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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카운트다운 (시 3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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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카운트다운 (시 39:1~7)

여러분, 혹시 랜디 포시(Randy Paushy) 라는 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카네기멜론 대학교 교수였는데, 지난 7월에 47세의 나이로 별세한 분입니다. 그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에도 절망하지 않고 밝고 진지한 모습으로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지만 그가 행한 「마지막 강의」는 인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의가 동영상과 책으로 만들어져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특별히 그 책은 출간되자마자 대번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가는 진기록을 남겼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의 강의와 책에 큰 감동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그가 시한부 인생으로 살았지만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인생에 대해 진솔한 태도를 갖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현실이 그에게 ‘인생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을 알아야 인생의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잘 모른 채 살아가는 우매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에 관해 무관심합니다. 심지어 죽음에 관해 언급하는 것조차 터부시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반드시 죽음이 찾아옵니다. 지금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각자의 인생에 필연적적으로 닥칠 현실입니다. ‘남의 현실’이 아니라 ‘나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사냥꾼이 꿩을 잡으려고 추격합니다. 꿩이 막 달아나다 수풀을 발견하고는 “이젠 됐다”며 수풀 속에 얼굴을 처박습니다. 꽁지는 여전히 밖으로 비죽 나와 있는데 안심합니다. 곧 사냥꾼에게 잡혀 죽음을 맞이할 줄도 모르고 안심하는 꿩의 모습!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은 ‘안심’이 아니라 ‘한심’한 겁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진지하고 지혜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죽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이 바쁘고 분주하지만 잠시 멈춰서라도 그래야 마땅합니다. 

세월의 신속함을 새삼 느끼는 계절입니다. 벌써 11월이 되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지고, 가로수의 나뭇잎은 짙게 물들어 가고 한잎 두잎 낙엽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계절에 무감각하게 지나가지 말고 인생의 진실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의 ‘임종시’(臨終詩)라고 할 수 있는 시편 39편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깨달은 인생의 진실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고, 남은 생애 더욱 아름답고 복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다윗이 임종을 앞두고 병을 앓으며 지은 시가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그는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참회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 ‘임종시’인 동시에 ‘참회시’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 참회하는 것은 아닙니다.(cf. 시편 51편은 밧세바를 범한 후 참회하며 지은 시) 그저 인생을 전체적으로 회고하면서 자신의 생애가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새삼 절감하는 의미에서 참회하는 참회시(懺悔詩)입니다.

돌이켜 보면 다윗의 인생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어린 시절엔 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목동으로 고달픈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무엘 사사 겸 제사장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그때가 대략 B.C. 1025쯤 됩니다. 그 후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쳐부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울 왕에게 뽑혀갑니다. 많은 공을 세우며 사위까지 됐지만, 정적으로 몰려 10여 년 핍박 받으며 망명 생활을 하게 됩니다.(B.C. 1020~1010)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된 후에는 약40여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B.C. 1010~971)그가 왕이 된 후 부귀영화도 있었지만, 모든 인생이 그렇듯이 여전히 고난과 시련도 있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표현해서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최고 정상까지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이제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앞에 닥쳐온 죽음 앞에 마음이 울컥 하며 인생의 진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고초를 이기고 왕이 되어 나라를 강국으로 건설했지만, 자신의 질병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무능력과 초라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인생의 진실이라는 겁니다. 


[1] 인생의 본질 : 인생무상 

다윗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인생무상’입니다. 5절을 봅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여기서 한 뼘 길이란 최소의 길이 단위인데, 엄지를 뺀 네 손가락의 길이로 약7.5cm쯤 됩니다. 하도 짧아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죠. 1년이나 10년의 시간과 비교해 볼 때 10분이 긴가요? 짧죠. 30분은요? 60분은요? 80분은요? 모두 짧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30년을 살든 90년을 살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 5장 보면 많은 사람들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 당시는 노아 홍수 이전이라 기후가 온난하고 수명이 길었습니다. 보통 수백년씩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 므두셀라입니다.(창5:25~27)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 기록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가 자식 낳고 살다가 죽었다는 게 전부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놀랄 만큼 오래 살았는데 그래봤자 별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인생이기에 든든히 서 있는 때 즉 전성기조차 별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모두가 허사라는 겁니다. 여기서 허사라는 말은 원문을 보면 히브리어로 ‘헤벨’(lb,h)인데, ‘입김’ 혹은 ‘호흡’(breath)이란 뜻입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 단어는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거듭 사용한 단어입니다. 전1:1~4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솔로몬이 세상의 온간 부귀영화를 누려보았지만 별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입김처럼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인생은 무상하고 땅은 영원하고 ... 그런데 사실은 인생에 비해 땅이 장구하다는 뜻입니다. 이 땅도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만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 역시 뭐라고 말씀합니까?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인생은 풀처럼 덧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생의 부귀영화는 풀 위에 달린 꽃처럼 쉬이 스러진다는 겁니다. 문자 그대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순간순간 세상에서 살아갈 때는 대단한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면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해 보셨죠? 이사 갈 때 짐을 펼쳐 놓을 때 구석에 처박혀 있던 물건들이 나타납니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때는 정망 애지중지했던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빛바랜 고물이 되어 있고,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겁니다. 또 이런 것도 눈에 뜨입니다. 착항 시절 받은 상장이나 메달, 트로피 등입니다. 당시에는 감격하고 환호성을 질렀을 텐데 빛이 바래고 구겨져 있습니다. 이사 가면서 버리기도 하고, 다시 싸가기도 하지만 이미 시들합니다. 나 자신도 그럴진대 내 자식들이 챙겨줄까요? 내 후손들이 챙겨줄까요? 쓰레기통에 벼려지겠죠. 조금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은 고물장수에게 넘겨질지도 모릅니다. 고물장수 좌판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관심을 보이며 혹 값을 물으면 아마 고물장수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아, 그거요? 1천원만 주쇼.” 인생의 영화라는 게 다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젊다고 건강하다고 뭐가 좀 있다고 큰소리칠 게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다 보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나이에 비해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특히 병원을 자주 가고(제가 아파서 가는 것보다 성도들 심방하느라), 장례식장이나 묘지 혹은 화장터를 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 인생이 얼마나 무상한지 절감하게 됩니다. 한번은 성도 중 한 분이 병이 위중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에 급시 달려가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직원들이 와서 흰 천을 엎더니 황급히 영안실로 인도합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착잡한지 몰랐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슬펐습니다. 그런데 바로 아래층 응급실로 환자가 실려 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나가고 산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으로 들어오고 ... 또 화장장에 가 보면 영구차가 수시로 들어옵니다. 영정의 주인공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인생은 바로 이런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인생이 너무 가엽습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인생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그럴수록 인생을 지혜롭게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는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이렇게 짧고 이렇게 아까운 인생이 바로 나의 인생이기에 엄벙덤벙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2] 인생의 자세 : 나그네 의식, 최선의 삶, 영원한 가치 추구 

그러면 이렇게 덧없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게 과연 지혜로운 인생의 자세일까요? 나그네 인생임을 의식하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해야 됩니다. 

① 나그네 의식 : 

다윗은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은 생애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자신의 인생이 언제 끝날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해달라는 겁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인생을 마칠 때를 잊지 말고 기억하게 해 달라는 기원입니다. 

그는 이어서 12절(중) 보니까 이렇게 고백합니다. “ ...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인생은 떠도는 나그네라는 겁니다. 조상들만 그런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든 인생도 그렇다는 겁니다. 다행히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천국의 소망이 있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서의 삶은 흘러가는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말게 해 달라는 겁니다.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인생을 다 이렇습니다. 남은 날을 계수(number, count)할 줄 압니다. 그래야 남은 날을 진지하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라톤 경주자와 같습니다. 풀코스 42.195 km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남은 코스를 헤아리며 작전을 세우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모세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90:10,12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남은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카운트다운’(Countdown)하는 겁니다. 로켓을 발사할 때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텐, 나인, 에잇, 세븐, ... 쓰리, 투, 원, 제로!” 이렇게 떠날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② 최선의 삶 : 

나그네 의식이 없으면 일상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그네 의식을 갖고 인생의 카운트다운을 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합니다. 

다윗은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6절 보세요.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 하나이다” ‘그림자’는 원문에 보면, 히브리어로 ‘첼렘’(!l,x)인데, ‘허상’ ‘환상’(phantom) 이란 뜻입니다. 무언가 하면서 동분서주하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재물을 쌓아놓고도 못 쓰고 간다는 겁니다. 세상의 권세를 얻어도 금세 권좌에서 내려오고 맙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의미 없이 흘러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80세 된 사람이 지나온 80년간의 삶을 분석해 보았다고 합니다. 철없이 살았던 시간 15년, 잠자는 시간 26년, 일하는 시간 21년, 먹는 시간 6년, 화낸 시간 6년, 남을 기다리는 시간 5년, 수염 깎는 시간 228일, 욕하며 보낸 시간 26일, 넥타이 매는 데 보낸 시간 18일, 담배 피운 시간 12일, 그밖에 이것저것 따지고 보니 정말 의미 있게 살았던 시간은 46시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또 75세 된 다른 사람의 생애를 분석해 보니까 잠자는 시간 20년, 일한 시간 20년, 노는 데 허비한 시간 7, 먹는 시간 6년, TV 본 시간 5년, 옷 고르고 쇼핑하느라 보낸 시간 5년, 사람 만나고 기다리며 보낸 시간 3년, 화장실에서 보낸 시간 2년, 잡 생각하느라 보낸 시간 2년 반, 커피 마시느라 보낸 시간 2년, 전화 받은 시간 1년 ...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인생 가운데 정말 후회 없이 뿌듯해 할 수 시간이 얼마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엡5:16~18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세월을 아끼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최선의 삶입니다. 영어성경(NIV)을 보면 ‘기회를 선용하라’(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영어성경(KJV)을 보면 ‘시간을 구속하라’(redeem the time)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영원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시간의 무덤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런 시간을 영원한 시간으로 살려내라는 겁니다. 두고두고 천국에서도 기억되고 칭찬 받을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이런 삶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죄악이나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고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옛날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 나이 28세였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 이렇게 정했습니다. 알고 있던 가적이나 친구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 데 2분, 오늘까지 살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는 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벌써 눈에서 주르륵 흐릅니다. 가족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금세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다음 순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려고 하는데 얼마나 후회막심한지! 그 때 황제의 특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려 당도합니다. 

결국 사형 집행이 중지되고 그는 새로운 사람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에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사형수의 이름은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ii 1821∼1881)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는 인생의 순간순간 하루하루 최선의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엄벙덤벙 넘어갑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늘 자책만 합니다. 이 가을에 다시 한번 우리 마음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최선을 다해 세월을 아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세상의 욕심에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함으로 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③ 영원의 준비 :

우리 인생은 무상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도 영원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7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덧없는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인간은 다 죄인이요 그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롬3:10 “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결과로 인간이 영적으로 죽고, 육체적으로 죽고, 더 나아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하는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십자가는 지옥의 예고편입니다. 그 모진 고통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내 대신 지신 겁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더 이상 심판받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인생이 유한하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이 더 이상 해당되지 않습니다. 순간을 살아도 영원으로 연결됩니다. 그게 바로 ‘산 소망’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다. 성취하기 전에는 실망하고, 성취한 후에는 허망해집니다. 그러나 영생 얻은 성도들의 소망은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집니다. 

벧전1:3~4 “3 ...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천국의 기업을 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과 재화들을 영원한 것으로 교환해야 합니다. 교부(敎父) 오리겐(Orige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재화를 천국의 재화로 바꾸는 환전상이다!” 세상의 시간은 흘러가지만 세상의 재물은 사라지지만,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 재능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사용한 것은 영원히 천국까지 그 가치기 보존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카운트다운을 해야 될 시간입니다. 인생의 카운트다운을 할 때도 됐습니다. 이 계절에 분주했던 일상을 잠시 멈추고 다윗의 시편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다가올 죽음을 무시하지 말고 직시하면서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새생명축제」가 바로 그런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과 이웃들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을 각자 아름답고 복된 생애, 영원한 생애로 가꾸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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