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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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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눅 17:11~19)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시리즈 9번째 -

10명의 나병환자(개역개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나병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감염되는 병입니다.
한 때 나병을 ‘문둥병’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엔 문둥병이라고 하지 않고 ‘한센씨’병(Hansen’s disease)이라고 합니다.

나병에 걸리면 무감각해집니다.
나병은 고통의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마디(nerve endings)를 죽이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들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당합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사실 아픔을 느낄 수 있어 얼굴 찌푸리고 소리 지르는 병은 
그렇게 심각한 병이 아니랍니다.
정말 무서운 병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몸에 스며듭니다.
그러므로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나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물론 치료가 가능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나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모임이 ‘구라회’(救癩會)입니다.
나병을 구하자는 뜻의 모임으로 우리 교회에서도 구라회를 돕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 가운데 일부가 나병환자를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만남의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별하신 주일을 지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를 드립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님 만나는 복’을 받은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불쌍한 인생을 살던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까지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은 “멀리 서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12절)
왜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 서서” 예수님을 불렀을까요?

당시에 나병에 걸리게 되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고
건강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대로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며 다녀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아야 했습니다(참조, 레13:45, 46).

<레위기 13장 45~46절>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나병 환자를 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 규정에 따른 것으로 그 당시 나병 환자들은 그 병이 나았다는 판정을 
제사장들에게 받아야만 다시 온전한 사람으로 생활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신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 그들의 병이 나을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었고
- 나병환자들이 믿고 순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 열 명 모두는 순종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가던 그들의 몸은 깨끗해졌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흥분되었겠습니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기뻐 뛰었을 것입니다.
나병이 나았다는/완치되었다는 소식을
식구들에게, 친구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빨리 알려
자신이 더 이상 나병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 한 사람

그런데 그 중, 당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며 
천대받던 이방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5절).
“큰 소리로”(~praising God in a loud voice)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체험하는 기쁜 일이 있을 때 
소리 내어, 드러나게, 확실하게 …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운동 선수들 특별히 골을 넣은 크리스챤 축구선수들의 모습을 보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역도’를 하는 ‘장미란 선수’를 아실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장미란 선수는 태능선수촌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피아노에 앉아 예배 반주를 한다고 합니다.

장미란 선수가 역기를 들고 성공했을 때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이 자신의 믿음을/감사를 드러내야 합니다.
드러내지 않는 것은 …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참된 기쁨과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드러내지 않는 것은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이었지만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감사하며 
큰 소리로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감사를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15절).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며 예의를 표했다는 뜻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때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17절).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그 아홉 명은 요구는 할 줄 알았습니다. 기도는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몰랐고,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인간적인 감사의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이었습니다.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소리쳐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가라고 하니까 순종하여 가다가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 뒤에는 온 데 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분들 많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주여 주여’하며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면 ‘끝’입니다.
시험을 앞두면 기도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고 소리 내어 기도합니다. 
그런데 시험이 끝나면 ‘기도와는 끝’입니다.

그래도 그 아홉 사람에게 후한 마음을 가진 어떤 분은 이렇게 설명하시더군요.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모두 고침을 받고 돌아갔는데 
그중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깨끗한 몸으로 회복된 것이 너무나 기뻤던 까닭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달려가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의 감격이 가라앉게 되자 
그제서야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 보니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였다고 합니다.」 

감사는 감사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감사가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감사할 시기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9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하는 한 사람에게
“…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17:19)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병이 낫게 되었고 그 믿음으로 구원 받았음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은혜는 열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병은 열 사람 똑같이 치유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는 찬양하며 감사했던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이 내가 되면 / 우리 모두 자기가 되면
우리 모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인정받지 못하고 평범하게 
아니 멸시받고 살던 그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 …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겸손히 엎디어 감사했던 그 사람,
오늘,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바쁜 세상살이에 얽매여 … 
혹은 남과 비교하며 불평하고 원망하기 때문에 …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임마누엘’이 되어 주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지, 아닌 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동안을 돌아보십시오.
-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판하고, 수군거리고, 쑥덕거리고, 
다른 사람 흉보며 사셨습니까? 기억나시죠?

-‘하나님의 뜻이 계시겠지요.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사회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1950년대 지구촌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은 72가지였고,
절대 필요한 필수품은 18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0년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생필품은 500가지 이상이고, 
꼭 필요한 물품만도 5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필요한 생필품을 더 많이 누리며 사는 현대인들이라고 
과연 5,60여 년 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할까요?

195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것을 누리며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이 왜 자살 합니까? 
[전 광 지음, 「평생감사」, 생명의 말씀사, P. 10. 참조]

언젠가 세계 54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행복 지수를 조사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지수가 물질적 소유 또는 환경의 조건에 반비례하게 나타나 
행복의 척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행복한 나라로는 최빈국인 방글라데시가 뽑혔습니다. 

반면에 경제 대국이며 최고의 문화시설과 교육환경, 
자연환경 등을 두루 갖춘 선진국들인 미국, 스위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이 40위 권 밖으로 밀려나 큰 충격을 던져 주었는데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 지수는 23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방글라데시가 어떤 나라입니까?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의 100분의 1수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인구 밀도는 세계 1위이고 문맹률도 90%를 육박합니다. 
해마다 국토의 80%이상이 홍수에 잠겨 수해로 고통 받습니다.
천연자원도 없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교육시설이나 의료 시설도 열악합니다. 
사회는 양극화되어 있고, 뇌물과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행복지수는 높습니다. 
그들은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고
가족들과 이웃들 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통해 행복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 광 지음, 「평생감사」, 생명의 말씀사, P. 21~22. 참조]

이런 것을 보면 아파트 평수가 작아서 불행하고, 자동차가 없어서 불행하고, 
좋은 집에 살지 못하고 좋은 음식 먹지 못해서 좋은 옷 입지 못해서 불행하고, 
남이 가진 것 내게 없어서 불행하다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행복해지려면 먼저 감사의 눈을 뜨고, 
감사의 마음을 갖고,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야합니다.
행복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범죄심리학자인 소퍼(Soper)박사는 
형무소에 있는 죄수와 수도원에 사는 수도사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갇혀서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것은 같으나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불평과 요구만을 말합니다.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는 하루 종일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도 만일 감사의 기도 대신 
요구와 불만의 기도만을 드린다면 형무소의 죄수와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감사해야 할 이유 …

어떤 믿음이 좋은 아버지와 아들이 오순도순 잘 살았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들어오면서 상기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 들 : 아버지, 오늘 저에게 참 감사한 일이 생겼어요.
아버지 : 그래? 무슨 일이 생겼니?
아 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 정말, 정말 감사해요.
아버지 : 그래. 어서 말해 보렴.
아 들 : 오늘 집으로 오다가 차가 굴렀어요. 그런데 상처 하나 없이 이렇게 말짱해요.
아버지 : 그래, 나는 너보다 훨씬 더 감사하구나.
아 들 : 아버지도 굴렀나요? 몇 바퀴 굴렀는데요?
아버지 : 아니다. 나는 한 바퀴도 안 굴렀단다.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일상이 감사인 사람은 일상이 기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사고를 당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감사할 때 그곳에서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감사는 천국에, 불평은 지옥에” 속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때와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는 우리는 때마다 일마다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관계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 
다시 말해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매주 감사하며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매 주일 감사헌금」봉투에 적힌 글을 보셨습니까?
저는 거기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매 주일 감사해야 할 이유 
요즘 같은 세상에 일주일 내내 아무 일도 없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무슨 일을 당한 후 감사하기보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평안함에 더욱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일이 생기면 생겨서 감사하고 아무 일도 없었으면 더욱 감사 …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절기까지 정해 주셨습니다. 
바로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우리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주일이 되면 왜 찬양제를 합니까?
찬양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재롱떠는 것입니다.

감사절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입니다. 
감사절은 신앙 표현의 기회이며, 1년 동안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입니다. 
농부는 농작물 중에서, 직장인은 직장 생활을 통해 얻은 소득 중에서,
상인은 영업을 통해 얻은 것 중에서 …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힘든 일 많았고 어렵다고 말할 만큼 세상이 뒤숭숭하지만 …
감옥에서도 찬양하고 기도하며 감사했던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임금의 도장이 찍힌 줄 알면서도 
다니엘은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역경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사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여러분의 마음이 담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 최선을 다한 … 
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이 물으십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어디 있느냐?)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많습니다.
병 고침 받은 기쁨을 가졌으나 
감사할 줄 몰랐던 사람이 있었고 감사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자기들 문제만 해결하고 끝난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시렵니까?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몰랐던 
다수의 무리 아홉이 되시렵니까?
비록 혼자지만… 비록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 사마리아인 한 사람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했던 한 사람, 
구원의 선물까지 받은 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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