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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을 추적하시는 하나님 (욘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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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추적하시는 하나님 (욘 1:7~10)

하나님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몰라서 우연처럼 보일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분은 만물을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성도가 재수나 팔자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 나는 재수 없는가 봐!” 또는 “나는 운이 안따라 주는 가봐!” 어떤분은 그런말을 합니다. “목사님 나는 팔자가 사나운가 봅니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룻기에 보면 룻이 이삭을 주우러 밭으로 나갔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가서 이삭을 줍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서 때어난 증손자가 다윗입니다. 

또 이스라엘 왕 중 우상을 섬기던 왕이 있었는데 그중에 우상을 가장 많이 섬기던 왕이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22: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북쪽 나라 이스라엘 아합왕과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이웃 나라 아람과 전쟁을 합니다. 그때 아합왕이 꾀를 냅니다. 자기만 살려고 여호사밧 왕에게 왕복을 입게 하고 자기는 일반 군사로 위장을 합니다. 그런데 아람 군사가 쏜 화살이 ‘우연히’ 변장을 한 아합 왕에게 맞습니다. 결국 그 전쟁터에서 죽게 됩니다. 그것도 정말 우연처럼 보여요. 그러나 우연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입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연처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우연히 일이 일어나고 사건이 만들어 집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남편을 만난것이 우연일수 있고 여러분이 그 회사에 들어간것도 우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도 그렇습니다. 

지난주 살펴본 욘1:4에“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했습니다. 요나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어찌 보면 우연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연이 아니었고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시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신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었습니다. 또 오늘 봉독한 본문에 요나가 제비에 뽑힌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의도하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처럼 의도적으로 요나를 코너로 몰아가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죄악과 그의 잘못된 생각, 편견과 오해를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은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들은 이방인이기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편견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고집부리고 불순종하여 도망치는 요나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추적하시어 그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게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열심히 있고 여기에 구원의 열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봉독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1. 하나님은 불순종의 죄인을 끝까지 추적하여 회개케 하신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죄입니다. 죄 중에도 가장 고약한 죄는 교만으로 인한 불순종의 죄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이 불순종의 죄를 지으면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실 때 마지막 시험은 순종 시험입니다. 거기서 합격하면 온갖 복을 다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 시험도 그랬고 나아만 장군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자기를 앞세우고 불순종하면 탈락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범죄를 계속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내리지 않으시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길이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버림받은 백성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시다가 중학생들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대부분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한마디씩 하겠지요? “뉘 자식인지 모르지만 속깨나 섞이는 놈들이구먼”하고.... 

그러나 그 가운데 여러분 아들이 들어 있다 합시다. 그러면 어찌 합니까? 그때도 뉘자식인지 모르지만 ... 하고 그냥 지나갑니까? 아니지요. 당장 붙들어다 요절을 낼 것입니다. 왜요?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고 각종 죄를 지어도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이 그 짓 하면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당장 매를 듭니다.  

그래서 잠 3:12에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로마서1장24~25절을 보세요.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백성들은 죄를 지어도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들 앞에는 결국 무서운 지옥 심판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당신의 자녀들은 그냥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뭡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지으면 끝까지 죄인을  추적하고 그 죄를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냥 포기하고 내어버리고 말텐데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추적합니다. 그리고 망신을 당하게 해서라도 돌아서게 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을 보세요. 
배에 풍랑이 닥치자 선원들이 백방으로 노력해 봅니다. 자기들의 신에게 부르짖기도 하고 소중한 화물과 물건을 바다에 던지기도 하여 위기를 벗어나려고 해보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어떤 한 사람의 제안으로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닥치는 것인지를 알아보자 하여 제비를 뽑습니다. 그 배에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추축하건데 다시스까지 항해하여 가는 배라면 상당히 큰 배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배에 적어도 100명 이상의 선원과 승객이 탔을 텐데 그 제비가 요나에게 뽑힙니다. 확률상으로 상당히 가능성이 낮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뽑힙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만든 의도적 사건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요나는 놀라야 합니다. 깨닫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도망치는 것 때문에 풍랑을 겪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아주 뻔뻔합니다. 제비를 뽑아 자기가 원인 제공자임이 들어 났는데도 자기 죄는 숨깁니다. 

8절을 보세요.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런데 요나 대답은 뭡니까? 9절을 보세요.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는 히브리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런데 10절을 자세히 보면 좀 뻔뻔합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고”고 합니다. 

하나님을 피하는 것은 말하는데 왜 도망치고 있는지는 말 안합니다. 그리고는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죄를 회개치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큰 태풍이 몰아닥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진정하는 회개는 자기의 죄를 들어 내야 합니다. 그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아닙니다. 
두 손 들고 “하나님! 니느웨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회개합니다. 

성도 여러분!  
고집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고도 나는 괜찮을 거야 하고 고집부리고 그 길로 계속 가면 머지않아 대풍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치 않으면 사람들에게 온갖 망신을 다 당할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치 않고 있으면 오도 가도 못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죄를 그냥 통과시키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속히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나의 회개는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던 길을 돌려 니느웨로 가겠다고 하면 풍랑은 곧 잔잔해 집니다. 다시스 가봐야 알아주는 사람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곳에 가면 돈깨나 벌고 떵떵 거리며 살 것 같나요? 포기하세요. 제비 뽑혀 망신당하기 전에 두 손 들고 돌아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추적을 피할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편 139편7~10절을 보세요.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디라도 쫓아가 붙잡으시고 붙들어 인도하실 것입니다. 


2. 영혼구원을 포기하는 것은 무서운 직무유기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먼저 구원하셨을까요? 왜 이 시대에 實力있고 能力있는 사람이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우리를 먼저 구원하셨을까요? 우리에게 영혼구원을 맡기시기 원해서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뽑으신 이유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통해 그 땅에 복음이 전파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들을 쓰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먼저 부르신 것도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그 섭리와 계획을 발견하시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나가 도망을 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 생각하고 맞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는 니느웨 이방인 놈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영혼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요나서는 구약의 사도행전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곳곳에서 이방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여리고 기생 라합도 구원 받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 룻도 모압 족속이지만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요나서에서도 하나님은 니느웨의 12만명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인 요나는 자기 생각을 앞세워 그 영혼 구원 사역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도망을 칩니다. 이것은 엄청난 직무 유기입니다. 

직무유기가 뭡니까? 자기의 일을 포기하거나 그 일을 수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벌을 받습니다. 우리나라 형법 제7장 제122조에 의하면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없이 그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그 직무를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3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 공무원도 직무를 유기하면 엄벌에 처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종인 저와 여러분이 직무 유기를 하면 하나님은 그냥 두질 않습니다. 

에스겔 33장1~7절의 말씀을 보세요.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3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4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5 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6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무슨 말입니까? 파수꾼이 나팔을 불어 자기 직무를 다했는데 백성들이 정신을 안차려 칼레 죽으면 그 피가 자기 머리에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직무를 유기하여 나팔을 불지 않아 백성이 칼에 죽으면 그 죄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겠다고 하십니다. 

여기 파수꾼은 오늘날 우리 전도자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남편이나 가족이나 이웃에게 예수 믿으라고 나팔을 불었는데도 안 믿으면 그 사람의 죄를 그 사람에게서 찾지만 안 불어 그들이 지옥가게 되었다면 그 책임을 여러분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듣던지 말든지 전해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하신 딤후 4:2의 말씀처럼 전파해야 합니다. 

항상 힘써야 합니다.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야 합니다. 그것이 직무유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참 회개는 죽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는 것이다. 

요나가 회개치 않으니 바람은 더 거세게 불고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집니다. 그때 선원과 승객들이 요나에게 찾아와 묻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열쇠는 다른 사람이 아닌 요나에게 있습니다. 이시대의 문제의 열쇠는 이 시대의 요/나/인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와 어쩌면 좋겠냐고 물어봅니다. 

그때 요나는 극단적인 답변을 합니다.  
12절을 보세요.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합니다. 

알기는 압니다. 그런데 문제의 완전한 해답은 아닙니다. 
바다에 안 던져도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극단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져라” 이것은 완전한 해답이 아닙니다. 

요나가 죽으면 그 배는 잔잔해 질 수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문제는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죽는다는 것은 ‘자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존심 좀 죽이고 혈기 좀 죽이고 내 고집을 죽이면 됩니다. 

부부사이에서 갈등과 아픔도 한사람이 죽으면 됩니다. 고부간의 갈등도 한쪽에서 죽으면 조용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살아 있으니 문제입니다. 옆 사람에게 말하세요. “요/나/가 문제입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죽겠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하나님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끝을 내질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은 좀 코믹하고 익살 맛은 데가 있다고 봅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여 달라”는 요나에게 “그래 한번 죽을 맛을 볼래?”하고 그냥 죽여 버리지는 않고 물고기를 준비시켜놓았다가 뱃속에 집어넣어 죽을 맛을 보게 하십니다.  

상상해 보세요. 요나 물고기 뱃속, 온갖 가스냄새에 꼼짝 달싹 못하는 어두캄캄한 상항에 진짜 죽음을 맛보는 상황입니다. 
“날 잡아 잡수쇼” 하는 요나에게 죽음의 맛을 살짝 보여 주는 하나님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지옥의 고통일 것입니다. 거기서 요나가 손을 듭니다. 

잘못되었다고 느끼거든 속히 돌아서면 됩니다. 회개가 뭡니까? 돌아서는 것입니다. 悔改란 느끼고 고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했을 때 영어 성경은 Repent 라는 단어도 썼으나 어떤 성경은 “Turn back to God” 이라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주권 안으로 돌아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차를 잘못 탔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차를 갈아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기차 안을 청소하고 노약자를 도와주며,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사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가려던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회개는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잘못되었다고 느꼈으면 속히 돌이켜 죄의 기차에서 나와 갈아타야 합니다. 갈아타지 않으면 그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집나간 탕자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만약 “아 내가 잘못 했구나” 거기서 그치면 회개가 아닙니다. 

“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 하고 발걸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죽는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제발 자살할 생각하지 마세요. 
자살은 문제 해결책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냥 잘못되었음을 알고 손들고 “니느웨로 가겠습니다.” 외치면 됩니다. 그리고 항로를 바꾸거나 배를 갈아타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 됩니다. 

여러분 앞길에 풍랑이 계속됩니까? 
그 이유가 혹시 여러분이 도망중이기에 멈추질 않는 것 아닙니까?  
요나서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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