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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를 받으실 하나님 (시 4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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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를 받으실 하나님 (시 46:1~11)

6.25전쟁이 한창일 때 사이렌 소리가 나면 방공호로 뛰어들던 생각이 납니다. 적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우리나라는 방공훈련을 합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적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지하도나 건물 안으로 대피하여 목숨을 보존하는 훈련입니다. 방공호나 지하도나 견고한 건물은 우리의 피난처가 됩니다. 이와 같이 전쟁이나 위험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몸을 숨기는 곳을 피난처(Refuge) 또는 요새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어디 일까요? 옛날에는 아무래도 요새 또는 성채(Fortress)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어느 나라에 가든지 옛 조상들이 군사기지로 사용했던 성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총이나 전투기나 미사일이 아닌 칼과 화살이 주 무기였기 때문에 높은 산에 돌로 성벽을 든든하게 쌓아 놓으면 적군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남한산성과 같은 옛 성채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것은 대표적인 성채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내 주는 강한 성이요”(A mighty fortress is Our God)할 때 성은 곧 성채(A mighty fortress)를 의미합니다. 완벽한 요새 위에 쌓아 놓은 성채는 안전한 피난처의 대명사였습니다. 

때로는 사는 집이 피난처요, 요새일 수도 있습니다. 2004년 여름에 캘리포니아에는 엄청난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수많은 집들이 산불에 휩싸여 소실되었습니다. 그때 메델린 란드리(madeleine Landry)라는 여자는 산불 한 가운데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살아났습니다. 그녀의 집은 씨미 벨리(Simi Valley)라는 숲속에 있었는데 평소에 소방관들로부터 산불이 다가올 때 대피법을 훈련받았습니다. 그녀는 불이 날 것에 대비해서 주택의 벽을 강철과 콘크리트로 했습니다. 모든 유리창은 스텐리스 철로 틀을 짜고 진공상태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불이 나자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과 유리창을 폐쇄하고 불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무서운 불길이 지나갈 때 털끝하나 상하지 아니했습니다. “나의 집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라고 노래할만 했습니다. 

“국기”가 피난처가 될 때도 있습니다. 영국의 젊은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거기서 미국 시민권을 받은 그는 쿠바에 가서 살았습니다. 1867년 쿠바에 시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미국 스파이로 체포되었습니다. 군사법정에 선 그는 총살형을 언도받았습니다. 쿠바 주재 미국과 영국 대사관에서는 쿠바정부에 진정서를 넣어서 그는 간첩이 아니라고 항변해도 쿠바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는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이 사형수를 향해 “겨눠 총!”을 했습니다. 지휘관의 “발사” 명령만 떨어지면 수십 발의 총알이 그의 가슴에 박히게 됩니다. 

발사명령이 떨어지기 직전 참관석에 있던 두 명의 영사가 뛰쳐나오며 그들의 국기로 사형수 머리를 씌웠습니다. 하나는 영국의 유니온 잭(Union Jack)국기요, 다른 하나는 미국의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였습니다. 병사들은 세계 최강국의 국기에 씌워져 있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남자는 훗날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아마 “국기는 나의 강한 성이요, 요새이다”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도피성(City of Refuge)이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과실로 사람을 죽인 자를 ‘피의 복수’(avenger of blood)에서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성읍입니다. 레위인 성읍이 6개, 그리고 그 밖의 성읍이 42개소가 있었습니다(민 35:6-32, 신 4:41-43, 등). 이들 성읍의 위치는 도망자가, 그중 어느 도피성에라도 하룻길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습니다(48Km 이내). 그곳에 도피하면 피의 복수를 면할 수 있어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는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성전 제단이 그런 역할을 한듯하며(출21:13,14) 그것이 훗날 성읍으로까지 널리 발전된 듯합니다. 

모세의 법은 도피성에 피신해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고 나면 그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엄격한 모세율법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펼쳐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주시고 채찍을 드십니다. 

우리 교인들은 교회를 우리 인생의 피난처로 삼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성전을 배 모양으로 설계해온 까닭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기 위함입니다. 홍수의 심판에서 노아의 방주는 유일한 피난처였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영혼의 피난처요, 안식처요, 요새요, 구원의 방주입니다. 험한 세상 나그네 길을 사는 인생을 사탄의 유혹과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지켜줄 가장 안전한 피난처요, 요새입니다.

그런데 보다 더 근본적인 피난처요, 요새요, 도피성은 오직 우리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노래하며 고백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셀라). ……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46:1-3, 11)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는 비텐버그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의 토의제목을 붙이면서 종교개혁을 선언했습니다. 로마교황과 천주교회는 루터를 파문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이미 100년 전에 로마교황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야누스를 불에 태워 죽인 적이 있었습니다. 

1521년 독일의 보름스회의(the Diet of Worms in 1521)에서 담대하게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결코 행위의 공적에 있지 않다는 자기의 주장을 펼쳤던 루터는 프레데릭 3세(Frederick Ⅲ, Elector of Saxony)에 의해 납치됩니다. 천주교회가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안 프레데릭 성주가 그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것입니다. 

그후 루터는 변복을 하고 봐르트버그(Wartburg) 성채에서 많은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거기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도 하고 찬송가도 지었습니다. 1527-1529년경 루터는 시편 46편을 읽으며 큰 감명을 받습니다. 그는 지금 봐르트버그의 성벽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강한 성이요, 피난처요, 힘이 되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A mighty For tress is our God, A Bulwark never failing
Our Helper He, amid the flood of mortal ills prevailing
For still our ancient foe Doth seek to work us woe; His craft and pow'r are great;
And, armed with cruel hate, On earth is not His equal.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찬송가 384장, 내주는 강한 성이요)

본래 루터는 독일의 작센지방의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와 가족은 그가 법조인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대학과정의 법학부에 합격을 하고 고향을 방문합니다. 아버지와 가족은 그의 법학부 입학을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1505년 7월 2일 학교로 돌아오는 벌판에서 뜻밖의 폭풍우를 동반한 뇌우를 만났습니다. 같이 가던 친구가 번개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는 땅에 엎디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세요. 그러면 나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St. Anne, Save me! And I'll become a monk).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그에게 경고했습니다. 만일 수도원에 가면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며 모든 관계는 끝날 것이라 했습니다. 루터는 이별의 저녁을 먹고 “Good by”인사를 나누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족과의 이별뿐만 아니라 친구 그리고 바깥세상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두 주일 후에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헌신적인 수도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루터는 그 자신을 더 엄격한 수도사 생활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훗날 회고하기를 “엄격하고 순수한 수도사 생활로 천국 간다면 그것은 나였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런 생활을 더 계속 했다면 나는 철야나, 기도나, 독서와 다른 성서일과로 나 자신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을 것이다.”(I kept the rule so strictly, that I may say that if ever a monk go to heaven by his 
sheer monkery, it was I, if I had kept on any longer, I should have killed myself with vigils, prayers, reading and other work.)

1515년 어느 날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는 중에 바울의 중심사상인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 그런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얻는 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 어떤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요, 은혜의 하나님임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강한 성이요, 나의 방패요, 요새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이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해야 했습니다. 이 진리를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천주교회는 그를 죽이려고 온갖 음모를 다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사탄 마귀는 그를 거꾸러트리려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루터에게 안겨주었는지 모릅니다.

루터와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자마자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열두 살 난 사랑스런 딸도 하나님이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배신을 하고 루터를 비난하였습니다. 천주교회는 끝까지 그를 추적하여 살해하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삶을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그의 힘이 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임을 받는 자로 쓰셨습니다.

지난 11월 4일은 미국의 232년 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날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버락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말하는 짐승처럼 사냥을 해와 노예로 사용했던 백인들은 그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그것도 가문이 좋은 집안에서 자란 흑인이 아닙니다. 

그의 어머니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백인여자였습니다. 케냐 유학생이었던 버럭 오바마 아버지와 결혼하여 버락을 낳았습니다. 1960년대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을 그 여자는 해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흑인과 백인이 사용하는 교실이나, 수도꼭지, 화장실이 따로 있었던 시절입니다. 엄청난 비난과 눈총을 받으며 버락 오바마를 낳았을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 둘의 결혼생활은 얼마 살지 않고 이혼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결혼하여 인도네시아로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거기까지 가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인도네시아 청년과 이혼을 하자 오바마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져서 자랐습니다. 가문의 전통을 따지는 집안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성장과정이었습니다. 그의 불행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고 어머니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 버락 오바마는 더욱 외로웠을 것입니다. 다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내외가 유일한 의지가지였습니다. 외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는 선거유세를 중단하고 이틀이나 병간호를 한 것을 보면 외할머니의 손길이 버락 오바마에게는 가장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외할아버지 내외의 기도와 정성이 버락 오바마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버락 오바마가 지난번 쌔들백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나오면서 “Jesus died for me!”(예수님을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라며 목이 메이는 듯한 음성으로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외로움과 환난 속에서 예수님에게서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의 피난처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힘이십니다.”고 노래하였을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오늘도 여러분 곁에서 “나는 너의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이 높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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