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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1) (엡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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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1) (엡 1:3~6)


I. 하늘에서

페루 어느 평원엔 무려 60km에 걸쳐 이리저리 얽힌 마른 개울같은 선들이 있다고 합니다. 폴 코속(Paul Kosok)이란 분이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이 지역을 연구하다가 뻗쳐진 선들의 신비를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사막의 선들은 70여개에 달하는 동식물 그림이었다는 겁니다. 어떤 그림은 15km에 걸쳐 그려져 있었고 새 한 마리가 300m의 폭에 그려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들이 너무나 신비하여 행여 외계인들이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Mavia Reichen 저 "사막의 신비" 중에서) 

에베소서라는 비행기를 타고 높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내려다 보니 가장 신비하고 존귀한 존재가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가장 신비한 공동체가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심장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에 교회의 신비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출렁이는 바다의 표면만 보고 그것이 바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다 속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고기들과 해산물들이 있습니다. 바다 밑엔 금은 보석 석유 등 탄광 자원들이 묻혀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조직 교회의 표면만 보고 그것이 교회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실대고 보혈의 능력이 파도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운행하고 계십니다. 무한한 영적자원이 묻혀 있습니다. 

「성도의 존귀 그리고 교회의 영광」이란 주제로 에베소서를 기록한 저자는 에베소서 1:3이하 본문 첫 문장을 기록하는데 자그만치 3절부터 14절 열 두절을 쉼표 마침표도 없이 한 문장으로 기록합니다. 헬라어 단어로 202개에 달합니다. 

우리말 성경엔 여러 문장으로 나뉘어져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은 한 문장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헬라어 문장 가운데 가장 긴 문장입니다. 그 내용은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 나를 구속하신 예수님, 인치신 성령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할렐루야 하나님 찬양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 
할렐루야 성령님 찬양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역사상 가장 긴 문장에 담긴 보화는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하늘에 속한 복의 창고를 여는 열쇠 -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시골의 작은 은행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느 분이 급히 송금할 일이 있어 시골 은행에 들렀다가 목격한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은행 여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창구 여직원이 물었습니다. "할매, 비밀번호 뭐라요?" 그러자 할머니는 아주 아주 가는 목소리로 "비.둘.기"라고 말했습니다. 매우 황당해 하며 여직원이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할매요, 비밀번호 말 안하면 돈 못 찾는다 아잉교... 비밀번호 말 하이소!" 그러자 살짝 입을 가리신 할머니는 한 번 더 "비.둘.기"라고 했습니다. 인내에 한계를 보인 여직원은 "할매요, 바쁜데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와 이라능교? 퍼뜩 비밀번호 대이소!"라고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그제야 할머니가 비밀번호를 말하는데 온 은행 직원들은 배꼽을 잡고 웃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비밀번호는 바로 "9999"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복을 여는 비밀번호는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헬라어로는 "유로겐토스" "하나님 복 받으십시요" "송축합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 찬송이란 악기를 연주하고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찬송이지요. 찬송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마음으로, 몸으로, 입술로, 노래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찬송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으신 목적이 바로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이사야43:21) 

매미는 단 2주일 - 보름을 노래하기 위해 7년 내지 17년을 거름더미 땅속에서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보름동안 노래하는 것이 좋아 맴맴맴맴 세상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릅니다. 

뇌성마비 천재시인 송명희씨는 "하나님 찬양합니다" 한 마디를 하기위해 두 팔을 비틀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두 발을 버티고, 배가 꿈틀거려야 하는 모습을 곁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송명희처럼, 매미와 같은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 성도의 찬양입니다. 

그리스신화에 "음악의 신 - 오르페우스"에 관한 얘기가 있습니다. 
큰 바다를 여러 달 항해하는 선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요정의 노래였습니다. 그 요정의 노래 소리만 들리면 선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다로 뛰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배에 오르페우스 신을 모시고 항해한 이후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정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오르페우스 신이 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에 취한 선원들에게는 요정의 노래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음악의 힘입니다. 


II. 영적인 복

현대인들이 왜 이토록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삶을 사는 것일까요? 왜 그토록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한 얼굴로 사는 것일까요? 하늘 보화창고를 여는 비밀번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배가 채워지지 않아 허할땐 밥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허하고 마음이 공허할 땐 어떻게 그 허전함을 채워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술과 담배 혹은 쾌락과 정욕에 자신을 던져봅니다. 중독이 되도록 인터넷을 뒤지고 인기인에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마음의 상처가 많을수록, 사랑의 결핍이 심할수록 마음의 구멍이 더 크다고 합니다. 허전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되고 잘못된 집착증이 심하다는 겁니다.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 웅덩이가 클수록 상처를 쉽게 받고 쉽게 허전해하고 땅의 것들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가슴에 뚫린 구멍과 상처는 땅의 것들로 매울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그 구멍은 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이 채워질 수가 있고 메워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늘에 있는 복, 영적인 복입니다. 

이 하늘에 속한 복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3절 이하에서 14절까지 숨쉴 겨를도 없이 폭포처럼 그 복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폭포가 얼마나 강렬했든지 자신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을 원망할 틈이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할 공간이 없습니다. 환경을 바라볼 눈이 없습니다. 상처타령을 할 여력이 없습니다. 자신을 등지고 떠나간 제자들을 미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입을 열자마자 찬송과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 
우리 말로는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만 영어로는 Spiritual Blessing 영적인 복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과 대조되는 말은 "땅에 있는 육적인 복"입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고 몸이 건강해지고 자식이 잘되는 것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의 구멍과 허전함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진다 하여도 순간적이요 일시적입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헬라의 제우스신이 준다고 생각했던 물질적 번영을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복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적인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아테네 여신이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적인 복이 진짜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을 주신다"고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복음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10개월이 이 땅에 살아가게 될 70년 80년 우리의 삶을 좌우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이가 상처를 받으면 이 땅에 살아갈 동안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게 됩니다. 10달이 100년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죽을 수도 있고 70년 80년 사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짤막한 이 땅의 삶이 영원을 준비하게 됩니다. 

D.L. 무디가 62세때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평균 나이가 58세쯤 되니까 꽤 많은 나이입니다. 그런데 신문에 Old 무디가 어떻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실은 무디를 칭찬하는 기사였지만 "Old 늙었다"는 말 때문에 굉장히 화가 났어요. 주일날 무디가 설교하러 단에 섰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신문 보셨죠. 나를 보고 늙었다고 썼습니다. 여러분 제가 늙었습니까?" 그랬더니 교인들이 가만히 있어요 진짜 늙었거든요. "내가 이제 겨우 62세인데 곧 죽을 사람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100살을 살 거예요." 교인들이 다 고개를 푹 숙였어요. '노망이 들었나.' "아니요 나는 천년을 살 거요. 만년을 살 거예요. 나는 10만년을 살 거예요. 10만년에 10만년을 살아 나는 영원히 영생하며 살 것입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아멘!"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야 될 장구한 영생의 세월이라는 것은 이 땅에 살아가게 될 50년 70년 80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땅에 80년 세월이라는 것은 한 순간 점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는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준비를 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에 남는 장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종말에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부요한 자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영적인 복이라고 할때 여기 "모든"은 영어 All이 아니라 "Every"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영적인 세계를 남김없이 하나 하나 전부 누리라는 축복입니다. 


III.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

첫 번째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이 무엇인가 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 1:4-6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선택이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냐? 만민 구원이냐 선택된 사람에게만 구원이 있느냐? 신학자들 사이에서 끝없이 논쟁하고 갈등하고 고민해 왔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모든 교파 모든 사람들을 만족하게 할만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택교리가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성경의 서로 다른 주장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인가 아니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인가? 이것 때문에 교파가 나뉘어졌습니다. 장로교에서는 선택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 안되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15:16)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하나님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고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내가 하나님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을 택하고 내가 하나님을 골라 잡은 것 아니더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 100번도 더 말씀하셨어요. "내가 선택했다. 은혜로 선택했다. 내가 너희를 불렀다. 너희는 내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놀라지 말아라. 손바닥에 새겼다. 내가 너를 택했다. 은혜로 택했다. 자격이 있어서 택한 것 아니다. 무조건 택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교리가 너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자기가 구원받는데 자기도 한몫 끼어들고 싶은게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99%까지는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나도 1%는 한 것 아닌가? 내가 이만큼 진실하니까 이만큼 예쁜 구석이 있으니까 이만큼 순종하니까 이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만큼 똑똑하니까 이만큼 착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것 아닌가? 자기의 공로를 0.1%라도 끼워넣고 싶어합니다. 그것 아닙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로! 이걸 말씀하시기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 선택의 교리를 계속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이 악하다는 겁니다. 

선택의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신령한 복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근거가 내게 있다면 그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땐 구원받은 것 같다가 내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뿌리부터 흔들립니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있기에 그 구원은 왔다갔다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변덕스런 분이 아닙니다. 천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를 기분 나쁘시다고 지옥으로 쫓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나를 자녀로 삼으셨으면 내 조건 여하에 따라 변경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택교리가 주는 영적인 복입니다. 

선택교리를 숙명론으로 오해하여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우리의 순종을 통해 천국으로 부르십니다. 복음전파를 통해 선택한 자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 복음전파를 통해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가 나누어집니다. 

오늘 본문 선택의 교리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혼란케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잘 압니다. 먼저 세상 만물이 창조되고 마지막날 마지막에 사람이 창조됩니다. 그런데 어찌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단 말입니까?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인간이 있었고 내가 그분의 계획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의 연장선상에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화되어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인간입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합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그 말이 이해가 안된데요. "아들이 몇이세요?" 그랬더니 아들이 넷이래요. "그러면 자녀 넷을 사랑하는데 권사님께서는 맡아들에게 ¼사랑, 둘째 아들에게 ¼사랑, 셋째 딸에게 ¼사랑, 막내 아들에게 ¼사랑, ¼씩 나눠서 사랑하세요?" 그게 아니지. 한 아들 하나 하나를 내가 가진 모든 사랑을 쏟아서 맏아들을 사랑하고, 둘째 아들 사랑하고, 셋째를 사랑하고, 넷째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알아 듣겠데요. 

한국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은 나를 천만분의 1로 나누어서 사랑하시는게 아닙니다. 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세요. 이 존귀함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내가 창세전에 선택받았고, 내가 지난 주일은 성도가 되었고 오늘은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마 어마한 것인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작은 일에 낙심합니다. 실망합니다. 절망합니다. 좌절합니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왜?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IV.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택하신 자들에게 따르는 또 다른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결하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거룩하지도 않고 흠도 많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아찔 아찔 할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자리에서도 미움과 더러운 생각이 지나갑니다. 심지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분노와 상처가 꿈틀거립니다. 입을 열면 험담과 부정적인 말을 뱉습니다. 이런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 "흠이 없는" 이 말이 헬라어로 아모무스(amomous)라고 되어 있는데 신약성경에 8번쯤 사용된 이 말은 구약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예물에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랑 안에서 흠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존재가 거룩해졌고 흠이 덮여졌다는 법적인 선언입니다. 

"흠이 없다"는 "아모무스"의 "모무스"(momous)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조롱과 비난의 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덮어버리면 비난의 신 모무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내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의 완전한 능력, 완전한 거룩을 말합니다. 이게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밝히시는 주의 보혈 
성자 예수 그 귀한 피 찬송하고 찬송하세
주님 앞을 멀리 떠나 길을 잃고 헤맬 때에
나의 뒤를 따라오사 친히 구원 하셨도다
흰눈보다 더 흰눈보다 더 주의 흘리신 보혈로 희게 씻게 주옵소서


V. 아들이 되게 하심

정죄의 신 "모무스"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흠을 덮어 주신 궁극적 목적이 5절에 나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중에서도 최고의 복 -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복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다고 합니다. 이를 성경은 "양자됨"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유대 개념엔 양자됨이 없습니다. 성경은 로마의 양자 개념을 빌려와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태어나는 자녀는 테크논(Tekuon)이라고 하고 양자가 되어 권리상 자녀가 되었을 땐 휘오스(huious)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양자개념의 "휘오스" 합성어를 사용합니다.(휘오데시안 - 양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겐 하나님의 자녀(테크논)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당시 로마사회에서 어떤 귀족이나 부자에게 자식이 없으면 때로 노예 중에서 아들을 삼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뉴스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노예에겐 천지개벽과도 같은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로마 황제 중에도 노예가 입양되어 황제가 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런 인물입니다.

아마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노예출신 유명인이 머릿속에 지나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가 된 것은 천지창조보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과거의 모든 신분, 과거의 관계, 실수와 죄악,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엄청난 복이 부자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진급되는 일이 이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이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하늘에 속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영적인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영원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1962년 당시 천문학적 제작비인 1500만불을 들여 만들고 무려 8번이나 재개봉을 했던 영화가 있습니다. 125,477명이 출연, 제작기간 10년이 걸려만든 영화 벤허입니다. 아카데미 11개 부문을 수상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벤허는 허(Hur)씨의 외아들이란 뜻입니다. 허씨 가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 예루살렘에서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살던 부호가문이었습니다. 어느날 로마의 신임 총독이 부임하게 되고 부임 축하 행진 중에 벤허의 여동생의 실수로 기왓장이 총독의 머리에 떨어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총독을 수행하던 멧살라라는 장교가 있었는데 그는 벤허의 옛친구였습니다. 바로 그 멧살라가 벤허의 어머니, 누이, 연인을 감옥에 보내고 재산을 몰수하고 벤허를 노예로 팔아 벤허는 갤리선의 노를 젖는 중노동을 합니다. 노예가 된 벤허는 갤리선(노예를 이용한 군용선)의 사령관 아리우스의 눈에 띄게 되고 이 배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았을 때 벤허는 사령관을 구하는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그래서 사령관은 벤허를 양자로 삼고 끼고 있던 반지를 벤허에게 끼어주지요. 그때부터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모든 권한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벤허는 로마의 귀족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이게 양자라는 로마의 제도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우리를 피로 덮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양자 삼아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권세와 자원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사탄의 노예선에 붙들려 사탄의 노를 저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신분, 죄와 실수, 허물과 과거는 모두 끝이 났습니다. 이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으로 에베소서는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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