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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앞에 길이 있다 (삿 18:4~6, 요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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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앞에 길이 있다 (삿 18:4~6, 요 14:4~6)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Shackleton)은 아문센과 스콧이 남극점을 정복한 뒤인 1914년 대원 27명을 데리고 남극대륙의 횡단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극대륙 횡단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남극해에 진입하지말자 얼음 사이에 갇혀 배가 파괴되었습니다. 섭씨 영하 8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2년 뒤, 때로는 얼음산을 오르고, 보트로 거친 남극 바다를 항해한 끝에 탐험대 전원이 생환했습니다. 얼음과 땅과 바다를 2,000 킬로미터나 헤맨 다음이었습니다. 그 때 선장인 섀클턴의 행동지침이 훗날에 알려졌습니다. 그 지침의 첫째가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섀클턴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자고 대원을 독려하였던 것입니다.
  
1909년 세계 최초로 북극점을 발견한 미국의 탐험가 로봇 피어리(Peary)의 묘비에 새겨진 그의 좌우명은 이렇습니다. “나는 반드시 길을 찾을 것이고, 없으면 만들 것이다”(I shall find a way or make one). 길을 찾고 만드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찾으며 성공하는 인물이 됩니다.
  
똑같은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으며 어떤 배들은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들은 서쪽으로 갑니다.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의 방향입니다.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다 다르게 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방향은 다 달라집니다.
  
성경에는 광야가 많이 등장하여 익숙한 장소입니다. 광야의 특성을 아시지요? 첫째로 광야는 황량합니다. 생산이 없는 곳입니다. 둘째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셋째는 위험한 곳입니다. 넷째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보세요. 40년 동안의 광야생활 가운데서 길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밝히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불과 구름 기둥을 못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에 밤에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고, 낮에 불기둥으로 인도하였다면 아마 잘 보이지 않아서 인도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길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명합니다.
  
이사야 43:18에서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리라, 사막에 강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광야에 길이 있으면 광야가 아닙니다. 사막에 강이 있으면 더 이상 사막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시는 길은 모든 사람이 따라 올 수 있을 만큼 확실합니다.
  
성경에는 ‘길 잃은 양의 비유’가 있습니다. 왜 양은 길을 잃었을까요? 어떻게 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왜 양이 주인을 잃었다고 하지 않고, 집을 잃었다고 하지 않고, 길을 잃었다고 할까요? 길을 잃으면 집도 잃고, 주인도 잃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길을 잃는 것은 집을 잃는 것이고, 주인을 잃는 것입니다. 길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길이 없어서 길을 잃습니까? 아닙니다. 길이 있지만 길을 잃습니다. 때로는 너무 길이 많아서 길을 잃습니다. 또 때로는 길을 벗어나서 가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욥기 28:26에는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고 합니다. 욥기 38:25에는 “우레와 번개의 길을 내어 주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에는 길이 있습니다. 우레도 번개도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에게 길이 없을까요? 인간은 그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합니다. 어떤 이는 출가하여 고행을 합니다. 어떤 이는 책을 파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사물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길이 있지 않습니다. 길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가 가는 길을 물어 보아야 합니다.

5절에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길을 물어보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 옛말에는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고 합니다. 길을 묻는 지혜는 길을 아는 지혜에 버금갑니다. 길을 모르면 물어보면 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태초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옛날 성경에는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고 번역했습니다. 태초에 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태초에부터 길이 있었습니다. 태초에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는 말씀과 부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혼돈하고,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바람에게 길이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길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길을 알고 길로 다닙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예수님께서 “네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 때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해답을 주십니다. 도마는 길을 물어보았고, 예수님은 그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 묘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시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 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가수 짐 밀러는 “성공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공사 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완성된 길입니다. 확실한 길입니다.
  
잠언 16:25에는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 있게 갑니다. 어떤 이는 힘차게 갑니다. 어떤 이는 바른 자세로 갑니다. 그런데 이런 길이 하나님 보시기 바르지 않고 그릇된 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든지 가는 길을 물어보고 바르게 가야 합니다.
  
시인 윌러스 스티븐스는 “세상 안의 길이 세상 밖의 길보다 찾기가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의 길을 바르게 찾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정글 한복판을 탐험하며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가이드는 키가 큰 잡초와 무성한 덤불을 칼로 자르며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아무리 가도 끝도 없어 보이는 정글입니다. 그는 더위와 피로에 지쳐 말합니다. “여기가 어디요? 도대체 어딜 가는지 알고나 가는 거요? 길은 어디 있소?” 노련한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길입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가들은 세르파를 데리고 갑니다. 그 곳의 길과 지형에 익숙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험한 산을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누구도 길은 아닙니다. 길을 안다고 하지만 그들도 길을 잃습니다. 길을 알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길을 잘 아는 그들도 자칫 죽기도 합니다. 자기가 길이라고 외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참 길을 물어보세요. 진짜 길을 찾아야 안전합니다. 길을 물어보면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어디가 길이냐? 어디가 길이냐?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내가 곧 길이라. 내가 곧 길이라”. 복음성가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어디가 길이냐?” 물어 보세요. 예수님은 반드시 대답하십니다.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길을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7:13-14에는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길을 묻는 자에게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 길은 길이 아닌 듯이 보일만큼 좁고 불편합니다.


둘째, 여호와 앞에 있는 길은 평안합니다.

6절에는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호와 앞에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평안합니다. 세상에서의 길은 좁은 길이고 좁은 문입니다. 찾기 힘든 길입니다. 가기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길은 넓고 환한 길입니다. 평안한 길입니다. 계시록 21장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를 보세요. 성곽은 온갖 보석으로 지어졌습니다. 열두 문은 진주로 되어 있습니다.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깔려 있습니다. 맑은 유리 같은 정금 길, 이 길을 못 찾을 리가 있습니까? 이 길이 좁을 리가 있습니까? 이 길이 평안치 않을 리가 있습니까?
  
신명기 1:33에는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확실하게 인도하십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십니다. 잃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의 여정을 보세요. 평안의 길이었습니까? 2차 전도여행은 원래 그가 계획하고 있던 길이 아니라 반대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평안한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좋은 길이 아니라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의 영이 막은 그 길이 가장 평안한 길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이 로마로 가던 항해를 보세요. 백부장이 가장 좋아보이던 때를 선택하여 갔습니다. 가장 좋은 길 같아 보이지만 반입니다. 가장 불편한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혈관은 혈액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사람 몸의 혈액은 몸무게의 약 13분의 1이라고 합니다. 혈액 순환은 심장을 나와 허파를 돌아서 다시 심장으로 들어가는 폐순환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순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허파 이외의 온몸을 도는 체순환이 있습니다. 이것을 대순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혈액은 질서 있게 돕니다. 길이 정확합니다. 하루에 약 27만 킬로미터를 여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너무 정확합니다. 이리 돌았다 저리 돌았다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 길로, 한 방향으로 정확하게 여행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명확하게 알고 가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는 길은 평안의 길입니다.
  
‘윤형방황’(輪刑彷徨)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자리를 맴돌며 방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년 전 중앙아프리카에서 행방불명된 59세 등반가가 13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과일과 풀뿌리로 연명하며 하루 12시간씩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잃어버린 장소와 발견한 장소는 약 6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12일 동안 12시간씩 걸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약 250킬로미터를 걸은 샘입니다. 길을 모르면 방황합니다. 목표점을 가까이 두고 같은 자리를 맴돌아 다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눈을 감은 채 걸을 경우 20미터 직선거리는 겨우 4미터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100미터를 넘으면 원을 그리며 걷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길이란 정확하지도 못하고 평안하지도 못합니다.
  
창세기 24:48에는 엘르아살이란 아브라함의 종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그의 길을 바르게 하신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감사의 시인 시편 107:7에는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고 합니다. 하나님 인도는 안전합니다. 확실합니다. 어떻게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길을 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신학교에 다닐 때에 광나루 학교 아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루 밤은 얼마나 안개가 많이 끼었는지 정말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들이 아예 가지를 못하고 서 있기도 했습니다. 광진교로 향하는 길은 갓길이 없고 약간 언덕이 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택시가 길이 보이지 않고 아주 천천히 갔는데도 길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깊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야 그 차를 끄집어냈습니다. 오래전 제가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캘리포니아 LA에서 북쪽으로 가는 5번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5번 고속도로 북 캘리포니아 쪽에서 갑자기 모래폭풍이 불어 60대 이상의 차들이 추돌사고를 냈습니다. 차들이 이리저리 뒤엉겨 수습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길이 있지만 보이지 않으면 사고가 납니다. 길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길은 더 위험하고 불편합니다.
  
지금 세계경제에 길이 안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도, 경제도, 안보도, 외교도 길이 안 보입니다. 여러분은 길이 안보여 걱정입니까?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정책을 잘 하고 있다는 말도 들립니다. 이대통령이 아니면 이보다 더 큰 위기가 닥쳤을 것이고, 많은 대기업도 부도가 났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여호와가 길입니다. 정치와 경제의 길을 여호와께서 아십니다. 여호와가 길이시기에 모든 길은 여호와께로 향합니다. 걱정하기보다 여호와께 의지하고 맡기세요. 그분이 길을 예비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입니다. 영광이 빛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시온의 대로가 열려 있습니다. 이 길을 좇아가면 평안입니다. 승리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고백합니다. 골짜기라도 높은 산이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평안합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함께 찬송할 수 있습니다.
  
시편 37:5에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라고 합니다. 우리 길을 내려놓으면, 맡기면,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평안케 하십니다. ‘맡기라’는 히브리어 ‘갈랄’로서 문자적 뜻은 ‘옮기다’, ‘굴리다’, ‘신뢰하다’라는 말입니다. 맡기면 평안합니다. 안전합니다. 형통합니다.

결론

지난 월요일 아침 논현동 고시원 방화사건 희생자 합동 발인예식에 참석했습니다. 희생자 6명 가운데 3명이 중국교포입니다. 한 희생자의 남편이 장례식 도중 한국교회에 감사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예수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공산당원도 있습니다. 그 분은 “인민의 영도는 오직 공산당이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하고 하며 기독교는 달콤한 사탕발림에 불과한 줄로 알았는데 한국에 와서 자신들을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밤을 새는 목사님들을 보며 기독교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희생자 유족들에게 3천만 원씩의 위로금을 드렸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분명한 길을 가르쳐 준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 2:36에는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입니다.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길을 바꾸면 수치를 당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당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신앙, 우리 교회를 절대로 바꾸지 마세요. 바꾸면 수치를 당합니다. 여호와 앞에 있는 길, 그 길을 찾읍시다. 찾은 그 길을 바꾸지 맙시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가서 하늘나라 문에 도달하는 복된 우리의 여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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