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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언약 (창 17: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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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언약 (창 17:7~14)

우리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약속’은 너무 중요합니다. 인생 전반이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혼도 약속입니다. 길을 갈 때 신호등도 약속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이 모임도 약속입니다. 학교 다니는 것도 약속입니다. 정해진 약속대로 공부하면 졸업장이나 학위를 줍니다. 사업을 하거나 상거래를 하는 것도 약속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의 삶 속에 개인적인 약속, 공적인 약속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삶은 이런 약속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잘 살려면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만일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우리의 삶 속에 많은 혼란이 발생됩니다. 그래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우리는 신뢰하며 인격자로 존경합니다. 

70대 재미 교포 사업가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카이스트(KAIST)에 1천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요즘 환율로 130억원 정도 되는 큰 액수입니다. 그런데 액수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분이 50년 전 미국에서 어렵게 유학할 당시 후배(카이스트 서남표 총장)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어도 보나 마나 훌륭한 인격자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약속이 중요하기에 우리가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약속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허풍을 떠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수개월 전 독일 할머니 레나테 홍의 이야기가 매스컴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 남편은 북한에 거주하는 홍옥근 씨(74)인데, 사연인즉슨 이랬습니다. 50여년 전 동독에서 유학하던 대학생 홍옥근 씨와 결혼한 레나테 홍은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의 강제소환으로 생이별을 하고 말았습니다. 신혼의 단꿈을 맛보기도 전에 일어난 황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강제 소환 2년 후부터는 편지 왕래조차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레나테 홍 할머니가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47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입니까? 아마 두 사람이 결혼했을 당시에는 평생 함께 사랑하며 살자고 약속을 단단히 했을 겁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약속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공약(空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과 구별해서 언약(Covenant)이라 부릅니다. 거룩한 약속이란 뜻으로 성약(聖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 우리가 일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상고하면서 하나님 언약의 소중함을 재확인하시고, 그 언약을 든든히 붙잡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언약 : 주권적 언약, 은혜 언약, 영원한 언약   

먼저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 주권적 언약 :  

하나님의 언약은 무엇보다 주권적 언약입니다. 본문 7절 보시죠.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언약이란 말 앞에 ‘나의’(My)라는 소유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인간과 맺는 언약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언약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주권적 언약이란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월신(月神)을 숭배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지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시고 불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소원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의사를 물어보고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은 쌍방적이 아니라 일방적인 겁니다. 그러나 일방적이라고 해서 나쁜 게 아니죠.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약속을 할 때 이런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15:16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 해도 애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면 반드시 이뤄집니다. 심지어 인간이 거부하고 도망해도 강권적으로 부르시고 구원하십니다. 영국의 시인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son : 1859~1907)이 쓴 시 중에 ‘천국의 사냥개’(Hound of Heaven)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비유해서 좀 불경스러운 것 같지만, 시인은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 을 절실하게 체험하고 이 시를 지었습니다. 그는 본래 성직자가 되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또 의사가 되고자 했지만 역시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한 그는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편 중독자가 되고 폐결핵에 걸려 런던 거리를 방황하다가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일으켜 주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거룩한 집념’입니다. 그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시인은 눈물을 흘리며 이 시를 짓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 언약으로 우리를 부르셨기에 반드시 세상 끝까지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구원받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잇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 주시는 겁니다. 


② 은혜 언약 :  

하나님의 언약은 또한 ‘은혜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가 완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전히 허물과 죄악이 많을 때 이미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은혜 언약이라는 겁니다. 

롬5:8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완전해서 혹은 선행을 많이 해서 구원한 게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니까 오히려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쉬워서 의심이 된다는 겁니다. 

D. L. 무디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그가 탄광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 광부가 구원의 도리가 너무 가벼워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무디가 그에게 지혜롭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갱도에 내려갔었습니까? 그러자 그 광부가 대답합니다. “그럼요. 수천 피트 깊은 데까지 내려갔다 왔습니다.” 무디가 되묻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갔다 왔나요?” 과부가 또 대답합니다. “아, 그거요? 승강기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디가 설명을 시작합니다. “당신은 버튼만 눌렀지만, 그 이전에 회사에서 비싼 비용을 들여 승강기를 설치해 놓은 겁니다. 십자가 구속이 이런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이전에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희생당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로 구원 받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진리를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③ 영원한 언약 :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언급하면서 계속해서 뭐라고 강조하십니까? 7절과 13절에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 언약’이라고 하면서, 또 ‘영원한 언약’(everlasting covenant)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중간이 변경하거나 취소하시지 않습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민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만일 가정해서 구원의 약속을 중간에 취소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10년 동안 열심히 교회 다녔는데, 하나님이 죽 지켜보다가 마음에 안 든다며 취소하시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그게 죽음 임박한 시기라면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하나님은 한번 맺은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세상 살 동안 지켜 보호하시고, 이 세상 떠날 때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언약의 증표 : 할례, 세례  

그런데 우리 인간이 마음이 약합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데 스스로 의심하고 불안해 하고 그럽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그 믿음이 자꾸 흔들렸습니다. 하갈을 첩으로 취하고 이스마엘을 낳은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가시적인 언약의 증표를 남기게 하심을 그 믿음을 견고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본문에 나오는 할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세례로 대체됩니다.

① 할례 :  

할례가 무엇인지 본문 10절~1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割禮 Circumcision)는 쉽게 말하면 포경 수술 같은 겁니다. 남자 아이의 포피(包皮 foreskin)에 수술을 하는 겁니다.(물론 아브라함이 처음 할례 받을 시점에는 어른들도 받았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위생적인 차원에서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는 종교 의식의 차원에서 시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몸에다 가시적으로 표시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언약의 표징(言約 表徵 Sign of the Covenant)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자에게만 시행되었지만, 대표로 하는 것이므로 그 가문의 여자도 다 포함이 됩니다. 

할례는 히브리어로 ‘물’(מול)인데 ‘끊어버리다’ ‘베어버리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즉 죄악 가운데 살던 옛 자아를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12절 보면, 할례를 언제 실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난 지 팔 일 만에’ 하라고 했습니다. 8일은 ‘7일 +1일’의 의미가 있습니다. 레22:27 보니까, 모든 동물은 생후 7일간 부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8일째부터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정한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 새 출발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현대의학자들이 발견한 바로는 생후 8일째 되는 날이 피가 제일 빨리 응고되고 고통도 덜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고후5:17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② 세례 :  

할례가 신약 시대에 와서는 폐지되고 그 대신 세례(洗禮 Baptism)로 대체됩니다. 동일한 약속과 동일한 믿음에 대해 시대 변천에 따라 단지 형식만 바꾸어 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약시대 교회의 성례에 두 가지가 있죠. 성찬과 세례입니다. 세례의 명령은 언제 주어졌습니까?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실 때 명령하셨습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이것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와 함께 옛사람의 죄악에 죽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거듭남, 중생, 신생)을 의미합니다.(롬6:1 이하)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할례든 세례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만 외적인 표시일 뿐입니다. 그 이전에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구약시대에 믿음도 없이 할례 받고, 그것만 자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책망하신 예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말씀도 있습니다.(신10:16,30:6, 렘4:4 참조)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세례 자체보다 마음에 확실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오늘 예배 중에 세례식에 있는데, 그냥 무턱대고 세례를 주는 게 아닙니다. 교육도 받고 어제 한 사람 한 사람 문답을 통해 믿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확인하고 외적으로 표시해 주는 게 바로 세례 예식입니다. 

결코 물세례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게 아닙니다. 세례를 받지 못 했어도 분명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다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 강도의 경우 세례의 기회가 없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구원의 확증을 받았습니다.(눅23:43 참조)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세례를 받는 게 좋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이고, 본인에게 큰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남녀가 결혼식을 안 하고 함께 삽니다. 그러면 사실혼(事實婚)으로 인정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거북합니다. 쉽게 흔들릴 수도 있죠. 법적인 혜택을 받는 데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마치 그런 겁니다. 본인도 믿음이 쉽게 흔들리고, 남 보기에도 믿음을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세례 받으신 분은 다시 한 번 그 뜻과 유익을 새기시고, 아직 못 받으신 분은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언약 백성 : 특권, 사명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특권과 사명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 13절 보시죠. “ ...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살에 언약의 표시를 남겨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항상 기억하라는 겁니다! 언약 백성의 의식 즉 천국 시민의 의식을 가지라는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에는 머리를 깎고 교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시내에 나가니까 사람들이 다 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학교 학생이라는 긍지가 있었던 것이죠. 반면에 책임감이 느껴져서 복장도 단정하게 하고, 행실을 바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특권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① 특권 :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어떤 특권을 갖고 있나요? 롬8:15 “ ...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빠는 아람어인데 우리 말과 비슷합니다. 어린아이가 친밀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친밀하게 여기며 축복을 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육신적으로도 어린 아이가 “엄마!” “아빠!” 하고 부릅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본능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자동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자상한 인간 아버지 이상으로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앞이 캄캄할 때, 답답한 일 만났을 때 기도가 잘 나오지 않을 때도 “아버지!” 하고 외마디 소리만 내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사43:1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좋은지 이렇게 말씀합니다. “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자녀가 되었기에 우리가 비록 험한 세상 살아도, 절대 보호, 절대 축복, 절대 승리를 보장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② 사명 : 
  
우리는 언약 백성으로 특권만 누리면 안 됩니다. 사명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사명은 한 마디로 ‘증인’이 되는 겁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이란 말은 헬라어로 ‘말튀스’(μαρτυς)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죽음을 순교자가 되기는 것도 있지만, 살아서 증인의 삶을 사는 것도 일종의 순교입니다. 이를테면 ‘산 순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입술로 예수님을 증거할 수도 있지만, 인격과 삶을 통해 증거하는게 더 중요한지도 모릅니다. 요즘 기독교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안 좋습니다. 그래서 종교 호감도에서 기독교가 불교나 천주교에게 밀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각성하고 분발해야 됩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주간 개인적으로 아주 신선한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한 지회의 조찬기도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가 그 멤버들을 통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상해에서 온 조선족 사업가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는 분입니다. 본래 연변에서 자랐는데, 그 시절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어디가 모자라거나 머리가 돈 사람들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해에 가서 사업을 하다가 한국에서 온 장로님 한분을 만나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해병대 사령관 출신으로 지위도 있고 사업도 크게 하시는 분인데, 신실하고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런 분이 예수를 믿으면 한번 믿어 볼만 하겠구나!”하고 생각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지금은 기독실업인회 상해 지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많은 실업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장로님처럼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시고 구원의 확신 승리의 확신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울러 세상에서 증인의 사명을 성실히 실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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