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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는 자가 되라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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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자가 되라 (요 8:1~11) 


예루살렘 성전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리 가운데는 옷이 찢기고 머리는 헝클어진채 엎드린 한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각기 돌을 들고 서 있었다. 왜 돌을 들고 서있었을까요? 그 여인을 향하여 던지려고 돌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도 계셨다. 이때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물었다. 

-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4-5절)

우리는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엿볼 수 있다.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혔다면 율법대로 돌로 치면 될 것인데 왜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로 데려 왔는가? 그 이유에 대하여 6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요 8:6상)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바리새인들의 표적은 간음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 여인을 빌미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갈릴리 뿐아니라 유대지역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따라 다녔다. 

이날도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예루살렘에서도 백성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갈 때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시기심이 끓어 올랐다. 뒷조사를 해서 어떻해서든지 제거해 버리려고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좋은 시비거리가 발생한 것이다. 야비한 바리새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만약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 대하여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명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던 백성들은 실망해서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였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하셨고 그들을 옹호하였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돌로 치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편, ‘치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당장 예수님을 붙잡고 고소할 것이다. 그곳에 모여든 많은 군중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입을 바라 보고 있었다. 과연 예수께서 뭐라고 말하실 것인가?

이때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땅에다 무엇이라고 쓰셨다. 어떤 내용의 글을 쓰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바리새인들이 재촉했다. 빨리 대답하라고... 그러자 예수게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뭐라고 쓰셨다. 역시 무슨 내용을 쓰셨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돌을 들어 치려고 하던 무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이유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그곳에 모여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인자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절)

그러자 이 여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 주여 없나이다.(11절상)

예수께서 그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바리새인들의 음모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간음한 여인은 죽음의 늪에서 건짐을 받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와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의 지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음모를 무너뜨리셨고, 간음한 여인을 치려고 돌을 든 무리들의 손에서 돌을 내려 놓게 하셨다. 그리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하셨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는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땅 바닥에 글을 쓰셨다. 우리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은 그 글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 무리들을 향하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뭔가 글을 쓰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9절의 말씀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도 양심에 찔림을 받았다. 예수님이 쓰신 글과 그 말씀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죄악된 것과 더러운 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더 이상 그곳에 버티고 서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 앞에 의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유대 사회의 큰 고질병은 소위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이었다. 이 율법주의적 신앙이 서로를 정죄하는 풍토를 만들었던 것이다.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적대적인 된 원인도 바로 율법주의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날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에 대하여 정죄했다.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했다. 이렇게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눅 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성경은 우리에게 비판과 정죄를 금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1)비판은 비판의 악순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자기를 비판 비방하는데 가만이 있을 사람 없다. 마음에 상처를 받고 갚기 위해 앙심을 품게 된다.

2)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파괴시킨다. 
(약 4: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우리는 특히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독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마치 정죄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 처럼 보였다. 그들의 내면에는 ‘나는 절대로 옳고 당신은 틀리다’라는 우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강한 비판은 성장의 필수 요건이 되지만 잘못된 비판은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파괴라는 해악을 가져 오게 되는 것이다. 돌을 들어서 상대방을 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없다. 

3)축복의 통로가 막힌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비판의 생리는 수용을 거절하는 배타성을 기르게 된다. 비판의 칼을 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충고도, 사랑도, 선물도 받아 들일 수가 없다. 스스로 축복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4)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두 번째는 용서하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용납될 수 없는 죄가 3가지 있다. 첫째는 우상숭배, 둘째는 살인, 셋째는 간음이다. 이 세 가지는 삼대 악으로서 유대교의 랍비들이 철저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간음 행위는 유대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최악의 죄로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였다. 그 여인은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마땅히 돌에 맞아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살아났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다. 
돌을 든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바리새인들도 정죄할 권한이 없다. 오직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 뿐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살리시기 위해 정죄할 권리를 포기하신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에 두 사람 만이 남았다. 죽어 마땅한 여인이 죽은 듯이 얼굴을 땅에 묻고 엎드려 있었다. 그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쳐들 수 없는 얼굴을 들고 흩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주변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그 여인이 끊길 듯 가느다란 소리로 대답했다. 
- 주여 없나이다.

이때 예수께서 그 여인을 향하여 용서의 선언을 하셨다.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부르스 밀튼이라는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다. 이보다 더 큰 경이로운 일은 없다. 이것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보다 더 큰 기적이요, 오천명을 먹이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이요,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물 위를 걸으신 기적보다 더 큰 것이다. 아니 이 모든 것을 다 합한 것도 이 말씀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맹자가 용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남을 용서하기에 인색하지 말라. 무슨 일에든 남을 용서할 마음의 여유를 간직해야 한다.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마음은 늘 미움에 차 있고, 평화를 누리기 어렵다.’

사람들이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1)자기가 옳다고 믿는 교만 때문이다.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나는 잘 했고, 남은 못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잘못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기적 욕심과 편견 때문이다. 나보다 남을 더 존중해 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2)관용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람 됨의 큰 그릇은 다른 사람의 모자람을 얼마나 관대히 용납하며 용서해 주는가에 있다. 

3)지체 의식이 약하기 때문이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가족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4)용서하는 자의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당신을 용서해요’라는 짧은 한 마디 말을 통해 인생은 물론 모든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 

5)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만약 우리가 아직도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다면 우리도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처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정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이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감사는 정죄함으로부터 벗어날 때, 용서 받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더욱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되기 위한 기본적 실천 사항 2가지를 당부하고자 한다.
.
1. 결코 다른 사람, 다른 지체들을 정죄하지 말것. 

우리에게는 결코 다른 사람은 정죄할 자격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돌을 다 내려 놓으라.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2.서로 불쌍히 여기고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할 것.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정죄라는 돌을 내려 놓고 대신 용서라는 사랑의 선물을 공급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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