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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높은 곳에서 드리는 감사 (합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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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드리는 감사 (합 3:16~19)


I. 위기의 자리에서 시작된 감사절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쭈무라 간조는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으로 우리를 저주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한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한정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메마른 심령으로 그들을 저주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생 중 가장 감사해야 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돈벌면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면 돈 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그 문제 해결되면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조금 몸이 불편한데 나으면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면 건강할 때는 언제나 감사했고 언제나 행복했습니까?

펄벅의 대지에 보면 왕릉이라는 젊은 농사꾼이 나옵니다. 농사를 짓는데 매년 흉년이요, 홍수요, 또 수확을 거둘 때 쯤 보면 황충 떼가 나타나서 몽땅 갉아 먹고 날아갑니다. 살수가 없어서 도시로 아내와 함께 들어가지요.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손이 부르터지도록 입을 것 입지 못하고 먹을 것 먹지 못하고 돈을 모읍니다. 그래서 돈 푼이나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큰 집 짓고 논마지기 사고 머슴들 두고 떵떵 거리고 살던 어느날 딴 생각이 났습니다. 남편이 밖에 나가더니 첩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를 안방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는 부엌에서 밥을 지어서 남편 작은 마누라 앞에 밥상을 내려놓고 돌아서면서 하는 넋두리가 있습니다.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언제입니까? 추운날씨에 리어카 끌던 그 때가 좋았는데, 황충 떼가 보리나락 갉아먹을 때에 훠이훠이 남편 손 붙들고 쫓으며 논둑길 뛰어 다닐 때가 좋았더란 말입니다. 

일생 중 가장 행복한 때는 오늘입니다. 일생 중 가장 감사할 수 있는 때는 오늘입니다. 행복의 시제는 미래형이 아닙니다.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내일이 아니요 미래가 아니요 내년이 아닙니다. 오늘입니다. 세계 모든 백성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인생의 위기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고난의 때에도 행복은 현재형입니다. 

미국 개척 초기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농사 지어놓으면 인디언들이 공격을 해옵니다. 이미 바다에서 절반이나 되는 가족들을 바닷속에 묻어야 했습니다. 또 질병으로 앓는 가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수일을 앞두고 청교도들은 금식 주간을 선포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한 농부가 지도자들에게 그렇게 건의를 했습니다. "작년 이맘 때도 우리가 금식 기도를 했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주님 앞에 아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주님이 분명히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것들 가운데서도 소중한 것을 얻었고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앞에 울며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 주간을 선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전세계 교회의 추수감사주일의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감사주일은 시작부터 풍성한 나락단을 쌓아놓고 산해진미 벌여놓고 드렸던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고통 중에 감사했습니다. 위기 가운데 찬송했습니다. 

감사절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너는 맥추절을 지키라. 수장절을 지키라. 유월절을 지키라." 옛날 성민들은 이 축제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함으로 그 다음의 복을 예약받는 축복의 시간들이 되게 했습니다. 풍년 들고 주가가 상승하고 경제지표가 높을 때에만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절은 위기와 고난의 순간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역설적인 존재들입니다. 최악의 환경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 최악의 환경속에서 최고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 그를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II. 고난을 껴안고서(하박국)

하박국은 고통의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았고 질병이 온 나라에 번져있었고 농사를 지어놓으면 강대국들이 몽땅 빼앗아 갔습니다. 아내가 끌려가고 젊은이들이 끌려가고 어린아이가 비참하게 길바닥에 팽개쳐져 죽어가는 처절했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선지자였습니다. 

이 하박국은 고통의 시대에 성도들은 어떻게 기도하는가? 고난의 시대에 성도들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진실한 성도들은 아픔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앞에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본의 우쭈무라 간조는 "하박국이야 말로 선지자 가운데 최고의 선지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깊은 사상면에서 그렇고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영향면에서 그렇다. 특별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저 종교개혁자들의 모토를 제공했다고 하는 차원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의인은 환경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그는 외쳤습니다.

하박국이란 뜻은 "포옹한다. 껴안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았던 사람들, 고통 한복판에 서서 그 고통을 붙들고 몸부림하며 기도했던 사람들,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안과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했던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 전능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박국입니다.

바벨론의 위협 앞에 비참해진 민족의 운명을 껴안고 살았던 선지자가 하박국 선지자였습니다. 저는 울며 울며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3장 본문을 시작하기전에 2장 마지막 절에 그렇게 기록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 그 분의 인자한 얼굴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엄숙하게 시대의 아픔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민족의 고난을 주님앞에 내려놓습니다. 이웃들의 고난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바로 3장 1절부터 마지막절까지의 내용입니다. 

3장 1절을 시작하면서 이 기도의 무게를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시기오놋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주경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짐작컨데 "악기이름 혹은 절정, 정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절정의 기도, 정상의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이며, 하나님이 복 내려주시는 아름다운 감사와 찬양이 어떤 것들인가를 보여 줄 때에 시기오놋에 맞추어서 불렀다고 주경가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민족이 위기를 만날 때, 교회가 위기앞에 서 있을 때에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공동체가 나 자신이 위기를 만났다고 생각할 때에 성도들은 기도할 수 조차도 없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질병에 든 것입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만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시대가 어려울수록 공동체가 위기를 맞이할수록 너 자신이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고 느낄 때마다 성전에 나와 기도해야 하느니라. 오늘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III. 나라가 어려울 때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비슷했습니다. 한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서로 반목하고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북쪽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받게 됩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 나라 사람들은 태연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던 사람들, 이방인 족속과 타협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저들은 망해도 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어제도 제사드리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릴 수 없을 걸,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야 될걸? 우리는 율법이 있지 않는가?

저들은 방종했습니다. 과소비를 일삼았습니다. 이기주의와 안일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지자에게 계시가 내려집니다. 북쪽 이스라엘을 심판했듯이 내가 남쪽 유다도 심판하겠다. 이 소리를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항거하는 소리로 부르짖는 소리가 하박국서의 시작입니다. 

1장 2-3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리이까를 반복적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나라가 얼마나 어려웠든지 3장 2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기 '놀랐다'는 단어는 심히 두려워서 떨었다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얼마후 조국이 초토화되어지고 처절하게 망가질 그 모습들을 바라 볼 때에 내 창자가 떨렸다. 입술이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렸다고 말합니다. 내 뼈가 꺾어지고 내 뼈가 녹아지는 커다란 아픔을 겪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가운데에 심판의 실체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이 이렇게 망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민족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형식만 남았지 경건이 없었고 진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고백하고 부르짖습니다.

하오나 계속되는 2절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오나" 이 말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것도 정의를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중에서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여호와여 이 민족을 수년내에 부흥케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수년내에 부흥케 한다는 "부흥"이란 단어는 요즘 우리가 부흥회한다는 그런 프로그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살려달라"고 하는 애절한 절규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이 백성을 다시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백성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진실하게 살아보겠습니다. 하나님 영광스런 백성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수년내에 이 민족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진노 중에서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IV. 하박국의 감사

고통의 시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야될 내용이 있다고 하면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몸부림이 아닐런지요. 기도는 눈을 감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늘 본문에 보면 기도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선 부릅뜨고 현실의 아픔을 직시해야 됩니다. 문제를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의 실체 한가운데 서서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문제를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분명히 직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눈을 뜨고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알고 계시는 그분, 이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그분, 우리의 고난을 알고 계시는 그분, 우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그분,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렵다고 절망 낙심만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만사의 해결자이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선지자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기 6가지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경제는 도탄에 빠졌고 먹을 것 입을 것이 없고 무역은 막히고 직장을 잃었고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회복된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전히 삶의 환경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삶의 정황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6가지가 없다고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18절 말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이 이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신다고 하면 고난가운데 하나님이 이 백성을 지켜주신다는 약속이 있다고 하면 나는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앞에 감사하고 기뻐하겠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짐은 그대로 있지만 그 짐을 맡아주시는 전능하신 주님이 내게 계시기에 할렐루야 나는 찬송하겠네. 이 하박국의 노래가 오늘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박국을 주경하던 많은 주경가들은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인생의 절벽에서 정상으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그 꼭대기로 이렇게 하박국서를 요약하게 된 것입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삶의 정황이 좋아진 다음에 하는 감사가 아니고 고통 한가운데 서서 고통을 바라보면서 다시 고통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진실한 감사입니다. 행복은 좋은 환경이 아니라 감사를 발견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윌리암 로우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 본문을 주경하며 그렇게 얘기합니다. "최고의 승자는 자선을 많이 베푼 사람이 아니다. 최고의 승자는 금식을 오랫동안 한 사람도 아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았던 사람이 최고의 승자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어디까지 갈 때까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은혜의 수준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불평하며 불행해 하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다 잃고도 하나님 한분으로 감사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V. 높은 곳에서 드리는 감사

제가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했습니다. 방마다 연탄을 가득히 쌓아두고 연탄을 한 장씩 두 장씩 갈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때는 연탄창고에 연탄을 쌓아둘 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연탄 살 돈이 없으면 추위에 벌벌 떨고 겨울을 지내는 겁니다. 어쩌다 연탄 살 돈이 생기면 동리 구멍가게에 내려가서 연탄 두장을 사옵니다. 그러면 새끼줄에 묶어서 연탄 두 장 들고 강나루 언덕길을 올라오지요. 그런데 연탄 난로가 하도 낡아서 연탄불 피워놓고 자고 일어나면 종종 머리가 띵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려는데 머리가 띵해서 공부가 잘 안됩니다. 가스가 새어 나왔던 게지요. 또 친구들 가운데는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하루 한끼 밥을 먹고 한끼 두끼 정도는 학생들이 밥을 다 먹고 숭늉마시고 나면 누룽지를 받아서 먹고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졸업을 한 다음에 얼마후에 학교에 가 보았더니 연탄난로가 다 없어지고 스팀 장치가 잘 되어있어요. 그 난방에 사연인 즉슨 어느집 독자 아들이 신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하다가 가스가 새어나와 가스 중독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죽은 학생의 부모가 내 아들 예수믿고 죽은 것 감사합니다. 세상에 개죽음도 많은데 선지동산에서 하나님 연구하다 죽었으니 감사할 수 밖에요. 나이가 들어가며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가 묻게 마련인데 맑고 깨끗하고 주님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부름을 받았으니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통장 하나를 총장님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내 아들 목사가 되어서 개척교회 하면 아버지로서 통장 하나 마련하여 줘야지 하고 푼돈 푼돈 모은 것입니다. 연탄가스 사고로 죽는 것은 내 아들로서 마지막이기를 원합니다. 기숙사 연탄난로 다 제거하고 스팀난방으로 바꾸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스팀 장치로 다 바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지요. 차원이 다릅니다. 보는 시야와 시각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9절을 보십시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버틸 수 있는 힘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정상으로 그 발을 인도하신다고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이런 걸 한번 상상해 보십시요.

한 마리 사슴이 깊은 골짜기에 빠졌습니다. 거기에 커다란 위험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사슴은 그 날렵한 발로 언덕을 산꼭대기 정상을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에 올라 골짜기를 내려다 보니 자기를 위협하던 상황은 사라졌습니다. 햇살은 돋고 초장은 펼쳐져 있었습니다. 거기서 노래하는 한 마리 사슴을 상상해 보십시요. 그 얘기가 본문 마지막 19절입니다. 

하박국 1장은 하나님께 항변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골짜기의 기도였습니다. 아파서 우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힘을 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며 신음했던 선지자. 민족의 고통 한가운데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던 선지자. 고난당하는 백성들과 비참하게 망가질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울부짖던 선지자. 이제는 그 골짜기에 벗어나 언덕 정상에 우뚝 서서 수금을 뜯으며 노래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찬송하는 이 선지자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결론은 신앙의 정상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벌레와 같은 인간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전진하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높이 오른 사람은 불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감사는 감사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감사하는 그런 감사가 아닙니다. 

시대의 아픔 한가운데 우뚝 서서 고난의 현장 한가운데 우뚝 서서 자신의 믿음이 정상에 있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사랑하는 그 정상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절정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 절정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신앙인이었고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절)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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