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사람 (시 39:1~7)

  • 잡초 잡초
  • 634
  • 0

첨부 1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사람 (시 39:1~7) 

얼마 전 우리 사회 전체를 흔들었던 한 유명 여자 배우의 자살 사건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녀의 자살 때문에 국민들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의 자살 동기가 "사채업자라는 인터넷의 악플 때문에 그랬다, 우울증을 앓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얼마나 견딜 수 없는 벼랑 끝에 몰렸으면 정신적 고통의 끝자락에서 그런 선택을 하였겠는가하는 동정이 앞서고 동시에 그런 상황에서 우울증이라는 병 증세가 얼마나 무서운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절감하게 됩니다.

어디 최진실 씨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겉은 번듯해 보이지만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 이런 저런 인생고로 시달리는 사람들, 사망의 어둠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는 인구의 7.5%인 375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죠. 또 10명 중 1명이 자살 충동을 자주 느끼고,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최고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누구나 사람들은 이 땅위에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며 이것저것 해보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포기하는 모습들을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인생을 향하여 나그네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그 길 위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설 때면 우리는 잘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미래를 좀 더 잘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복병처럼 나타나 우리의 생각과는 점점 다른 길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일들 때문에 우리에게는 염려도 있고, 불안감도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인데 이 말씀이 기록 될 때 그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나 60대 정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절 13절에 보면 그가 지금 병상에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지기 전에, 내가 죽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 성군입니다. 그런데 의롭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 치고 주변에 정적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들은 다윗이 다시 소생할지, 소생하지 못할지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병색이 깊어지자 은근히 좋아했습니다. 하나같이 원수들은 건강하고 형통하여 다윗을 비웃으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이는 들고 몸은 병들어 대응할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향해 저주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입을 꼭 다물고 참았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내가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가 왜 이 모양이 되었지?'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화가 목에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부를 다시 한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부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마음을 줄 것도 못 되고, 내가 의지할 것도 못 되. 하나님,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할 자입니다. 하나님, 나를 받으시옵소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고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봤듯이 사람이 병이 들면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인생의 실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 세상을 보는 안목도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젊었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이 나이가 들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것을 보게 되고, 그 동안 뒤에 숨겨져 있던 것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을 보는,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실패한다든지 위기를 만날 때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바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살아가면서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누가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오고, 또 질병이 찾아올 줄 누가 알겠습니까? 갑자기 하던 사업이 순식간에 어려움을 당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다윗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인생무상’입니다. 

5절을 봅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윗이 한 60년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지금 앞으로 남은 인생이 몇 년이나 될까 손가락을 세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도대체 내가 한 생을 살았다고 하는 데 그것이 고작 한 뼘에 불과하구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길이를 잴 때 기본 단위는 한 뼘이었습니다. 다윗이 병상에서 새삼스럽게 이 사실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 아무것도 아니구나!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굉장한 인생을 산 것 같은데, 나의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별 것 아니구나. 한 뼘뿐인 인생,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겠구나.' 다윗은 자신을 정확하게 직시했습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 가운데서 5절 중간을 보면 묘한 뉘앙스를 줍니다.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누구에게나 든든하게 서 있는 것 같이 늙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고, 잘못되지도 않을 것 같은 전성기가 있습니다. 그 때가 든든히 선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춘을 자랑하는 때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과시할 때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하여 명성을 떨칠 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때가 한번은 있습니다. 그런 때에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 영원한 유산을 남기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습니다.

죽은 후에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두고두고 자기의 업적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기가 세운 기록이 깨어지는 날이 오고, 명성도 사라지고, 공로도 잊혀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릴 때만해도 가지고 못 가진 것 때문에 또 배우고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얼마나 열등감에 허우적거렸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요즘 여자가 나이가 들면 40대가 되면 그때부터 '얼마나 배웠는가?' 하는 것이 무너지게 되지 않습니까? 또 50대가 되면 '얼마나 예쁜가?' 하는 것이 무너지게 되고, 60-70대가 되면 '얼마나 잘 사는가?' 하는 것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사실 세상에서의 자랑은 그 때뿐입니다.

어느 80세 된 사람이 지나온 80년 간의 삶을 분석해 보았다고 합니다. 철없이 살았던 시간 15년, 잠자는 시간 26년, 일하는 시간 21년, 먹는 시간 6년, 화낸 시간 6년, 남을 기다리는 시간 5년, 수염 깎는 시간 228일, 욕하며 보낸 시간 26일, 넥타이 매는 데 보낸 시간 18일, 담배 피운 시간 12일, 그밖에 이것저것 따지고 보니 정말 의미 있게 살았던 시간은 46시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인생 가운데 정말 후회 없이 뿌듯해 할 수 시간이 얼마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지금 다윗에게도 고난의 파도가 자신을 거세게 덮어오는 현실 앞에서 세 가지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4절에 다윗이 고백한 "나의 종말과 연한을 알게 하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허무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나무들을 잎이 다 떨어집니다. 얼마나 춥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나무들은 백년을 살고 이백 년을 살고 몇백 년을 사는 나무들도 있지만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영원하지만 마치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우리들은 금방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존재입니까? 일장춘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몸이 나른해서 점심이라도 먹고 나면 식곤증이 자신도 몰래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살짝 조는데 그 잠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 짧은 시간에도 깊은 꿈을 꾸지 않습니까? 꿈에서는 일확천금을 얻어 커다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수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뿐 깨고 나면 한바탕 허망한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래서 봄날에 꾸는 꿈같은 인생이 일장춘몽입니다.

두 번째가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6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돈은 내가 죽어라 벌어서 모아 놓았는데 정작 그 재물의 주인은 누가 될지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지금 금융의 위기는 어느 누구도 예측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세계 최고의 돈버는 전문가들이 모인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가'에 가보면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들, 돈을 굴릴 줄 아는 경영의 천재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번 금융 위기 앞에는 속수 무책이 아닙니까?

지난 번 미국 금융의 최대 회사 중에 하나인 '리먼 부러더스'의 붕괴를 시작으로 한 순간에 4000조 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나라 금년 예산이 256조이니까 이 돈이 얼마나 큰 액수인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아무리 똑똑해도 돈 관리를 잘해도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이제 다윗은 고백합니다. 7절입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베들레헴의 작은 농가에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에는 목동으로 지내다가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블레셋의 골리앗을 무찌르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다가 사울 왕의 미움을 사서 뭐, 거의 20여 년의 세월을 쫓겨다니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용맹스러운 왕으로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정말 인생을 살면서 가장 처참한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며 산 경험, 그리고 당대의 최고의 권력을 누려본 인생이지만, 그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는 진지하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여기 '바란다'라는 말은 '소원한다''소망을 가진다' '갈급한 마음으로 갈망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한때 그 역시 세상의 것에 눈을 돌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시선은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여기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이 고백은 우리의 삶의 추, 삶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즉, 이 고백은 하나님을 소망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꿈꾸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것을 가장 큰 낙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그림자를 좇고 세상의 헛된 것을 좇아 분요하게 살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 삶의 초점을 맞추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꿈이자 소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뭔가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너나를 막론하고 자신의 삶에서 이루고 싶고, 가지고 싶고, 하고 싶은 소망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이라고 해서 다 같은 소망은 아닙니다. 소망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께 두지 아니한 소망, 주님을 소망으로 삼지 않은 것들은 다 헛된 것이고 바람이고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사회복지법인 '애양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100년 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나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여수 지역에 만든 나환자촌입니다. 애양원이 유명해진 것은 지금부터 약 60년 전 위대한 성자 손양원 목사님이 배출되면서부터 입니다. 그분이 그곳에서 사역하다가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고, 그 두 아들도 순교를 당해 유명해진 곳입니다. 그 애양원에는 손발과 얼굴이 뒤틀린, 한 마디로 소망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특별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예배에 모이는 숫자가 똑 같은 한국의 유일한 교회입니다. 한 사람도 결석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배에 다 나오는 교회. 따라서 그들의 가슴은 뜨겁습니다.

그들은 양계, 양돈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이 되면 거기에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는데 수천만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말할 나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하면서 헌금을 많이 드리는지 모릅니다. 한 예로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세울 때 예산이 10억이 조금 넘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그들의 손에서 나온 헌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리고 여수 지방에 400여 교회가 있는데, 그 중 40개 교회가 이 나환자촌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린 예물로 개척한 교회라고 합니다. 문둥병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세상을 비관하고 저주하며 살수밖에 없는 그들이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들의 손에 무슨 감사하다는 예물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영적으로 누리고 보니 비록 육신은 망가졌지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입으로 감사하는 것으로는 도무지 모자라 그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주지 못하는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짧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손바닥 넓이와 같은 인생을 깨닫지 못한 채 땅에 매여 허우적거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세상의 재물, 내 손에 있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이제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고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쓰십시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참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오늘 이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이 뭐 그렇게 큰 일인가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의 결정이 앞으로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의 그토록 바라시는 소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죄인 된 우리가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 6:40).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예수님과 만나야 하고,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도 바로 이러한 거룩한 만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촉점이 있는 곳에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리 삭개오 이야기의 핵심은 주님과의 접촉과 그 결과인 변화입니다. 주님과의 접촉이 없는 곳에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접촉이 있어야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태신자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예수 믿고 난 뒤 가장 큰 변화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새 생명, 새 목표, 새 소망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로 죽은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탐욕적인 존재가 예수님을 위해 드려지는 존재가 되었으며, 지옥으로 질주하던 사람이 영원한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먼저 믿은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함께 일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생각하고 살면 이 땅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땅을 생각하고 땅에 주목하고 산다면 우리의 가정도, 직장도, 재물도, 젊음도, 건강도 결국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120만 명의 인생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도 계속해서 카운트 다운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력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듯 여러분의 일생도 마지막을 향해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덧없는 인생을 다시 재조명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루 하루의 삶에 새로운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을 살아야 될 이유와 목적과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앞날에 밝은 태양 빛이 보이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는 빛이 되십니다. 예수가 계신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답답한 현실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승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와 함께 가장 가치 있는 삶을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