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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치않는 마음의 바탕 (삼상 25: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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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않는 마음의 바탕 (삼상 25:32~38)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 그대를 보내어 이렇게 만나게 하여 주셨으니, 주님께 찬양을 드리오. 내가 오늘 사람을 죽이거나 나의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지 않도록, 그대가 나를 지켜 주었으니, 슬기롭게 권면하여 준 그대에게도 감사하오. 하나님이 그대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오. 그대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하도록 나를 막아주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대가 급히 와서 이렇게 나를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나발의 집안에는 내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 남자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뻔하였소.” 

그리고 다윗은 그 여인이 자기에게 가져온 것들을 받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시오. 내가 그대의 말대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돌아와 보니, 그는 자기 집에서 왕이나 차릴 만한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대로 취하여서, 흥겨운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다음날 아침이 밝을 때까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나발이 술에서 깨었을 때에, 그의 아내는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열흘쯤 지났을 때에, 주님께서 나발을 치시니, 그가 죽었다.]


• 다윗의 낭인 시절

사울과 다윗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무엘기를 읽다가 ‘한결같다’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꼭 같다’는 뜻이지만, ‘결’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어 여러 가지 느낌을 자아내는 단어입니다. ‘결’의 사전적 정의는 “나뭇결 돌결들처럼 굳고 무른 조직의 부분이 모여 이룬 바탕의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음씨, 성격”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결국 ‘바탕’입니다. 한결같다는 것을 저는 마음 바탕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사람은 변하게 마련입니다. 모습도 변하고, 취미도,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하지만 ‘바탕’조차 변하면 곤란합니다. 제게는 오래된 벗들이 있습니다. 그들과의 우정이 지속된 까닭도 어쩌면 세월이 변해도 여전한 마음결, 삶의 태도, 혹은 지향하는 바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왕이 되기 전, 사울은 참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운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그는 펄쩍 뛰며 자신은 그럴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제비를 뽑아 왕을 뽑는 자리에 부득이 참석하기는 했지만 행여 남의 눈에 띌세라 짐짝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왕으로 뽑혔으면서도 집으로 돌아가 여전히 소를 몰고 밭에 나가 일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요? 왕이 된 사울은 변했습니다. 서른 살에 왕이 되어 42년을 권좌에 있는 동안 그는 점차 권력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민중들의 마음이 젊은 다윗에게 기울고 있음을 직감하면서부터 질투심에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던 사울은, 어느덧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전락을 매개한 것은 다름 아닌 ‘권력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집착은 부자유입니다. 부자유에서 불안이 나오고, 불안은 다른 이들에 대한 의심과 폭력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치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다윗은 사울의 적의의 표적이 되어 망명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력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그는 일찌감치 맛본 셈입니다. 그는 구명도생을 위해 블레셋으로 달아납니다만,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속이려고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 하기도 했습니다.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했습니다. 위험을 직감한 그는 블레셋을 떠나 광야에 있는 아둘람 굴에 피신처를 마련하고 재기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다윗이 그곳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대개는 압제를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기치 않게 그는 역사의 주변부로 내몰린 이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는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그의 통치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 정치적 판단

식구들이 불어나면서 그 집단을 먹이고, 재우고, 보호하는 일은 다윗이 감당해야 할 큰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정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란 광야에서 삶터를 일구고 있던 마온 사람 나발은 대부호였습니다. 그는 갈멜에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가진 가축은 양 떼가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였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그런 재산을 일군 것을 보면 그는 선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사업 수완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고집이 세고 행실이 포악하였다’고 전합니다. 그의 이름 ‘나발’은 ‘바보’ 혹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이름은 사무엘기를 기록한 사람의 작명일 가능성이 큽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을 통해 성서기자는 그가 재산을 일구고 유지하는 일에는 탁월했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는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날 다윗은 갈멜에서 나발의 양털깎이 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을 나발에게 보냅니다. 자기들이 나발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적이 없고, 오히려 그들의 보호자 노릇을 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정중하지만 그의 요구는 단호합니다. 목초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며 살던 유목민들은 생존을 위해 벌이는 약탈을 정당한 행위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다윗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발은 다윗의 정중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오히려 다윗을 모욕합니다.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빵이나 물이나, 양털 깎는 일꾼들에게 주려고 잡은 짐승의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주겠느냐?”(25:10-11)

나발의 말은 협박자와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게다가 그는 다윗을 주인을 버리고 뛰쳐나온 종놈이라는 말로 자극합니다. 대자산가 나발의 눈에는 다윗과 그 일행이 일하기 싫어서 빈둥거리는 건달패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불의한 사회체제의 변두리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리는 이들의 아픔과 한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쓰레기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나발은 다윗의 존재를 알았을 겁니다.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윗을 도움으로써 사울을 적으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사울이었으니 말입니다. 부하들의 보고를 들은 다윗은 대노했습니다. 그는 나발에게 보복을 다짐하며 부하들을 무장시킵니다. 바야흐로 피바람이 불어오려는 찰나였습니다. 다윗은 내일 아침 날이 밝아오기 전에 나발의 집안 남자들을 다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께 무슨 벌이라도 받겠다고 말합니다. 냉철하고, 강인하던 다윗은 간 데 없고, 자기 분에 못 이겨 펄펄 뛰는 다윗의 모습이 낯섭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약하고, 이기적이고, 쉽사리 어긋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절망과 분노라는 ‘덮개’가 하늘을 가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여유가 없습니다. 


• 頂門一鍼의 한 마디

성서 기자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 장면을 전환하고 있습니다. 일꾼 가운데 한 사람이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다 알립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이해심도 많고 용모도 아름다웠다’고 전합니다. 일꾼의 말을 들은 아비가일은 자기들에게 닥쳐오는 재앙의 쓰나미를 직감합니다. 남편과 이 문제를 상의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일꾼들에게 서둘러 다윗에게 바칠 선물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빵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부대와 이미 요리하여 놓은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뭉치 백 개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빵과 포도주와 요리된 양은 아비가일이 다윗을 일꾼이 아니라 보호자로 여긴다는 뜻이고, 저장식품인 볶은 곡식과 건포도, 무화과는 다윗의 처지를 배려한 음식이었습니다.

다윗 일행과 마주치자 아비가일은 황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립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면서 스스로를 종으로 지칭하며 애원합니다. 부디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나발에게 마음을 쓰지 말고 자기의 말을 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준비한 선물을 받아달라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나발의 무지와 무례를 징계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느닷없는 사태 앞에서 말을 잊은 다윗에게 아비가일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기시킵니다. 

비록 지금은 곤란한 지경에 있지만 주님의 전쟁을 수행해온 다윗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도우시고, 세워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장의 곤란함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미끈한 아첨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가닿는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이의 진정성입니다. 진정이 담긴 아비가일은 말은 곤고한 날을 보내면서 쪼그라들고, 격분으로 거칠어진 다윗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애무였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시선을 가리고 있던 절망과 분노의 ‘덮개’를 벗겨내고, 푸른 하늘을 그에게 열어주었습니다.

침묵하고 있었지만 다윗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의 귀 기울임이 그 증거입니다. 마음 하나 지키지 못해 인생에 실패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의 지혜자는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4:23)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아비가일은 사납게 날뛰고 있던 다윗의 마음의 고삐를 잡아 다윗의 손에 돌려주었습니다. 이제 아비가일은 다윗의 마음에 頂門一鍼의 한 마디를 던집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분이 사소한 격분을 못 이겨 몸소 원수를 갚는다면, 이 일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드럽지만 따끔한 충고였습니다. 

다윗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 그대를 보내어 이렇게 만나게 하여 주셨으니, 주님께 찬양을 드리오”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지켜준 아비가일에게도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지요? 살다보면 곁길로 나가기도 하고, 함정에 빠지기도 하는 게 인생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이란 우리를 마땅히 서야 할 자리로 되돌려 놓는 만남일 겁니다.


• 나르시스적 인물의 운명

집으로 돌아간 아비가일은 기가 막힌 광경에 아연했을 겁니다. 나발은 자기 집에서 왕이나 차릴 만한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대로 취하여서, 흥겨운 기분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배고픈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자족적인 기쁨에 취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술에 취했지만, 어쩌면 자아에 도취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나발에게서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매혹되었던 나르시스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홀로 자족할 뿐, 타인의 눈물과 슬픔에 반응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그를 ‘바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아무 말도 않던 아비가일은 다음 날 아침 나발이 술에서 깨자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렸습니다. 그러자 나발의 심장이 갑자기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성서기자의 서술은 마치 판결문처럼 건조하게 바뀝니다. “열흘쯤 지났을 때에, 주님께서 나발을 치시니, 그가 죽었다.” 이것은 홀로 자족한 자의 운명에 대한 성경의 암시입니다. 나발의 잔치는 끝났습니다. 그가 왕의 식탁처럼 차려놓고, 흥겨운 취기 속에서 홀로 만족했던 것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혹시 남에게 돌아갈 몫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풍요로운 삶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자연스런 소망이지만, 그런 마음들이 이루어내는 세상은 어둡기 이를 데 없습니다. 넉넉지는 않더라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따뜻한 우정을 맛볼 때 영혼은 고양되게 마련입니다. 석유 문명의 종언을 예고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옵니다. 에너지 과다 소비에 바탕을 둔 문명은 이제 지속 불가능합니다. 에너지를 순전히 사람의 노동력으로 계산한다면 오늘날 미국인 한 사람은 하루 종일 150명의 노예를 부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석탄과 석유는 수많은 생명체의 압축이요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석유 1리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25톤 이상의 생명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문명은 지구가 장구한 세월 동안 축적해온 것들에 대한 폭력적 낭비를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나발의 잔치가 끝나가는 시대입니다. 시급히 절제하는 삶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두려운 아침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베 피에르 신부의 말이 천둥처럼 제게 다가옵니다. 그는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아비가일은 공감하는 사람이었고 나발은 자신을 숭배하는 자였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나발의 잔칫상을 떠나 아비가일의 자리에 서기를 바랍니다. 立冬을 지나 이제 점점 추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돌보고 나누려는 우리 마음의 온기는 점점 높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숨결 거친 사람들을 향해 사랑과 우정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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