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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영혼을 찾아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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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찾아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 (눅 14:15~24)

 
소방서에서 가장 싫어하는 찬송가가 있다고 합니다.  "산마다 불이 탄다"(592장)
목욕탕 주인들이 좋아하는 찬송가가 있다고 합니다.  "곧 씻어서 정결케 하옵소서"(426장)
몽유병 환자들이 좋아하는 찬송가는 이것입니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134장)
그런가 하면 시작장애인들이 애송하는 찬송가는 이것입니다.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151장)

지난 목요일부터 계속해서 내 생각에 머물러서 떠나지 않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좀 다른 찬양을 부르고 싶어도 계속해서 이 찬양만 흘러나왔습니다.  
심지어는 잠을 자면서도 이 찬양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입술의 열매를 드리오니 오-하나님 받으소서
왕께 드리는 제사를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동안 살아오면서 하나님께 어떤 입술의 열매를 올려드렸습니까?  감사와 찬양이었습니까, 아니면 원망과 불평이었습니까?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서 희망과 비전이 넘치는 말들이 흘러나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입술에서 절망과 낙심에 가득 찬 말들이 흘러나왔습니까?
 
우리들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십시오.  불평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불평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로 충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이 어려워서 힘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움츠러들고, 생각이 힘들어서 힘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행복이 어떤 소유나 경제적인 것, 환경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임을 빨리 깨달으셔야 합니다.  사실 행복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의 태도가 경쟁력입니다.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조건이 좋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최선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최악의 조건에서도 최선의 감사를 할 때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려울 때 전략도 써 보고, 책략도 찾아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을 총동원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려울 때 야곱처럼 하늘로 뻗어있는 사다리를 보아야 합니다.  무서운 폭풍우 속에서도 절대로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무지개를 다시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끝없이 변하는 나의 감정이나 환경을 붙잡지 말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굳건한 말씀을 다시 붙잡으십시오.  어떤 혼란과 혼돈과 깊음과 흑암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 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에 취하여 모든 심약한 마음으로부터 새로워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주는 힘이 아닙니다.  환경이 주는 힘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이 주는 힘입니다.  이 하늘의 힘을 덧입어서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의 영원한 주제는 이것입니다.
"주어지는 상황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우리는 끝없는 자극과 충격을 받습니다.  또 감당할 수 없는 시험도 있고 생각하지도 못한 어려운 일도 닥칩니다.  그러나 거기에 맞설 수 있는 내 건강한 반응의 원칙이 있습니까?  수십 년이 지나서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그때 내가 그 기막힌 일 앞에서 선택의 능력과 선택의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었기에 오늘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나라마다 민족마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가 연일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대단히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어려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의 교훈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수많은 기적 속에 자유인이 되어 약속의 땅을 향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명령이 모세에게 떨어졌습니다.
"각 지파 족장 한 사람씩 12명을 뽑아 가나안 땅에 보내어 40일 동안 정탐을 하라."

우리는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답답하시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신 데 그냥 보고 오라고 명령하실 것이 아니라, 내일은 이 길로 이렇게 저렇게 찾아가라.  직접 그때그때 일러주시면 쉬울 것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실까?"

이렇게 비평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계산가, 겁쟁이, 관망자, 관찰자의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이 떨어졌다고 하십시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후대에 신화 같은 전설을 남길 팀을 짜라!"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택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만든 팀의 비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하여 12명의 팀을 뽑은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고 약점투성이, 결점투성이로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이력서를 검토해 보고 경력을 분석하고 재정적인 것을 보아도 전혀 내세울 것이 없고 믿을 것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탄의 세계를 압니다.  사탄은 언제나 절망적인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만 둬라.  힘들다.  절대로 안 된다.  너만 잘한다고 되냐?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두 번째는 혀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모든 관점을 부정적으로 보게 합니다.  네 번째는 낙심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절망적으로 보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자유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이 믿음의 능력을 붙잡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부가 그물을 던진다고 해서 모든 고기가 다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빠져나가는 고기는 살아났습니다.  또 물에 빠졌다고 다 죽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나는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제비는 인간이 뽑아도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의 경영을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상황, 이 문제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됩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삶의 두려움과 맞서 싸우십시오.
 
세상이 어떻게 말하든, 세상이 어떻게 보고 판단을 하던 나는 오직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보리라!
이번 기회에 나의 하나님이 나를 증인으로 우뚝 세우시리라!
모든 사람과 모든 세대에 기억될 희망의 이야기를 쓰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두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진정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일에 고통을 느끼고 두려움이 다가올 때에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일어나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기적의 손길을 믿는 우리는 결코 요나의 콤플렉스에 붙잡혀서는 안 됩니다.  메뚜기 콤플렉스에 붙잡혀서도 안 됩니다.  그런 함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능력에 취하여 삶의 모든 두려움을 삼켜 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불평과 원망과 두려움은 자기 학대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갈렙처럼 힘껏 외쳐 보십시다.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지도 않겠습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저 모든 것을 삼켜 버리겠습니다."
 
민수기 14장 9절에 나오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라는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저들을 삼켜 버리겠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이 오히려 나의 양식이며, 역경이 오히려 나의 진수성찬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성을 압니다.  우리 모두는 외모나 재능이나 태어난 환경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의 태도, 마음의 능력을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습니다.  인생 길에서 얼마나 큰 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자취를 얼마나 남기는가가 결정됩니다.  이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에, 이 한 몸 바쳐서 오고 가는 세대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믿음의 전설을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큰 잔치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의 주제는 "천국은 마치 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예배 드리고, 모여서 잔치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사람을 찾으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을 이 천국의 잔치에로 초청하십니다.  천국의 큰 잔치를 배설하시고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은 것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일반적으로 '잔치'라고 하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잔치는 기쁨이요, 축제를 연상케 합니다.  잔치에 슬픔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설령 근심거리가 있더라도 뒤로 미루고 우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잔치입니다.  무릇 잔치에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이 말은 기쁨이라는 말과 그 어원이 같습니다.  은혜가 기쁨이요, 기쁨이 은혜입니다.  신령한 기쁨,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넘치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은 잔치요, 예배는 축제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도 축제이어야 합니다.  잔치집이어야 합니다.  장송곡이 울려나오는 초상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항상 기쁨에 넘쳐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에는 어떠한 얼굴로 왔든지 간에 하나님의 축제에 참여하고 돌아가는 그 모습에는 기쁨이 가득해야 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강 같은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바다 같은 사랑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잔치에 대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잔치에 초청을 받아서 갔다면 그것은 내가 남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잔치가 아닙니다.  나를 초청한 그 사람의 잔치입니다.  나를 초청한 그 사람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기쁨의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의 원인은 저쪽에 있습니다만 내 잔치, 우리집 잔치처럼 기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잔치를 나의 잔치로, 그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동참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고 그 사람만이 은혜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잔치의 기쁨은 소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에 참여하는, 존재의 기쁨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잔치에 내가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지 내가 장가가는 것도, 내가 잔치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공동체적인 기쁨입니다.  모두의 기쁨입니다.
 
어떤 개인 한 사람만의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잔치라는 것은 본래 함께 모여 즐기는 것이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위기에서 오는 공동체적인 인격, 서로 마음을 모으는 데서 오는 기쁨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기쁨을 결코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잔치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궁극적인 문제는 잔치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잔치의 생명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잔치의 생명은 손님이 참석하는데 있습니다.  잔치의 주인은 손님이 많이 와야 즐겁습니다.  손님이 오지 않으면 쓸쓸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거대하게 잔치를 준비했어도 그 잔치의 분위기는 손님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잔치에는 사람이 많아야 됩니다.  손님들이 많이 있는 것이 주인에게는 보람이요, 기쁨이요,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천국의 잔치를 허락하셨습니다.  매 주일, 모든 예배가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잔치입니다만, 다음 주일은 특별히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 VIP를 초청해서 함께 드리는 영혼추수주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인이 사람을 초청했는데 손님이 없습니다.  초청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빠서 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 풍습으로는 잔치를 청할 때에는 두 번 초청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잔치 훨씬 전에 시간을 비워두라는 뜻에서 미리 초청장을 보냅니다.  본문의 16절에 기록된 초청이 바로 첫 번째 초청입니다.  그리고는 잔치에 임박해서 하루 전쯤에서 두 번째로 초청을 합니다.  17절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라는 초청이 바로 두 번째 초청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잔치에는 여러분이 목말라하는 영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평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의가 있고, 여러분이 그리워하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잔치에는 넘치는 사랑도 있습니다.  바로 이 잔치의 주인은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 잔치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값없이 선물로 주시고자 주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베스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고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이 잔치에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니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 것같이 모두가 사양을 합니다.  여기에서 사양이란 망설임 없이 즉각적으로 거절을 했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거절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잔치에 안가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입니다.  밭은 안가겠다는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밭을 살 때 보지도 않고 샀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하필이면 이 때 밭을 보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 사람이 사양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소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제 새로운 자동차를 샀는데 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아야 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필이면 왜 이 초청의 시간에 소를 시험해야만 합니까?  아니 소를 살 때에 살펴보지도 않고 샀다는 말입니까?  설령, 소를 시험해 봐야 한다고 하더라도 잔치가 끝나고 얼마든지 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이유는 가기 싫은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 사람은 어떻습니까?  장가갔으니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신혼여행을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의 핑계는 가장 그럴듯합니다.  사실 율법에도 장가간 사람은 1년 동안 군대에 보내지 말 것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대답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초점이 장가갔다는 데 있지 않고 "못 가겠다"는 데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의 말을 좀더 정확하게 표현을 하면 못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안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핑계대기를 좋아합니다.  주님의 초청에 순종은 하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아담 때부터 시작된 인간의 고질병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거절하고 있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는 밭을 샀으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이들을 보면 모두가 자기 중심적입니다.  내 사업과 내가 하여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내 기쁨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잔치에는 못 가겠다는 겁니다.

저는 주님의 초청에 거절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전도하는 그 사람들이 초청을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완전히 다 알아야 믿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예수 믿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저는 머리가 아플 때마다 게보린을 먹습니다.  그렇다고 게보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의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몰라도 한가지는 알고 약을 먹습니다.  그것은 머리가 아플 때마다 게보린을 먹으면 낫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 사실만으로 구원은 족한 것이지 모두를 알아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완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해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에 "아멘"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좀 한가해지면 나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바쁩니다.  집과 직장과 사업 때문에 바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빠야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식사할 시간은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잠잘 시간은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생존을 위한 시간은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는 시간을 만들면서 왜 영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시간을 만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70-80년의 제한된 인생을 위해서는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1주일에 한시간도 낼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편이 반대해서, 부모님이 반대해서 못 믿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허락하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때 믿겠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남편이나 부모님이 지옥에 가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사랑입니까?  그저 집안의 화평을 위해 남편이나 부모님의 말씀을 고분고분 듣는 것이 사랑이요 공경입니까?  물론 부모님이나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부모님을 진정으로 공경한다면 지옥에 갈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 아닙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믿겠다고요?  사람의 일이란 모릅니다.  부모님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지옥에서 "걸걸..." 하면서 후회나 하시겠습니까?  남편이 허락하면 믿는다고요?  남편이 허락하기 전에 주님이 먼저 재림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구원의 때는 "다음에"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이제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아주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21절에 보니까 "주인이 노하여"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랑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랑으로 주신 모든 기회가 다 지나간 후의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때부터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호의를 거절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주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제 화가 난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3절을 또 읽겠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기에 보면 특별히 지금 주인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빨리 데려오라", "강권하여 데려오라", "내 집을 채우라"

주님은 이 잔치 자리가 빈자리 없이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는 주일에 영혼추수주일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잔치 자리의 빈자리는 바로 여러분이 앉아야 할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전도해서 앉혀야 될 사람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여러분의 남편의 자리인지, 여러분의 부모님의 자리인지, 친척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이 잔치를 앞두고 우리 주님은 강권해서라도 이 자리가 채워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집, 하나님의 교회는 채워져야 합니다.  본문에서의 내 집은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차고 넘쳐야 합니다.  부흥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디보다도 차고 넘쳐야 할 곳은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교회로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자리를 채우는 일입니다.  내 집을 채우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그 무엇을 해도 하나님은 섭섭해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너희에게 원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빈자리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자리는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리를 채운 곳에 축복하십니다.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치 아니하는 목사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원치 아니하는 성도도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기를 바라고 아버지의 집이 차는 것을 걱정하는 존재는 사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부흥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은 먼저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우리 모두가 합심해서 열심히 전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시내의 거리로, 골목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적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그래서 내 집, 아버지의 집을 채워야 합니다.  이 노력이 없이 교회의 부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교회의 부흥은 한 영혼을 찾아 이 거리 저 거리를 누볐던 전도자들의 땀과 헌신이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종의 자세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21절에 보면 주인은 잔치 자리가 채워질 때까지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다시 한번 종들을 보냅니다.  집이 채워질 때까지 주인은 종들을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냅니다.  본문에 나타난 횟수만 보더라도 무려 네 번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들은 불평 한마디하지 않습니다.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그저 나가서 주인의 명령대로 데리고 올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저 스스로 교회에 나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가 나가서 데려 오라"고 했습니다.  오는 영혼추수주일을 앞두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너희는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내 교회를 채우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빈자리가 채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을 위해 여러분들이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종들과 같이 "오십시오.  주님께로 오십시오.  잔치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외칠 뿐입니다.  성경에 보면 "오소서"라는 말이 무려 1,900여 번나 기록되었습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계시록 22장까지 성경의 간절한 호소는 '오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오라,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오라, 오라, 오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외쳐야 할 메시지입니다.  "오라"고 외치는 종들의 순종하는 모습, 바로 이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잔치 자리가 종들의 순종으로 가득찼던 것처럼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여러분의 헌신과 순종으로 인해서 이 자리가 가득가득 차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베스트를 찾아, 사랑하는 영혼들을 찾아 골목을 누비십시다.  시내의 거리로 나가십시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문을 두드리십시다.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호소하십시다.  그래서 이 자리가 차서 넘치는 역사를 성령과 함께 만들어 가십시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일을 만들어 가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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