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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처입은 이웃들의 치유자 (마 9:35 ~ 마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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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이웃들의 치유자 (마 9:35 ~ 마 10:1)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죤 볼트버그라는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우리가 만나면 서로가 힘이 됩니다’라는 책이 있다. 이 한글제목은 원제목과 다른 의미이다. 원래 영어 제목을 직역하면 ‘우리가 서로 알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정상이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되면 우리 모두는 비정상이 된다는 뜻이다. 

이 책의 1장의 제목은 ‘고슴도치의 딜레마’이다. 고슴도치는 외로운 동물이다. 동물들이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는 일반적으로 떼를 지어서 움직인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보통 혼자 다닌다. 그러다가 그가 외로움을 느낄 때는 다른 고슴도치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그러다보면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된다. 고슴도치에게는 약 30,000개의 바늘이 몸에 붙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 많은 바늘이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들도 30세가 넘어가면 약 30,000개의 상처를 가지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인생은 과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영적 거장 중에 헨리 나우엔이라는 분이 있다. 그 분이 쓰신 영향력 있는 책 중에서 ‘상처 입은 치유자 (The Wounded Healer)’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 헨리 나우엔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처 입은 치유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 분은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늘 외로우셨고 찔리고 상처 입었으며, 끝내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상처로 온 세상을 치유하시는 치유자의 삶을 사셨다. 

우리가 그 분의 제자라면 우리도 이웃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우리보다 고통 받고, 우리보다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이웃을 위한 치유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지난 이틀 동안 우리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이웃을 치유하는 치유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

(1) 첫째, 우리는 상처 입은 이웃을 볼 수 있는 눈이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은 실제로 그런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도 훨씬 큰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오직 우리의 상처 만을 돌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Driven Life이고 둘째는 Called Life이다. Driven Life는 쫓겨다니는 삶의 형태를 말한다. 늘 허겁지겁 바쁘게 살다보면 다른 사람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Called Life는 소명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왜 주님이 나를 부르셨는지를 생각하며 늘 그 소명을 향해서 묵묵히 걸어가는 인생이다. 

그런데 이런 소명의 삶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한평생 내 상처에 집중하지 않고 이웃을 치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달라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36절을 보자.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를 바라보셨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35절을 보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그들은 병들고 약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그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계셨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우리 주위에 있는 눌린 자들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2) 둘째, 상처 입은 이웃들의 고통을 느끼는 가슴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당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 심지어는 레위인과 제사장도 그를 보았으나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36절을 다시 보자.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주님은 그들은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 개정판 성경에는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을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매우 토속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영어 표현으로는 ‘compassion’이다. ‘com’이란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passion’은 ‘고통’이라는 의미이다. 즉,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고통과 좌절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함께 느끼셨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그 자리에 서는 연습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 자리에서 그들의 환경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남편이 아내의 입장에 서서 바라볼 수 있다면, 아내가 남편의 입장에 서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가정의 문제는 상당 부분 제거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들의 입장에 서서 진지하게 노력한다면, 그리고 자녀들이 치열한 이민의 삶을 사는 부모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일의 결과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교회 영적 지도자들이 현실에서 고통하는 교인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그리고 교인들이 영적 지도자들의 갈등과 고난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교회의 모습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조금만 입장을 바꿀 수 있고 가슴을 열 수 있다면 사역의 기회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가슴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간구해야 한다.


(3) 상처 입은 이웃들을 제자 삼는 삶을 살아야 한다.

35절을 다시 보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주님은 병들고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쳐주셨다. 37절을 보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주님은 우리 주변에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우리가 추수해주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 일꾼이 부족하다고 하신다. 여기에 오늘 말씀이 10장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있다. 

10:1을 보자.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주님은 왜 열 두 제자를 허락하셨는가? 이 병들고 약하고 상처 입은 이웃을 고치며 치유하기 위해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신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는 무엇인가? 그리고 제자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훈련에 집중하고 있는 교회에는 치명적인 유혹이 있을 수 있다. 단순히 교회의 훈련과정이기 때문에 훈련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직분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제자훈련을 받는다.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핵심은 무엇인가? 단순한 과정과 공부와 information을 얻는 것이 훈련의 목적은 아니다. 막3:14을 보자.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제자훈련의 핵심은 보내어 전도하게 하심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주님의 heart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가슴에는 수많은 이웃이 담겨 있다. 우리 가슴에도 그들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된 이유이고 제자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해야 한다.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실 것이다. 주님의 가슴을 가지고 우리의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제자가 되고 순장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를 모으신 것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고,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가슴을 가르쳤다.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열 두 제자의 만남은 ‘기독교 기초 공동체’라고 불리운다. 우리도 내 인생을 통해서 만나는 열 두 명에게 우리의 인생을 걸어보자. 정말 힘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섬겨보자. 열 두 명이 어렵다고 느껴지면 세 명을 섬겨보자. 그러면서 그들에게 같은 모습으로 또 다른 세 명을 섬겨보라고 권면해보자. 그러면 모두 12명이 될 것이다. 세 명도 힘들다면 다만 한 명만이라도 섬겨보자.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시작이 된다. 한 사람을 touch하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작이 된다. 

한 기자가 데레사 수녀를 만나서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데레사 수녀는 ‘아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섬긴 적이 없다. 다만 매일 내 곁을 지나는 힘 없는 한 사람에게 집중했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곁을 지나가는 한 생명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의 연약한 손과 발이 되어주고 그들의 가슴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다락방과 교회는 이민사회를 밝히고 이곳 미국을 비롯한 열방을 바꾸는 공동체가 되어질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사는 방법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부터 그런 삶을 시작해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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