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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마땅한 감사 (시 5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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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감사 (시 50:22~23)
  

오늘은 찬양을 한 곡 부르고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 날 구원하신 주 감사 -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신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 하신 것 감사 
해처럼 베푸신 은혜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한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2008년도 참 어려운 한 해를 보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찬양을 통하여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2008년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감사라는 단어에 대하여 되새겨보지만 하나님께 감사의 본질을 얼마나 기억하며 실천하며 살았는가를 떠올리면 이내 하나님께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옛날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은혜를 갚은 까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한 나그네가 과거를 보러 가는 중에 산길에서 까치둥지를 오르고 있는 구렁이를 활로 싸 죽였습니다. 까치에게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다시 길을 가던 이 나그네는 어두워져 머물 곳을 찾던 중에 멀리서 불빛이 보였습니다. 보니 인가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 집에 들어가서 보니 한 여인이 상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간청하여 그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피곤한 이 나그네는 곧바로 잠이 들게 되었는데 잠결에 갑자기 답답함을 느껴 잠에서 깼습니다. 일어나보니 꼼짝을 할 수가 없었는데 징그러운 구렁이가 나그네의 몸을 칭칭 감고 공격을 하려던 차였습니다. 

그 여인은 나그네가 죽인 구렁이의 아내였습니다. 사나이가 그 구렁이에게 살려 달라고 하였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 구렁이는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 한 가지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만약에 절벽에 있는 종루에서 날이 밝기 전에 세 번 종이 울리면 너를 살려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종루가 절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죽기를 기다리는데 새벽에 종이 뎅뎅뎅 하고 세 번이 울렸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구렁이는 억울했지만 약속을 했기에 이 나그네를 살려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날이 밝자 종루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도착을 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까치 한 마리가 머리기 깨친 채로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까치는 나그네가 살려준 까치의 어미 까치였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랜만에 동화의 나라로 들어오시니까 잠시나마 행복하지 않으셨습니까?

내용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은 감사를 자기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갚았다는 것입니다.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미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했는데 만물의 영장들이라고 하는 인간들은 감사를 잊고 산다는 것에 대한 경책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한편의 동화를 말씀드렸는데 우리들이 읽고 있는 성경도 감사를 잊지 말고 살라는 권면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본문입니다.
시 50:22절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시편 50편은 다윗 시대에 성전의 성가대를 지휘하던 씨족장이었던 아삽의 시입니다.
그는 찬양 사역자이었기에 당연히 드려지는 제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였던 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인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은혜가 얼마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살피시는 은혜가 얼마인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마누엘로 복 주시는 것이 얼마인데.

그런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아주 격한 감정으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아삽은 이어지는 선포에서 잊어버린 하나님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1.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삽은 감사 자체가 제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언어로 표현하면 감사 자체가 예배라는 것입니다.

창 26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이삭이 우물을 가는 것마다 팠더니 그곳에서 물이 나왔다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할 때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서 백배의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큰 거부가 되어 많은 양떼와 종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이렇게 큰 복을 얻은 것을 본 그랄의 소유지들인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의 특성 중의 부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삭의 우물을 매 꾸어 버렸습니다.
동시에 블레셋의 왕인 아비멜렉이 이삭을 자기의 땅에서 떠나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할 수 없이 압력을 피하여 이삭과 그의 식솔들은 그랄 골짜기 쪽으로 삶의 처소를 옮겼습니다.
척박한 줄 알았던 그 땅에서 이삭이 우물을 팠더니 그곳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다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메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 옮기는 장소에서 우물을 팠더니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왔음을 창 26장은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통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핍박을 피하여 싸우지 않고 장소를 옮겨 그곳에서 우물을 팠더니 물이 솟아나왔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는 교훈입니다.

물론입니다.
맞는 말이고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이삭과 함께 하셨는가? 가 궁금해집니다.

적어도 이 질문의 답을 창 26:23절 이하는 제공해줍니다.
이삭은 가는 것마다 우물을 팠더니 샘이 솟아나왔습니다.
그랄 골짜기에서도 그랬고, 에섹에서도 그랬고, 싯나에서도 그랬고 르호봇에서도 그랬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일을 경험한 이삭은 이제 브엘세바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브엘세바로 자리를 옮긴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창 26:24절을 주목합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그의 아버지였던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이 자기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축복을 받은 이삭이 그 다음에 무엇을 했습니까?

창 26:25절입니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저는 이 말씀의 내용을 통하여 드러내놓지는 않았지만 중요하게 숨겨져 있는 아주 교훈을 얻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면 샘이 나왔던 것은 이삭이 아버지로부터 생활화된 제단을 쌓는 삶 때문이었다는 점입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았던 이삭을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브엘세바에 도착하자마자 제단을 쌓았던 이삭이 자리를 옮겨 우물을 팔 때마다 샘이 터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격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성경의 문맥에서 기록되지 않았을 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던 이삭은 말 그대로 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을 해도 너무 단순하지만 정확한 은혜가 넘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있는 곳에서, 우리들의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인생은 결코 잘못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의 포인트로 돌아가십니다.
이렇게 예배가 중요하고 복을 받는 원인이 되는데 본문 시편기자는 아삽은 무엇이라고 역설하였습니까?

23절 전반절을 다시 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예배 그 자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감사의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예배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윤리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그래서 일찍이 “기독교 신앙은 믿음, 소망, 사랑 외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감사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감사가 곧 예배임을 명심하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교우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온전한 구원의 빙거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감사를 접목하면 됩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만나서 그들을 치료하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문둥병은 당시에 불치의 저주 받은 병이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가정에서 격리됩니다. 
사회에서도 버림받습니다. 

이렇게 비참했던 10명의 문둥병 환자들이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집단적으로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치료를 받게 되면 항상 제사장에게 가서 공식적인 치료 선언을 받아야 하기에 이들은 치료를 받은 후에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치료를 선언 받았습니다.
이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기사의 중요한 포인트는 그 중에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왜요?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17:15-16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사마리아 사람의 사례를 받으신 주님께서 나머지 아홉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을 하신 뒤에 감사를 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7: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에서 구원이라고 번역된 ‘sevswcevn : 세소켄’은 육적인 구원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적인 구원을 말 할 때 독특하게 쓰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사례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선언하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사람의 이 기사를 통한 은혜는 오늘 본문의 아삽의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이 됩니다.

본문 23절 후반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구절에서 구원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v'y’(예솨)라는 단어 역시 영적인 구원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0절에서 선포한 말씀이 가슴에 있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하나님은 우리들을 한 순간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어제도 구원하셨고, 오늘도 구원하시며, 내일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영육간의 시간적인 구분을 두시지 않고 온전하게 구원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2008년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 어느 해보다도 힘들었던 해가 이제 저물어가고 있는 11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완벽하게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달리 말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축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불평의 문으로 나가버린다.”

혹자의 글이 가슴을 때립니다.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교우들이 감사의 주인공들이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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