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입문(入門)하는 사람 (마 7:7, 고후 5:18, 요 10:9)

  • 잡초 잡초
  • 212
  • 0

첨부 1


입문(入門)하는 사람 (마 7:7, 고후 5:18, 요 10:9)


이 세상에는 많은 문이 있다. 성공의 문도 있고 멸망의 문도 있다. 지옥의 문도 있고 천국의 문도 있다. 우리는 올바른 문을 들어가야만 자기의 이상과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다. 올바른 문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문을 찾은 뒤에 그 문 안으로 들어서는 일도 중요하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문이 있는데 배움을 위해서나 직업을 갖기 위하여 거쳐야 할 문이나 어떤 자격을 얻기 위하여 통과해야 할 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쉬운 문도 있고 보통 노력으로는 통과하기 어려운 문도 있다. 

그리고 사람이 열기 어려운 문은 사람의 ‘마음의 문’ 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문을 여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어야 함도 아는 것이다.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는 생활공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의식주의 공간으로 집의 문도 있다. 집은 생활하는 가족이 함께 자고 먹고 지내는 동안 가족의 공동체로 훈훈한 사람이 대화로 관계하고 사는 가정이 사회의 모범이요 사회구성원의 뿌리가 된다. 그 가정의 화목은 집에서 삶을 나누며 한 식구로 함께 잠을 자고 먹으면서 대화를 하는 삶을 살아가는 공간에서 삶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고로 집은 곧 화해의 근본을 알게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가 이 말을 증명한다. 

성서의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는 말씀은 삶의 길(道)을 구하고 그 진리를 찾고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데 문이 저절로 열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우매한 일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자’ 라는 말은 문이 열리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시간이 가면 된다.’는 식의 매우 애매한 발상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의 생활습성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만한 성의를 가지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하고 지나가다가 심심풀이로 문을 두드리고 있는지 열어 주면 좋고 안 열어 주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를 알게 한다. 또한 문을 두드리는 것이 ‘하면 된다’는 가능성의 믿음으로만 실현하려는 어리석음도 주의해야 한다. 

즉 믿음의 만능으로 산을 들어 바다에 옮겨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음만으로 성사를 가지려 한다면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의 질서를 어기는 결과에서 오는 재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책임지는 지혜로 구하는 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입문(入門)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전문직이나 신앙이나 무슨 일이나 그 일에 종사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지속력을 가지지 못한 끈기가 없는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문이 있다. 문이란 어떤 목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문에 대한 의미는 생각하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 물리적인 문은 공간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만든 것으로 대문이나 창문, 현관문 그리고 쪽문, 뒷문, 방화문(防火門)이나 성문(城門) 같은 것도 있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면서 수많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왔다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할 때에는 그 나라의 관문(關門)을 통과해야 입국하고 나갈 때는 절차를 밟아 출국하게 된다. 

하물며 ‘생활하는 문’에 들어가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닫고 하며 삶을 살아가는데 서로의 이해타산과 자기가 주장하는 의사(意思)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싸우고 반목하며 원수처럼 살아가는 세태(世態)도 보는 것이다.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어려운 문이 있다. 세상사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자기가 가는 길에 문이 다 다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문(門)은 ‘마음의 문’을 찾아 열어야 한다. 세상의 평화와 행복한 삶을 위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많은 장벽을 헐기 위하여 ‘마음 문’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면 문을 여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시대의 키워드는 한 단어에 압축된다. 그것은 2008년 대한민국의 정치적 화두로 “소통”이라는 말을 듣는다. 소고기 파동으로 인한 대화의 부재는 그 후 계속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한국 사회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미국을 위시한 금융경제 위기가 세계와 한국의 경제를 파국에 몰고 있다. 

이로 인한 많은 이들이 갈등을 유발하고 각기 다른 문으로 지향해 가고 있다. 이러한 삶의 현장에 서로를 대적하고 반목질시(反目嫉視)하는 곳에 화해의 문을 열어야 함을 알게 한다. 화해를 위한 ‘소통’은 우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여기에 “소통”(疏通)이라는 말은 문이 닫히지 않고 잘 출입(出入)함을 말한다. “불통”은 문이 닫히어 있어 통하지 못함에 있다. 이것은 문이 ‘열림’과 ‘닫힘’의 차이인 것이다. 

이 극복은 ‘다른 사람과 내가 공통점을 찾아서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그 열쇠로 문을 열어야 한다. 그 소통의 빗장을 여는 열쇠는 사랑이다. 사랑을 갖기 위해서는 한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삶의 목적이 서로 사랑하고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화평케 하는 것이 사회가 평정(平靜)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인 것이다. 

한 가족의 식구는 한 공간에서 삶을 서로 나누며 삶을 같이 대화하는 가족이다. 그래서 한 공간의 가족의 식구는 소통의 빗장을 여는 열쇠를 다 같이 공유한다.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상은 더욱 넓어 보인다.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세상은 내게로 다가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사람의 존재를 식구(食口)(가족)로 하는 부모와 형제같이 사실로 알고 우애(友愛)를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몸속에 영혼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하는 삶의 조건으로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사람을 대화하고 마음으로 사귀고 사랑하면 닫힌 마음이 소통하는 것이다. 사랑은 열린 문이다. 사람의 열린 마음에서 사랑의 싹이 돋아난다. 사랑은 욕심을 내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요 이 나눔을 통해서 굳게 닫혀 있던 마음 문이 활짝 열어진다. 사람의 삶은 때로는 헝클어진 실타래와 같다. 여기에 사랑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엉킨 것을 쉽게 풀어놓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사회의 삶을 가족의 관계로 만드셨다. 그리고 그 가족의 목적은 사랑하고 인간관계를 맺고 화해하며 사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간의 관계회복을 위해 부르셨음을 알게 한다.(고후5;18) 동양의 도덕경 제1장에 ‘신비가 가장 깊은 곳에 미묘와 놀라움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는 말이 있다(玄之又玄 衆妙之門). 이 미묘와 놀라움에 이르는 문은 곧 생명의 종교적 차원에 이르는 문을 말한다. 

성서에서도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도 친히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며 꼴을 얻을 것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예수의 문’을 찾아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고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후로는 사람의 생존은 제한되어 있음을 안다. 그리고 상대적이므로 이에 따르는 허무감이 항상 사람의 삶을 감돌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은 절대자를 발견하고 궁극적으로 이 절대자에게 믿음을 가져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뿌리가 되고 바탕이 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문에 들어가는 구원의 사람’임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생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예수의 문’에 들어가면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알게 된다. 그 하나님은 한 가정의 아버지처럼 사랑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보살피고 돌보아주시는 분으로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가정을 세우고 가정관계의 사랑공동체를 본 받아 사회공동체를 만드신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관계로서 사람의 아버지! 가족의 어른으로서의 ‘사랑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은 결국 구원에 이르는 문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