻는 것도 위험한 모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 며 도 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 느니라』(마 6:19-20)

이 세상에 모험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당신이 누구를 사랑할 때 그것도 역시 모험입니다. 위험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것 역시 모험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없이 모험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없습니다. 

데니스 웨이틀리(Denis Waitley)라는 작가가 익명의 시인이 쓴 잘 알려진 시를 이렇게 바꿔 썼습니다.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 있었다네
전혀 웃지도 않고 놀지도 않았던 사람이라네
그는 전혀 모험도 하지 않았고 시도도 않했다네
그는 전혀 노래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네
어느날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보험회사는 거부했다네
왜냐면 그는 전혀 산 적이 없기에
그들은 그가 결코 죽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네.

오늘날 교회마저 두려움에 지배되고 있을 때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끔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두고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We can't afford it)는 결론을 내릴 때 너무 슬플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능력이 자그마한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의 핵심은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하느냐?”(Do you trust God?)는 물음입니다.

당신은 지금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믿음에 지배당하고 있습니까?(Are you ruled by your fears or your faith?)

여기 1달란트 받은 종은 그의 주인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땅에 묻었습니다. 그는 땅을 더 믿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동입니다. 당신은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Are you trust the Master of the universe?) 당신은 그분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습니까?(Are you willing to give Him your best, with nothing held back?)

자신의 미래를 염려하며 방황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신분석에 의한 마비증세(paralysis by analysis)라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람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나무 곁의 벤치에 앉아있는 노인 곁에 앉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람쥐들의 행태를 보았습니다. 키 큰 나무 위의 한 가지에서 옆에 있는 다른 나무의 가지 위로 뛰어 오르는 다람쥐를 보았습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나무 가지 위로 뛰어 올라가는 것은 얼토당토한 일이었습니다. 다람쥐는 자살하듯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나무로 재빠르게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말합니다. “나는 여기서 저런 멍청한 뜀뛰기를 하는 다람쥐들을 많이 보고 있소. 마치 자살이나 하듯 뛰어오르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땅에 떨어지지. 주변에는 개들이 많이 있는데도 전혀 괘념치 않고 뛴단 말이야. 아마도 한 나무에서 평생 살지 않으려면 저런 모험을 해야 삶의 지경을 넓혀 가는 것일게야!” 이 청년은 그 노인의 얘기를 듣고 “그래. 내 신경이 다람쥐 신경만 못하겠나!”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다시 일어서서 인생의 다른 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는 병에서도 치유되었고 새로운 인생길이 열려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결심을 해야 할 때 무엇 때문에 망설이십니까? 물론 “조심스러움”을 바람에 날려 보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때로는 조심성이 있어야 합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큰 사고를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런 선상에 똑같이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는 때때로 너무 조심스러워하다가 기회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니다.(God expects great things from us)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재능을 땅에 묻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쁘게, 그리고 힘차게 삽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다 나은 나로 다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은사들을 활용합시다. 

물론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매일 실수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나 재능은 축소되지 않습니다. 그 은사를 땅에 묻지 맙시다.

우리들 중에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꼭 고쳐야 할 것들이 몇 가지씩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몰두하여 모든 일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내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하면 새로운 미래가 열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기대는 승리하는 삶입니다. 성공하는 삶입니다. 행복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소중한 은사를 땅에 묻어서는 안됩니다. 개발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버락 오바마는 어려서부터 좋은 가문, 좋은 핏줄을 타고 나지 않았습니다. 좋은 환경 가운데서 자라지도 못했습니다. 백인 어머니가 천대받는 흑인과 결혼해서 자신을 낳았습니다. 인도네시아인과도 재혼해서 열악한 인도네시아까지 가서 살았습니다. 두 번씩 이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랄 수가 없어서 결손가정 환경 중의 하나인 조손가정(조부모와 손자)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가슴 속에 “나는 운이 없어. 부모복도 없어. 지지리 복이 없는 놈이야. 피부색깔도 검고, 의젓한 아빠도 없어. 나는 버려진 자식이 아닌가?” 그런 생각만 하고 자랐다면 십중팔구 슬럼가의 갱단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바꾼 구호가 있습니다. “Yes you can. Yes we can.” “We can do it!”(우리는 할 수 있다)입니다. 그는 대통령 경선 때나, 선거운동 때에 하루도 빠짐없이 외친 구호가 이 말입니다. "Yes you can, Yes we can"입니다. 이 구호는 “We can do it. We can change!”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로 발전해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땅에 묻으면 안 됩니다. 혈통에 흠이 많아도, 환경에 어려움이 많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할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재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기 고3 수험생들이 있는데 시험에 한번 실수했다 해서 내 인생 망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새 길이 있습니다. 더 큰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에게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날 권능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선택하는 모험은 승리만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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