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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진정한 감사의 모습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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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감사의 모습 (눅 17:11~19)


성도여러분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모처럼 옆 사람과 인사를 한번 하겠는데요. ‘안녕하십니까. 감사의 예배를 드립시다.’ 이렇게 한 번 인사를 하겠습니다. 옆 사람들과 ‘안녕하십니까. 감사의 예배를 드립시다. 반갑습니다’ 2008년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리는 성도여러분께,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과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력으로는 다음 주일이 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면 어떻게 살았나 싶습니다. 한 해 동안 이런 저런 아픔과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렇게 지나도록 함께 하시고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교회를 생각하며 한 해 동안의 목회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말할 것 없거니와 함께 하신 장로님들과 모든 교우들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세상이 악하고 사람들이 독해져서 교회는 많지만 평안하고 은혜로운 교회를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한 해 동안 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섬기고 봉사하신 여러분들께 교회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이 내리시는 은혜와 복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데이비드 소페르(David Soper)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그는 교도소와 수도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는 교도소와 수도원의 근본적인 차이는 한마디로 불평과 감사에 있다고 했습니다. 감옥에 투옥된 죄수들은 항상 모든 것을 불평으로 보내지만, 반면에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은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감사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수가 감사하면 아무리 교도소라 할지라도 수도원이 될 수 있고, 수도사들이 감사를 중지하면 수도원도 교도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교도소 안의 죄수들처럼 항상 불평하고 살고 있는가? 아니면 수도사들처럼 순간순간 감사하며 지내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일입니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때로는 교도소의 죄수들처럼 불평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감사하는 삶을 살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죄수들처럼 불평불만을 하는 빈도가 감사하는 것보다 더 많을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 누가복음 17장 11-19절의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위해서 갈릴리를 떠나 사마리아 가까이 가셨을 때에 어떤 마을을 들리게 되었습니다. 마을에 채 도착하기 전 산기슭에 문둥병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굴이나 은신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설명 되어 있지 않지만 흥미로운 것은 정상인이었을 때는 원수처럼 지내던 사마리아인과 갈릴리 사람들이 같은 처지가 되자 함께 모여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이처럼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 있나 봅니다. 같은 병을 앓고, 같은 고난을 짊어지고 살다보니 원수에서 친구로 변한 것입니다. 

어느 날, 이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근처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저주 받은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 분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다가가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고쳐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짜고짜로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당혹스러운 명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치료해 주고 나서 ‘가라’면 좋아서 가겠지만, 치료도 해 주지 않고 가라니, 종양으로 얼룩진 피부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무작정 가라니! 순종하기에 힘든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순종했습니다. 아마 그 작은 믿음의 힘으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가는 사이에 모두 치료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동안에 고름이 그치고 딱지가 떨어지는 신기한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제사장에게 가기 전에 예수님께로 되돌아 왔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제사장에게로 가는 순종을 이미 했습니다. 중간에서 돌아왔지만 그것은 이미 간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다른 갈릴리 인들과는 달리,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이고 자유를 얻는 것보다 이러한 기적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먼저요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혼자 뛰어 왔던 것입니다. 

오늘의 사건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이는 모두 열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한 명을 제외한 아홉 명은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바 엄청난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레위기 13:45-46에 기록된 말씀에 의하면 그 당시의 문둥병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말해야 했고, 일반 사람들과 격리되어 성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입술을 가리는 행위는 모두 자신을 죄인으로 비하시키는 표현입니다. 

또 그들이 자신을 부정한 자라고 외치면서 사람들과 격리하여 사는 것은 거룩한 선민들과 상대할 수 없는 버려진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이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가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 혼자였고, 소위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참된 감사는 은혜를 기억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하였습니다. 감사가,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는데서 시작한다면 오늘 우리는 내가 받은바 은혜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우리 삶 속에도 분명 감사해야 할 은혜가 많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기 보다는 또 다른 문제 앞에서 고뇌하고 불평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바라기는 성도여러분, 이시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사해야 할 것들이 모두 생각나고 그 감격이 넘치는 감사의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이 사건을 통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그 중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사마리아인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례했다는 말은 무슨 돈을 건넸다는 말은 분명 아닐 것이고 깊은 환희와 감격으로 감사를 드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감사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7,18절)

골프의 재미에 푹 빠진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주일 아침에, 목사님은 잠시 갈등하다가 골프장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결국 교회에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천사가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 목사 혼 좀 내줘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따라 목사님은 골프가 참 잘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숏홀에서 힘차게 쳤습니다. 볼은 무려 200야드를 넘게 날아가 그린 위에 떨어진 뒤 홀컵으로 떼구르르 굴러 들어갔습니다. 홀인원이었습니다. 목사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몹시 언짢아진 천사가 하나님에게 따졌습니다. ‘아니 하나님! 이건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벌을 주셔야지, 어째서 홀인원이 되게 하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봐라, 저 목사가 홀인원을 누구에게 자랑하겠니? 아마 지금 목사는 자랑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일거다’ 외국 잡지에 나오는 유머였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감사가 하나님께 영광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을 영화롭게 섬기려는 목적으로 지으심을 받았고, 구원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목적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중에 첫 번째가 감사라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다함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시다.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감사의 예물을 드립시다. 우리들의 감사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자에게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홀로 돌아와 사례하는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인이 단순히 육체만 문둥병에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제 그의 영혼도 영원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명의 문둥병자가 주님을 만나 나음을 얻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온전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다 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아홉 사람은 육신의 구원, 일시적인 구원을 받은 반면, 사마리아 사람은 영육이 모두 구원함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신은 구원을 받았으나 그 받은바 은혜를 감사 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지 않은 아홉명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 찾아와 감사를 표하고 그 앞에 영광을 돌린 사마리아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감사하는 자와 감사하지 않는 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누가복음 11장 20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가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예수님께 이 모든 것을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활약을 인정해 주시는 한편,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말씀과 맥락이 통하는 말씀입니다. 기적을 행하고도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사건에서도 사마리아인은 기적도 체험하고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반면 나머지 아홉 사람은 기적만 체험했을 뿐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현상들이 신앙에 부수되어 나타나기는 하지만, 신앙의 핵심은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는데 있습니다. 전인적인 구원을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아홉 사람은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고 말았습니다. 반면, 한 사람의 사마리아 사람은 기적 같은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구원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어리석은 아홉 명처럼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은 채 그저 일시적인 구원함을 받았던 유대인들처럼 되지 말고, 받은바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런 감사의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과 천국을 선물로 예비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2008년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는 감사하기 위해 주님께 돌아온 사마리아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감사하기 위하여 달려간 사마리아 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합시다. 그리하면 오늘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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