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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양(止揚)과 지향(指向) (요 1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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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양(止揚)과 지향(指向) (요 14:8~14)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 보고 싶다

간혹 외국으로 입양되었던 이들이 성장하여 친부모를 찾는다는 사연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대개는 자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이제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면서 그래도 한 번만이라도 낳아주신 부모님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차마 이해하기 어려운 목마름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내가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있음’의 매개가 된 이들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인가요, 히브리의 한 시인은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랍다”(시139:14)고 노래합니다. 사람들은 삶이 불안할수록 자기 뿌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은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계절이 바뀌면 떠나가는 철새들처럼 어떤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근원을 일컬어 우리는 하나님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하나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은 우리들의 유전자 깊은 곳에 내재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고 하셨을 때,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만족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요구이기는 하지만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다면 내 믿음이 확고해질 텐데…’.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더라도 이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볼 법한 생각입니다. 

• 상호 공속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요구는 철부지들의 칭얼거림처럼 들립니다.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대꾸하시겠습니까? 어리숙한 친구에게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는 궁금해 하는 친구의 뺨을 치며 별이 보이지 않느냐고 엉너리치는 악동들처럼 할 수는 없고, 해를 볼 수 있느냐면서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피조물조차 보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보려하냐고 핀잔하는 부흥사들의 억지를 따를 수도 없고, 참 난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 간명하지만 핵심을 꿰뚫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9)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이 말씀처럼 강력한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야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현전(現前)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은 철저히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창문과도 같다는 말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투명성’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잘 닦여진 유리창은 고스란히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커텐이 드리워 있거나 덕지덕지 때가 묻은 창문은 바깥의 사물들을 가리거나 왜곡하여 보여줍니다. 

저는 가끔 윤동주 시인의 시 <참회록>을 떠올립니다.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있는 자기 얼굴이 참 욕스럽다면서 “밤이면 밤바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노래합니다. 

나는 이것이 신앙인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 드리운 온갖 욕심들, 이기심들을 손으로 발로 닦아내야 우리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존재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기도, 성경 묵상, 말씀을 따르는 삶은 기독교인들의 자기 닦음입니다. 

물론 이 때 말하는 기도는 우리를 치료하시고 새롭게 하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묵상도 성경에만 밑줄을 긋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밑줄을 긋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언합니다. 말은 천사인데, 살아가는 모습이 두억시니 같다면 그는 두억시니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소중한 이웃으로 존중하는지, 함부로 대하는지가 그의 영성이 머물고 있는 자리를 드러내줍니다. 사회복지 공동 모금회에 여러 해 동안 고액을 기부한 이가 문근영이라는 배우임이 밝혀졌다고 하지요? 우리는 그런 이들을 보면 감동과 아울러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문근영이라는 그 젊은 배우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런 실천을 통해 궁극적인 어떤 세계를 가리켜 보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우리 속에 모심이요,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기 위한 안간힘입니다. 신앙생활에 ‘적당히’는 없습니다. ‘이만하면…’이라는 말처럼 우리를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말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철저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헌신이고 희생입니다. 희생이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기심으로 굳어진 마음은 한사코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이런 굳어짐이 타락이요, 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안에 계십니까?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 계십니까? 답이 ‘예’라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답이 ‘아니오’라면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거룩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부터 자꾸 주는 연습을 하며 사십시오. 


• 삶을 통한 연대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다음 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15:15). 유의하십시오. 주님은 ‘너희가 나를 믿으면’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하면’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죄가 멀어지게 하는 힘이라면, 사랑은 나뉜 마음을 하나 되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이 좋은 까닭은 자기를 초월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하고 싶어집니다. 자기는 추워 오돌오돌 떨면서도 파트너를 위해 겉옷을 벗어주기도 하고,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호출만 받으면 달려가기도 합니다.

다소 통속적이더라도 나는 사람들이 사랑 노래를 많이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욕망과 폭력을 부추기는 말과 영상들이 넘치는 세상이니 이런 바람은 더 절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켜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면…지킬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주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억지로’, ‘마지못해’가 없습니다. 물론 주님의 일을 ‘억지로’ 혹은 ‘마지못해’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믿음과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고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자기의 일로 여기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치유하고, 온전케 하고, 일으켜 세우고, 삶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보다 더 큰 일은 언감생심이고, 다만 우리의 존재를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맡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오늘의 교회를 향하여 하고 있는 말들을 간추리면 무슨 말이 될까요? ‘당신들의 말과 행실 속에서는 하나님이 느껴지질 않는다’, 혹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가 아닐까요? 외형적으로 성장한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향내가 안 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낮아짐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마음 없이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교인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는 매개체로서 기능할 때만 참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절대화할 때 종교는 악마화(demonization) 되고, 범속화(profanization)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중에 미국 베일리 대학의 교수인 Marc Ellis 교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긴 강의가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한 분이 물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깊은 영성을 잃어버린 채 범속화되고 말았는데, 교회가 영성을 회복할 길은 무엇입니까?” 주의깊게 질문을 경청하던 엘리스 교수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Justice.” 정의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종교는 타락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대답이었습니다. 

전기 요금조차 낼 수 없어 전기가 끊기고 냉골에서 잠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정의로운 세상이 아닙니다. 이 겨울 우리 교회는 우리 지역의 에너지 빈곤층을 지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일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설립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 무엇을 구하며 살 것인가?

우리도 주님이 하시는 일을 잘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이기심과 안일함에 길든 영혼에게 주님의 일은 언제나 힘겹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렘23:33ff) 하시지만 주님의 말씀이 때로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실체를 가진 존재가 자기 그림자를 벗어버릴 수 없듯이, 육체를 가진 우리는 평안해지고 싶은 욕구, 부유해지고 싶은 욕구를 벗어던질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a, 14)

사람들은 이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그것도 빨간 펜으로 진하게. 구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겠다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속에는 구해야 할 것들의 목록이 참 많습니다. 요즘은 어쩌면 펀드에 돈을 넣었다가 다 잃어버린 분들이 펀드가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맥락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던 이들이 기적적으로 어려움을 타개해 나갔다는 간증을 듣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질 줄 알았던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만나로 배를 불릴 줄이야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처럼 예기치 않은 일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도우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구하며 사십니까? 개인적인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먼저 구해야 할 것과 나중에 구해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는 필요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립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이름은 닫힌 동굴 앞에 선 알리바바의 주문인 ‘열려라, 참깨’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구하는 내용이 주님의 마음과 합치되는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물론 과도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먹을 것, 입을 것, 가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할 것들입니다.

신앙생활의 요체는 ‘止揚’과 ‘指向’ 사이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지양이라면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지향입니다. 지양과 지향의 리듬을 타고 살아갈 때 우리 삶은 맑아질 것입니다. 어느 분이 “종교가 없었더라면 더 나은 세상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걸 듣는 순간 저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우리 현실이구나 싶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나’를 통해, 혹은 ‘우리’를 통해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자신을 향해 이 물음을 진지하게 던질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도 나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삶이 날마다 맑아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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