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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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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금식하지 않는 이유

인간은 하루 일정량의 음식을 먹도록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먹지 않아도 됩니까? 당연한 질문이지만 먹어야 살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면 곡기를 끊는 금식은 정상적입니까? 아니면 비정상적입니까? 네 정상적이 아니지요. 정상적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것은 그만큼 비상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늘나라에 가면 금식이라는 단어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곳은 더 이상 금식할 이유도 없고 ,그런 비상한 상황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식과 단식은 모두 음식을 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쓰임과 목적은 다릅니다. 금식은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고, 단식은 그 외의 다른 종교나 비종교인들의 행위에 사용됩니다. 일반인들이 단식하는 이유는 첫째는 육체적 금욕을 통해서 몸과 정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로 선이나 도를 닦는 사람들, 요즘은 일반인들도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행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투쟁의 도구로 단식을 이용합니다.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결연한 행동입니다. 이슬람은 라마단 중 단식을 통해서 굶주림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이 서로 평등함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또 단식으로 절약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고 합니다. 

성경적 의미의 금식은 이런 단식들과 그 행하는 목적이 분명히 다릅니다. 단식은 철저히 자신을 위하거나 타인을 위한 수단으로 인간중심적인 것이 그 동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금식은 이와는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금식과 단식을 나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금식하는 동기를 보면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애통함과 회개의 표시입니다. 누가 죽었거나 나라나 개인에게 큰 변고가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들은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며 동시에 이런 어려움을 당한 것은 자기들의 죄 때문임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함을 보이며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금식을 행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40일을 금식했고, 다니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21일을 금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심지어 전쟁시에도 이런 금식을 명령하기도 하였습니다. 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금식을 통해서 자기를 비우고 성결하게 하는 행동들입니다.
  
셋째로는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병이나 전쟁에서 구원해주시거나, 고난과 슬픔을 면하게 해달라는 목적에서 행했습니다. 이 세 가지 이유의 금식에서 공통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금식이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의 안정이나 심신의 건강, 자비나 구제는 금식에 의해서 주어진 결과일 뿐이지 처음부터 주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겸비함의 표시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금식하는 목적을 다시 근본적으로 재조정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4) 세례 요한은 광야에 살았습니다. 광야에 살았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의 문명을 끊고 철저히 금욕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욕적인 생활의 일부로서 금식을 자주 행했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아마 그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금식을 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엄밀히 말하면 제사장과 같은 전문적 종교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평신도이지만 율법의 성결한 삶을 일반인들도 행해야 하며 모두가 그렇게 성결한 삶을 살 때 하나님나라가 도래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한 주에 이틀을 금식했다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가장 핵심이 되는 율법을 받기 위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날이 월요일이고 그 내려온 날이 목요일이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일주일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틀을 금식한다는 것은 대단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이 금식이 타성에 박히고 결국에는 자기 자랑거리가 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지 말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하라고 산상수훈에서 교훈하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정반대였습니다. 공생애 3년 내내 먹고 마시며 보냈습니다. 오죽했으면 마태복음 11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평판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였겠습니까?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 하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40일 금식하신 이후를 제외하고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금식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누는 잔치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변론하셨습니까?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실제 그렇습니다. 결혼잔치가 벌어질 때는 어떻습니까? 그때는 정말 기쁜 때입니다.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기뻐합니다. 온갖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온 동네가 떠들썩하고 이 때는 동네 거지들도 배불리 먹는 때입니다. 만약 누가 이 때 금식하며 우거지상을 쓰고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을 것입니다. 

결혼식은 한판 축제입니다. 마음껏 먹고 떠들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고대했던 메시야 입니다. 그 메시야가 이제 이스라엘 땅에 오셨는데 그들이 금식하며 슬퍼해야 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동안은 금식하며 애통했을지라도 이제는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으니 기쁨의 축제를 벌여야 합니다. 주님은 그래서 어디를 가시든지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 기쁨의 축제를 벌였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잘 드러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요 축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늘 기쁨이 넘칩니다. 비록 예수님은 2천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이제는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우리 공동체 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기적을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것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혼식과 같이 기쁨이 넘치는 축제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교회는 매월 첫주 성만찬 예배를 드립니다. 

이 성만찬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떡과 포도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또 하나는 마지막 날 천국에서 벌어질 잔치, 학자들은 이것을 메시야 잔치라고 합니다, 그 잔치를 미리 이 땅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성만찬이 너무 엄숙하고 비장하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성만찬은 기쁨과 승리의 축제입니다. 예배 또한 구원의 축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기뻐하며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신앙인들은 기본 감정은 기쁨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우거지상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거나 검열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처럼 어둠이 없고 기쁨이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았고,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기쁨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에서 솟구치는 기쁨입니다. 

여러분들 연애시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사랑하는 님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떠올려도 기쁨이 솟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금식 너무 많이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인생을 즐기고 행복하게 사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생에 고난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풍랑들이 근본적인 우리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감옥에 갇혀있을 때 쓴 편지이지만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바깥세계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오히려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주님은 15절에서 금식과 관련한 교훈을 더하십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승천하셔서 육신적으로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때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가 금식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또 디다케라는 초대교회 문헌에 보면 초대교회는 수요일과 금요일 이틀에 걸쳐 금식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교회 전통도 금식을 주된 영성 훈련의 전통으로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이어옵니다. 한국에는 40일 금식한 사람의 숫자가 2만 명을 헤아리며, 일주일, 20일 금식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금식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금식하지 않는 이유도 신랑 되신 예수가 함께 하기 때문이라 말씀합니다. 금식하는 이유도 신랑 되신 예수가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 말씀합니다. 금식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어떤 기도 응답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 금식입니다. 금식이 내 욕망을 채우거나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협박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욕망들을 비우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금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본질적인 목적을 떠나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금식을 이용하기 때문에 많은 부작용이 나옵니다. 그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며 오히려 욕심만 가득한 사람이 됩니다. 금식은 예수님을 알고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 새 부대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당시 유대교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새 것과 옛 것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진리를 두 가지 비유를 들어가며 설명합니다. 16절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요즘이야 옷을 잘 만들지만 옛날 옷들은 한 번 빨면 심하게 수축이 됩니다. 이것은 새 옷감일수록 더 심합니다. 낡은 옷에 새 옷감을 붙이면 새 옷감의 수축이 심해 낡은 옷을 해어지게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만약 옷을 망친다면 그것은 새 옷감의 잘못이 아닙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억지로 붙인 것이 문제입니다. 헌옷에는 헌 옷감을 대어야지 새 옷감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잘 안 되고 실패할 때입니다. 구멍 난 옷처럼 우리 눈에 자기의 실패가 더 크게 보입니다. 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무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그 회사나 그 일이 나에게 맞지 않아서일 뿐 입니다. 그럴 경우 인연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시대에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그 인생에서 실패가 한 번도 없고 항상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수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 때와 자기에게 맞는 일이 주어지니 결국 큰 성공을 이룬 것입니다. 새 옷감이 새 옷을 만난 격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의인인 채 하는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에게 맞았습니다. 선민과 특권의식으로 가득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서 그 둥지를 틀었습니다. 잘 맞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주님의 복음은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잘 맞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또한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17절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양이나 염소 가죽이 주로 부대자루로 이용되었습니다. 양이나 염소 목 부위로부터 상처 하나 남지 않도록 가죽을 벗겨서 그 터진 다리 부분과 꼬리 부분을 묵으면 훌륭한 가죽 부대가 됩니다. 이 가죽 부대도 오래 사용하다보면 늘어지고 약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새 포도주는 발효가 심하게 일어나기에 가죽 부대를 터트릴 수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맞습니다.

유대교의 율법 공동체는 낡은 옷이며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아니 그들이 낡았다기보다는 예수 공동체라는 새 포도주의 발효력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러니 옛 체계가 견디질 못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복수와 폭력의 기초 위에 선 질서가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그 십자가의 힘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가며 무능력하게 만드는 율법이 세리와 죄인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며 그들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로 바꾸는 사랑의 법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만이 선민이고 자기들만이 언약의 자손이라는 배타성 위에 선 민족주의가 사해 모든 인류를 한 형제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그 세계성을 포용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보상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종의 논리가, 아무 공로 없이 오직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 놀라운 은혜의 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기독교 또한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늘 왕성한 발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교회는 이 말씀을 담고 있는 가죽부대와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스스로 낡은 부대가 되어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을 담지 못하면 위태롭게 됩니다. 말씀의 끓는 힘이 가죽 부대를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중세시대의 물질과 권력에 찌들어 낡은 가죽 부대가 되어버린 로마 교회를 바꾼 것은 성 프란체스코의 가난과 고행이라는 새 부대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물질과 인간적인 교리로 다시 낡은 가죽 부대가 되었던 교회를 바꾼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를 제창한 루터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아예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리고 새 교회를 만든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하나님 말씀의 발효력을 견딜만한 가죽부대입니까? 한국교회를 향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비판의 목소리들은 어쩌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새 포도주와 같다 할 것입니다. 빨리 새 부대로 옮겨 담지 않으면 낡은 가죽 부대마저 터뜨리고 말 것입니다. 

최근 감리교 교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의 모습은 한국교회가 얼마나 낡은 가죽 부대가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두 명의 감독이 선출되어 자신이 합법적이라고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님이 자신의 영향력으로 거의 감독에 오를 뻔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회법적으로 문제가 있어 감독 후보 자격이 원천적으로 박탈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다 결국 세상 법정의 판결이 난 후에야 그 후보 자격을 금지 시켰습니다. 그런데 막상 총회 선거에서는 이분이 압도적인 표차로 1등을 했습니다. 이분은 대형교회 목회자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또 자신이 1등이 되었으니까 자신이 선출된 감독이라고 하며 이 일을 기정사실화하려고 여러 편법과 불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사건도 교회 자제 안에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사회 법정까지 끌고 가야 하고, 거기서 결론이 내려져야 해결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누구 개인의 잘못을 지적하기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낡은 부대가 되어버렸는지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받았다는 교회가 스스로의 잘못도 치리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무능력한 기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선거나 그 이후 과정에서 법이나 양심, 원칙, 거룩함이라는 것은 전혀 없고 오직 힘과 수로만 제압하려는 세상보다 더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거나 상대방을 사탄으로 규정하는 무례한 짓을 서슴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권력욕입니다. 대형교회 목회자가 되고, 총회장이나 감독의 자리에 올라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명예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교회의 거룩함이 상실될지언정 그 자리에 기어코 오르려 합니다. 그리고 그 주변은 정의보다는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무언가 이득을 취하려는 비겁한 무리들로 가득합니다.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버린 한국교회의 모습의 추악한 모습의 퍼레이드는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부글부글 끓는 말씀의 힘이 결국 낡은 가죽 부대를 터트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요 몇 개월째 환율 상승과 주가 하락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파장이 내년에는 어떤 찬바람을 몰고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여러 분석들과 처방들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적인 진단과 처방이 중요합니다. 위기는 사람들이 만들지만 하나님은 그 위기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이 거센 풍랑은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리듯 하나님 말씀을 떠난 지극히 세속화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가고 말씀에 합당한 가죽 부대가 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 부대를 터뜨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잠든 요나를 깨우려고 거센 풍랑을 일으키고 계신데 요나는 이것도 모르고 배 밑바닥에서 쿨쿨 단잠에 빠져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으면 요나뿐만 아니라 그 배 또한 깨뜨리실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겸손과 낮아짐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가난과 섬김을 회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자기희생과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결과 자기 부인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 말씀이 있고,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 안에서 새 포도주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새 가죽부대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우리 안에서 거룩한 충동을 일으킵니다. 75세 된 노인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80세 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만든 것 또한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나무에 숨어 타작을 하던 비겁한 기드온을 300 용사만 이끌고 승리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든 것도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민족주의와 분노에 쌓여있던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랑의 사도로 만든 것도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와 루터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불러 일으켰던 것도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새 포도주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새 가죽부대가 되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 이름 또한 존경을 받는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외면했던 자들은 터뜨림을 당하는 수모와 비참함을 맞았습니다. 주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여 주님의 합당한 도구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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