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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잃어버린 감사의 회복 (시 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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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감사의 회복 (시 138:1~8)


우리교회에서 전도용으로 발행하는 “Family Today" 11월호에 저가 이런 내용의 칼럼을 썼습니다. 
미국의 가장 유명한 연예인 중의 하나였던 지미 듀란테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듀란테는 쇼 기획자에게 자신의 스케줄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단 몇 분밖에 출연할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 그래도 된다면 출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기획자는 그렇게라도 듀란테를 무대에 세운다면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되어 듀란테가 무대 위로 올라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짤막한 원맨쇼를 끝내고도 무대에서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박수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듀란테는 계속해서 쇼를 진행해 갔습니다. 

기획자는 듀란테의 마음이 변한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15분, 20분, 30분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듀란테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무대 뒤에서 기획자는 그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난 당신이 몇 분간만 무대에 설 줄 알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듀란테가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럴 계획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소. 저기 맨 앞줄에 앉은 사람들을 보시오.” 

기획자는 무대 틈새로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대 맨 앞에 두 명의 참전 용사가 앉아 있었는데 둘 다 전쟁에서  한 쪽팔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쪽 팔이 없었고, 또 한사람은 왼쪽 팔이 없었습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남은 한 쪽 팔을 서로 부딪쳐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한 쪽 팔로 서로 박수를 한번 쳐보십시오.) 

이 모습을 보고 듀란테는 그냥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팔 다 가지고도 원망하고 불평하며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 팔로도 박수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올해도 감사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우리교회는 다음주일에 (11월26일)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절을 매년 이맘때면 돌아오는 교회의 절기로, 약간의 경제적인 부담감을 느끼면서 그냥 형식적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추수감사절에는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하는 고귀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겐 잃어버린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감사’라는 단어입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스승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은 고용주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정부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감사하기는커녕 터져 나오는 것은 원망, 불평, 비난뿐입니다. 

그게 부인할 수없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현실에서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감사’를 생각하게 하고, ‘감사’를 회복시켜줍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의미입니다. 
감사가 없다면 천금을 가진들 행복하겠습니까? 
감사가 없다면 60평 이상 아파트에 산들 행복하겠습니까? 
어림없는 얘기이지요. 

본문의 말씀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시편 138편은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고 난 후에 지은 시라고 추측합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입니다. 

법궤(언약궤, 증거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았다는 것은, 드디어 예루살렘이 가나안 땅에서  정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었습니다. 
다윗은 법궤가 들어오는 날에 바지춤이 내려올 정도로 기뻐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다윗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일로 다윗은 예루살렘 밖에 사는 지방토호들의 집중적인 반발과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행정수도 문제로 얼마나 말이 많습니까? 

오늘날과 같은 개명천지에서도 이렇게 반발이 심한데,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에야 얼마나 반발이 심했겠습니까? 
다윗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감사’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138편을 읽어보시면,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감사’입니다. 

1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2절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4절 “여호와여 땅의 열 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래서 시편 138편의 제목을 붙인다면 ‘환난 중에서의 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다윗에게서 그 비밀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다윗은 환난 가운데에도 하나님께 감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지금 다윗은 환난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어떻게 시작됩니까? 

1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주께 찬양하리이다.” 
2절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영어 표현으로 말하면 ‘의지미래’입니다. 
"I will praise you......." 
"I will give thanks........" 

즉 이것은 일종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고 주께 찬양을 하리라.’고 작정하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게 되면 대부분 예배조차 포기하게 됩니다. 
예배드릴 기분이 안 난다고 말합니다. 
“당신 같으면 이런 처지에 예배드릴 기분이 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예배와 찬양과 기도의 자리에서 후퇴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삶의 스타일은 정반대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환난을 극복하는 삶의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환난이 다가올수록 더욱 찬양하고, 더욱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이런 다윗의 삶의 비밀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찬양하기로, 감사하기로, 결심하십시오. 

시편 34편도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을 때 쓴 시였습니다. 
시편 34편에 붙어 있는 제목을 보십시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지금 다윗은 자기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척하다가 쫓겨났습니다. 
자기 스스로 볼 때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아마 우리 같으면 “어찌하여 나를 이 꼴로 만드십니까?”라고 한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라고 입을 엽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삶에 어두움이 밀려와도, 환난의 바람이 불어도, 고통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주님을 송축하는 일을 나는 멈추지 않으리라!” 

할렐루야!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답이 시편 34편 4절에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고통 중에도 찬양하면 고통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환란 중에도 감사하면 환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과 환난이 찾아올 때 가장 어리석은 일은 찬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감사하기로 작정하십시오. 


2. 둘째로, 다윗은 환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원수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공격하고 그 마음을 흔들었을 것입니다. 
다윗도 인간인데 많이 흔들렸겠지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시편 138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백이 반복됩니다. 

2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4절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5절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다윗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그가 붙든 약속의 말씀은 삼하 7장의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쓰신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세우신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지금은 많은 주변 국가들이, 열왕들이, 지방 토호들이 날뛰고 있지만 결국은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다윗은 궁극적인 승리를 말씀을 통하여 확신하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오늘의 고생은 오히려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축복받게 되리라는 것을 100퍼센트 확신한다면 오늘의 환란은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요?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 입으로 조국 이스라엘의 패망을 예언했고, 그 결말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그때의 고통을 ‘쑥과 담즙’으로 표현했습니다. 

렘애3:19절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여러분, 쑥과 담즙이 얼마나 씁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그 고초와 재난 중에도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렘애3:21절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예레미야가 소망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의 성실’입니다. 
렘애3: 23절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의 절망과 한숨과 낙심을 일거에 뒤바꾼 것은 바로 약속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예레미야는 오히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렘애3: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도대체 삶이 풀리지 않습니까? 
차라리 주저앉고 싶고, 포기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한없이 멀어져 보입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복음성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3. 셋째로, 다윗은 환난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심을 믿었습니다. 

8절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찌라..........” 

비록 원수들이 준동하고, 산더미 같은 장애물이 앞을 가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케 하심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뜻이 있어 나를 세상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완성하시고야 말 것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환난’이란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희랍어가 환난이란 단어의 뜻이 비슷한데, 그것은 본래 ‘틀 속에 집어넣고 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뭔가가 만들어져서 나옵니다. 
포도를 넣고 짜면 포도즙이 나옵니다. 
매실을 넣고 짜면 매실즙이 나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8절의 고백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찌라.” 

‘완전’ ‘완성’이라는 개념에는 과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빌1:6절의 바울 사도의 말씀으로 표현하면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저는 사역을 하면서 이 말씀에 얼마나 많은 격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비록 오늘 내가 넘어졌다하더라도, 비록 오늘 내가 병들었다하더라도, 비록 오늘 내가 죄 중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약속한 일들을 이루실 줄 확신 합니까?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시고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불란서의 노르망디에 상륙을 했습니다. 
그래서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가 확보되었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연합군은 몇 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사막의 여우’라는 독일의 롬멜 장군에게 독일군의 승리를 보고했지만 그는 전혀 웃거나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웃지 않은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독일이 패배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거꾸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넘어지고, 쓰러지고,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주니 축복이며, 성도들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의 절기에 잊어버린 단어인 ‘감사’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만을 잠재우고 감사를 깨우십시오. 
여러분의 입술에 불평을 멈추고 감사를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하늘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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