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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 삶의 정체성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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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삶의 정체성 (갈 2:20)
 
   
어떤 연인의 사랑고백입니다. 
 
당신을 알기 전 매일 매일이 똑같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만나서 사랑하게 된 후로 달라졌습니다.

매일 매일이 새롭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당신 생각에 행복합니다. 당신과 같은 하늘 아래 있다고 생각하니 즐겁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이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새로운 삶을 사는 것도 그대가 있어서입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당신과 나의 남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 사랑고백이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랑이 삶을 변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 사랑이 자신을 바꿔 놓았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특별히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 놓습니다.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꿔 놓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것은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를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날 예수가 내 인생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분을 정말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 사랑이 나를 바꿔 놓았습니다. 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됐습니다.

신학에서는 예수 때문에 시작된 이 새로운 삶을 “성화”(聖化)라고 개념화했습니다. 한 마디로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예수를 닮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시작된 이 새로운 삶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바울은 자기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한 마디로 비유적 표현입니다. 예수 믿고 달라진 자신의 삶을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비유적 표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인간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의 값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는 죽지 않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죄 때문에 죽을 것을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우리가 죄 때문에 죽은 것과 같은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적인 죽음입니다. 법이 정한 죄의 형벌로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형벌에 대하여 죽은 것을 말합니다.

도망자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경찰에게 계속해서 쫒깁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누명을 쓴 것이라면 무죄를 입증해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죄를 저질렀다면 죄의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무죄가 입증 됐거나 교도소에서 만기 출소를 했다면 더 이상 경찰에게 쫒길 이유가 없습니다.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값을 다 치른 사람들입니다. 마치 교도소 만기 복역한 사람들처럼 더 이상 과거의 죄 때문에 두려워 떨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둘, 그리스도처럼 날마다 자아에 대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철저하게 자아를 죽이신 것을 말합니다. 전혀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자아의 모든 욕망과 꿈을 다 내려놓으셨습니다.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면서 침묵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의 자아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욕망을 다 내려놓으셨던 것처럼 자아의 욕망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침묵하셨던 것처럼 우리 자아에 대해 침묵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은 “크리스토 쉬네스타우로마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을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시제가 ‘제 1 완료’입니다. 문법적으로 보다 충실하게 번역을 다시 해 본다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왔다.”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대부분의 번역본이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여기에서 지금도 우리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회록으로 유명한 어거스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회심한 후 창녀들이 들끓는 거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과거 창녀와의 사이에 사생아까지 낳았던 터라 창녀들이 알아보고 유혹했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옛날의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다”

그렇습니다. 죄는 오늘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연약한 우리 자아는 흔들립니다. 우리는 이 흔들리는 자아를 오늘도 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날마다 우리 자아를 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이끌고 오던 자아를 저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자신 안에 임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이끄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전화번호 광고가 눈에 들어옵니다. “1577-1577”, “1588-1004”, “1688-7777” 등 외우기 쉽고 눈에 확 띠는 전화번호를 광고합니다. 알고 보니 대리운전 광고입니다. 술자리 모임에 참석한 뒤 귀가할 때 운전을 대리해 준다는 것입니다.

술 먹고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사고를 내기 십상입니다. 누군가 대신 운전을 해 주면 문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자아가 우리 자신의 삶을 이끌고 가다보면 엉뚱한 곳으로 가기 십상입니다. 갖가지 사고치기가 쉽습니다. 누군가 대신 내 자신의 삶을 이끌어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이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내 삶을 주관하셔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우리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죄로 인해 실족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고 살려면 우리의 인생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더 이상 내가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신다고 당장 내 자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느낌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고민도 아무런 책임 의식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로봇처럼 그리스도께서 조종하시는 대로 따라만 가게 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 자아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 삶이란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 그리스도의 뜻을 묻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것은 삶의 태도가 바뀐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묻고 사는 삶”을 살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묻는다는 것은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재임 시절 일화를 본 일이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하루에 24번 기도했다고 되어있습니다. 다급하게 처리하고 올바로 판단해야 하는 일이 많은 날이었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속 하나님께 물었답니다. 결국 이분은 큰 실수 없이 존경 받는 대통령으로 퇴임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퇴임 후 더 큰 사랑을 받고 더 많은 일을 하는 전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란 늘 그리스도께 묻는 삶을 말합니다.


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물었을 때 그리스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그것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 삶을 좌우하신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십니다. 그분을 내 안에서 허수아비로 세워두느냐 아니면 주인으로 모시느냐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출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당도했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모세가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을 만났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모세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하는 삶은 위대한 삶입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면 우리는 정말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됩니다.


셋째,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살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믿음 안에서 살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믿음 안에서”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의 영역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갔을 때 제한된 사람들이지만 몇몇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를 안내해 준 전도사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때로는 단 둘이 몇 차례 격이 없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시험 삼아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기 교회를 세우게 된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저는 우선 하나님의 은혜라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남측 교회들의 기도와 성원 때문이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답변은 너무도 섬뜩했습니다. “모두가 다 어버이 수령님과 김정일 장군님의 덕입니다” 같은 질문을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목소리 높여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인들의 입에서, 더더욱 전도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저 북한의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소름끼치도록 무서웠습니다. 얼마나 세뇌가 됐기에 이렇게 말하는가? 

저는 한편으로 반성했습니다. 나는 정말 이렇게 철저하게 매사에 주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살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 안에서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 안에서 결단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가를 깊이 깨닫고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이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새로운 삶은 우선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입니다. 과거 내 모든 죄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한 내 연약한 자아가 매일 같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삶입니다. 아울러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깨닫고 철저하게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나아가 철저하게 믿음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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