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통의 해체 (왕상 18:25~40)

  • 잡초 잡초
  • 227
  • 0

첨부 1


전통의 해체 (왕상 18:25~40)


홀리 차우라는 중국 음식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체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름이 참으로 재치가 있습니다. 홀리 차우라는 말은 원래 홀리 카우라는 영어표현을 따다가 중국식으로 개조한 것입니다. 홀리 카우라는 말은 미국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는 감탄사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원 세상에, 저런, 어머나, 저럴 수가, 이런 식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중국식으로 바꿔서 홀리 차우라고 중국집 이름을 지었으니 참으로 재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제가 오늘 홀리 차우의 협찬을 받아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홀리 카우라는 말을 직역하면 거룩한 암소 거룩한 송아지라는 뜻입니다. 

원래 영어권 사람들은 욕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쓰지 않는 대신에 그럼에도 거룩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거룩한 송아지라는 감탄사를 만든 것입니다. 그 유래가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인도에서는 소를 거룩한 짐승으로 여기기 때문에 먹지 않습니다. 소가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송아지라고 뜻을 따왔을 수도 있고 두 번째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거기에 절하고 경배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금송아지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방민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홀리 카우, 거룩한 송아지라는 거룩한 우상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문화,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어겨서는 안되는 규칙이 있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물건과 가치관과 장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종교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 말은 종교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념하는 성역과 같은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일곱이라는 숫자를 러키세븐이라고 행운의 숫자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열셋은 재수 없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킨다고 4라는 수를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심방을 가서 찬송가 444장을 부르자고 하면 기분 나빠 합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통념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 아침에 유리그릇을 깨뜨렸다, 그러면 재수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재수 있다는 것은 별로 없고 재수 없는 것 천지입니다. 천지에 왜 이렇게 재수 없는 것들이 많은지, 제가 옛날에 한번 아침에 시장에 가서 신발 가게에 들어갔는데 안경을 끼고 들어갔다고 주인이 기분 나빠 하더라구요. 아니, 안경을 썼든 안 썼든 손님이 왔으면 기뻐해야지 안경 쓴 사람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재수 없다, 물론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 눈치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재수 있는 일은 별로 없고, 복을 주는 일은 별로 없고 복 나가는 일들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방인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방인은 두려움으로 삽니다. 믿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고 자유하고 담대하고 또 여유가 있고 평강이 있고 모든 것이 잘 될 줄로 믿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두려운 것 천지입니다. 복 나가지 않을까, 재앙이 임하지 않을까, 손해 보지 않을까, 지옥가지 않을까, 모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고 자유 할 수 있고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슬픈 일을 당해도 슬픔 가운데에서도 마음에 평강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배에 타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파도가 일고 풍랑이 일어도 우리 배에 예수님이 타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교회와 함께 하시고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건너갈 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에 타셨다는 말은 교회와 함께 하신다는 얘기이고 또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얘기이고 당신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사람들과 함께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얘기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주무시는 것처럼 보여요. 침묵하시고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느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풍랑이 일면 예수님이 떠나가셨나 잊어버리셨나 무시하고 계신가 이런 생각이 들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두려움에 의하여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다음에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 되는 것은 과거에는 두려움에 이끌려 살다가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을 사도바울은 구원론적으로 해석해서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 라는 교리를 펼쳤지만 그게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론적인 말씀인 것뿐만 아니라 실존적인 말씀이에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염려나 근심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보화를 의지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나를 의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주 중요한 우리의 삶의 시금석이 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미신을 믿지 말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종교적 또 유사종교적인 통념들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의외로 상당한 영향력을 우리에게 미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솔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왜 4라는 숫자가 재수 없는 것인지, 왜 열셋이라는 숫자가 재수 없는 것인지, 왜 사다리 밑을 지나면 재수가 없다고 말하는지, 왜 암탉이 아침에 울면 재수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인지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불경스럽다고 생각하고 부정 탈까, 죄를 얻을까 생각하는데 성역이라는 말이 옳습니다. 함부로 침범할 수 없고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영어표현을 빌자면 홀리 카우입니다. 거룩한 송아지. 우리 모두에게는 거룩한 송아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앞에서 절하고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진노해서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 돌 판을 내던져서 깨뜨리고 그리고 금송아지를 부숴서 가루로 만들어서 물에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금송아지를 경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보다 불경스러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 금송아지를 훼손하는 것도 불경스러운 것인데 그걸 가루로 만들어서 물에 타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다 먹게 했으니 이 모든 백성들이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제대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금송아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어요. 금송아지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고 아무런 효험이 없고 전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금송아지를 부숴서 가루로 갈아서 사람들이 물에 타서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이것은 전혀 두려워하고 경배할 대상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진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유사진리, 유사제품들을 해체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해체, 해체라는 말은 건축업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옛날 건물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을 때 해체를 합니다. 그래서 폭파해체 공법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서 일시에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해체라는 단어가 철학적으로도 적용돼서 해체주의라는 철학이 있습니다. deconstruction, 이십세기 후반에 인기를 끈 철학입니다. 이 해체주의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단어, 언어, 개념, 이런 것을 해체하자는 주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그동안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부정한다, 그것을 해체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성역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해체주의가 기독교 신앙에 반드시 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사용하기만 하면 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와 가짜를 흔들어서 분별한다는 뜻입니다. 흔들어서 넘어지는 것은 가짜이고 서 있는 것은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흔들어서. 그것이 반드시 지적인 철학적인 사유에 의해서 흔드는 것 뿐만이 아니고 시련이든 또 실망이든 또 실패든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흔들리는 일이 생깁니다. 흔들리는 일이 찾아올 때 넘어지는 것들이 있고 계속해서 서있는 것들이 있는데 넘어지는 것은 가짜이고 서있는 것은 진짜에요. 그러니까 때로는 이 해체작업이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시험이 진짜 믿는 사람과 가짜로 믿는 사람을 가르는 것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흔드셨습니다. 주로 신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통념, 관념, 관행, 이런 것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흔들었습니다. 

예컨대 너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이 들으실 줄로 생각한다, 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을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이방인들이나 염려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방인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염려하고 생각하는 것이 이방인과 같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의 그 기도의 열심이든 종교의 열심이 이방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셨어요.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예수님은 따끔하게 지적하셨어요. 너희는 구제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나팔을 분다, 너희는 금식할 때 일부러 얼굴을 슬프게 한다, 너희는 의를 행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라 사람들에게 보이면 이미 너희 상급은 받은 것이고 천국에서 받을 너희 상급이 없느니라,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일부러 기도를 길게 하고 긴 옷을 입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느니라, 

예수님이 권면과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옳다고 생각했던 관행을 흔들어버렸어요. 그 이유는 그것을 부숴버려야 그 자리에 제대로 된 신앙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와 같이 해체하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저는 대학에 진학해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저의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많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의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까지 제가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에는 진짜가 아니고 유사제품이 많았어요. 인간적인 신념, 소원, 사상, 편견, 욕망, 죄의식 자기합리 이런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런 것들은 조금만 흔들면 다 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신앙을 회복하면서 이제는 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흔들릴 수 있는 것은 이미 넘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자리에 다시 믿음을 세우셨을 때는 이것이 저의 욕심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죄의식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또 저의 욕망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열등의식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정말로 바른 믿음, 이것을 세우시니까 이것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흔들림이 꼭 지적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시련으로 올 수도 있고 실망에 의해서 올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든 교회에 실망하든 아니면 어떤 시험으로 말미암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와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요.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흔듭니다. 그래서 섣부른 믿음은 넘어져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섣불리 자랑하면 안됩니다. 

옛 말에 여수에 가면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에 가면 인물을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 가면 주먹을 자랑하지 말라 그랬는데 믿음도 함부로 자랑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검증이 안 된 게 많아요. 믿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믿음이 온데 간데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섣불리 자랑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랑해야지 우리의 믿음을 자랑하는 것은 나를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자랑해야지 내 믿음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것은 내 의를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야 선지자를 포스트 모던한 인물이라고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수천 년 전 사람이지만 우리보다 더 포스트 모던한 그런 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어요. 그는 눈치를 보지 않고 그에게는 성역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27절에서 그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바알에 대해서 조롱을 퍼붓는 것을 보면 압니다.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이 말은 원어로 읽으면 화장실에 갔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바알이 화장실에 갔나보다, 바알이 여행을 갔나보다, 조나보다, 그러니까 응답이 없을 게 아니냐 하고 바알의 선지자와 바알의 신앙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야처럼 이렇게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알을 믿어서가 아니고 바알을 안 믿는 사람도 그래도 혹시라도 부정을 타면 어떻게 하냐 다들 이런 식으로 마음속으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엘리야처럼 바알에 대해서까지 조롱할 수 있는 담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껏 조롱하는 것입니다. 더 큰소리로 외쳐라, 바알이 화장실에 갔나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바알의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예언하고 뛰놀아도 오늘 본문을 보면 응답하는 자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없다는 얘기입니다. 바알은 없어요. 그런데 왜 바알을 두려워하고 그렇게 바알을 의지합니까. 

그러나 엘리야에게 이러한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불경스럽다거나 불경건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십니다. 아, 역사상 이런 영적인 권세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38절을 보면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엘리야는 불의 종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를 소유하니까 가짜가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진리를 아니까 거짓이 두렵지 않은 것이고 그리고 본질을 아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으니까 정말로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굉장히 자유한 인물이고 동시에 믿음의 인물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굉장히 경건하고 동시에 자유해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느냐?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많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도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은 믿는 바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는 것에 대해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변호하지 못할 줄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면 아무리 흔들어도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부러 흔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무턱대고 믿는 것은 무의미하고 여러분 마음속에 의문이 있을 때는 물어보면 됩니다, 하나님에게. 주님, 이것이 사실입니까. 왜 이것을 요구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왜 우리에게 하십니까. 물어보면 예수님 말씀대로 ‘구하라 주시리라 문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리라 찾는 자가 찾으리라’ 주님은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 부담 갖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은 가짜이고 서 있는 것이 진짜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come, Let us reason together’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대화로, 진리의 향연으로 우리를 초청하시고 그리고 응답하십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