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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 신앙인의 최고의 열매 (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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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신앙인의 최고의 열매 (살전 5:18)


추수 감사절을 맞고 있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 때문에 고통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큰 감사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해마다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감사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눈물어린 감사를 드린 데 있습니다. 저는 올해가 그런 감사를 드릴 때라고 믿습니다. 

요즘 저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도종환 시인의 시를 다시 한 번 만났습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시인데 다시 만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아끼는 시를 다시 만나는 기쁨은 오랫동안 헤어졌던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 기쁨과 같았습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다 젖으며 피었나니/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쩌면 우리는 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습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렵고, 내일을 알 수 없는 현실 앞에 두려움이 잇습니다. 사실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흔들리지 않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성도는 없습니다. 흔들리며, 바람과 비에 젖어가며 핀 꽃잎처럼 우리는 흔들리며, 바람과 비에 젖어가며 아름답게 꽃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흔들린다고 쓰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면서 오히려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거센 비바람에 흔들릴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흔들리면서도 감사해야 할 이유는 아픈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1:6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 많은 환난 속에 있었다. 2:2에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2:14에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3:7에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처한 고난의 환경 속에서도 이 역경의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내 사정, 내 형편이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처지에서 감사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여기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예수님은 무모하리만큼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닙니다. 저는 어린 시절 가난한 달동네라고 하는 미아리에서 살았습니다. 이곳엔 이곳 저곳 똥을 묻어둔 웅덩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이들이 놀이 할만한 운동기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뛰어 다니는 것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뛰다가 이 똥통에 빠지면 골 아픈 것입니다. 

저 역시 우리 집이 부산에서 이사를 와서 그 때만 해도 미아리 공동 묘지가 있고, 화장터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산에 똥 밭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우리 동네에 오줌통이라고 불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만 이 친구가 다방구를 하다가 똥통에 빠진 것입니다. 가슴까지 들어갔습니다. 어릴 때라 우리는 그냥 지켜보고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저 밑에 옹달샘이라는 곳에서 물을 길러왔던 오줌통 어머니가 본 거예요. 뭐 순식간에 달려오더니 아들을 들어가서 그냥 건지는 거예요. 그리고 샘터에서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울면서 씻기는데 그 똥 냄새가 문제가 아닙니다. 역겨움이 문제가 아니예요. 지금 어머니의 눈에는 다만 사랑하는 자식이 똥독이 오를까봐 부벼 가며, 끌어안으며 울면서 씻기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그 은혜 앞에 눈물만 납니다. 

그 주님이 말씀합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 없다 할 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감사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뜻입니다.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범사에 감사하는 이 삶이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범사를 바라볼 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상황이 달라질 때는 그 상황 앞에 우리의 삶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 안에서만 인생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이것 밖에 안되지?" 하는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도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인생을 바라볼 때는 다릅니다. 우리가 일제의 핍박 속에 있을 때 우리 민족에게 용기를 주었던 인도의 타고르라는 시인을 잘 알 것입니다. 그는 당시 탁월한 글을 발표했던 이탈리아의 철학자 크로체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시인 타고르가 강에서 배를 띄우고 크로체가 쓴 "아름다움에 관해"라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책이 말하는 한 철학자의 눈에 보여진 아름다운 세계에 기뻐하며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촛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워낙 열중해서 읽다보니 촛불의 심지가 다 타 들어가 꺼진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문득 주위가 캄캄해지고 책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이제까지 촛불에 가려졌던 세계가 그의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주변이 눈에 익으면서 흐르는 물이 보이고, 달빛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들이 하나하나 다가옵니다. 타고르는 고백합니다. "나는 그때까지 촛불에 의지해서 크로체의 아름다움을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촛불이 꺼지자 하나님이 빚으신 저 아름다움이 나에게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창공에 떠있는 별과 달의 아름다움,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물결에 굽이치는 달빛, 온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나는 촛불이 꺼진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때 내 것으로 차 있었고, 내 노력, 내 의지로 가득 차 있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었던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내 운명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주님 앞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쏟았던 모든 것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들이 각각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 갑자기 영롱하고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들어오자, 이제까지 광채를 빛내던 모든 보석이 빛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변함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무엇이 참된 인생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삶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합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기쁨. 뜨거운 감격, 가슴 깊은 곳에 저미도록 스며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안에서만 알 수 있는 넘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사합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감사합니다./·감옥에서 저미어오는 매맞음의 통증을 끌어안으면서도 감사합니다./·살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서도, 지금의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며 감사합니다. /그는 신약 13서신을 기록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범사에 감사하는 이 전천후의 감사는 바울의 삶을 능력 있는 삶으로!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수준에 저 자신이 도달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40주년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오늘 투표를 합니다. 후보로 나오신 분들, 한분, 한분이 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는 분들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뽑아야 할지 아직도 표심이 결정되지 않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민도 여간 크지 않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오늘 투표하는 여러분, 이 한 표의 중요성은 어마 어마함을 알아야합니다. 작은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지면 바위를 뚫습니다. 큰 바다도 작은 물방울이 모여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충성을 생명처럼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작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 국무장관을 지낸 마치 퐁 유(March Fong Eu)는 작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84년 연설에서, 그녀는 거대한 사건들을 일으킨 몇 가지 ‘작은 일들’을 열거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봅니다.

1776년, 한 표 차이로 미국은 독일어 대신 영어를 국어로 제정되었습니다.
1845년, 한 표 차이로 텍사스 주가 미합중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1876년, 한 표 차이로 루더포드 해이스(Rutherford B. Hayes)는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69년, 일리노이즈 주 각 소선거구에서 한 표의 향방만 바뀌었어도 존 에프 케네디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오늘 사람을 뽑는 일에 우리 교회가 이만큼 성장을 했다는 자부심 속에 감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음에 감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내년이면 40주년을 맞습니다. 오늘 뽑히는 이분들은 지난 날 초대 교회를 이끌어갔던 7집사처럼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말씀 앞에 순종하고 충성과 헌신을 가지고 이 어려운 시대 앞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을 선택해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미국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대단합니다. 그는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사회에서는 지도자가 될 수 없는 흑인 혼혈아입니다. 또 정치 경험도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변화입니다. 여러분, 오바마를 움직여 온 것은 무엇보다 꿈입니다. 그는 꿈을 가슴에 품고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지역 활동가와 인권변호사, 주 상원의원,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정치입문 12년 만에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가 이번 선거에 내건 슬로우건은 ‘변화’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변화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오바마에게는 그의 자서전인 '내 아버지의 꿈'에 언급될 정도로 고교시절 단짝 친구였던 가쿠가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지만, 또 한 사람은 LA에서 노숙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흑인 혼혈아로 같은 고민을 안고 성장했던 두 사람에게 하나님은 똑같은 시간을 주었지만 이 엄청난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주변을 보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비관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적지 않다. 또 문제의 원인을 세상의 구조악 탓으로 돌리고 삿대질하느라 귀한 시간을 불평과 좌절로 보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서 동일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30년 후에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오바마와 가쿠가와의 사례는 주어진 삶을 어떻게 붙들어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꿈을 가진 자가 교회에도 많이 나와야합니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주어진 시간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누구보다도 주어진 시간을 아끼며 이웃과 자신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인생을 의미있게 사는 비결은 "매일의 삶을 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형형색색으로 포장된 귀한 선물로 생각하는 것에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 앞에 감사를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황혼녘에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절감하였던 그의 경험적인 진리가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이 추수 감사절에 이처럼 귀한 사람을 세우는 또 하나의 감사할 일 속에 있습니다. 감사는 축복의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이런 아름다운 기도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디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함으로 감사를 회복하시고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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